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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 숨쉬는 그녀 Feb 08. 2021

열흘의 예레반

슬픈 초승달의 나라 

      

“친구 카렌의 생일입니다.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세요.”     


페이스북에서 보내오는 알람. 페이스북은 잊고 있던 추억을 소환해준다. 작년의 오늘, 또 재작년의 오늘, 또 다른 해의 오늘에 내가 무엇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만났는지를 말해준다. 나보다 더 나를 더 잘 알고 있다. 어떤 한 순간의 나를 기억해보려면,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날짜로 검색해보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노트북을 검색해보면 퍼즐처럼 맞춰진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친구, 카렌. 2018년 12월에 아르메니아를 여행했다. 그때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관계가 좋지않았지만, 작년에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놓고 두 나라는 다시 맞붙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참패. 약소국 아르메니아.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 붕괴할 당시인 1915∼1917년에 약 150만 명이 학살된 슬픈 나라. 아르메니아를 여행한 후 썼던 여행기를 올려본다.      

    



      

여행한 지 4개월로 접어든 때였다. 다음 목적지 중동여행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친구들을 만나러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으로 향했다. 경비를 아끼려고 비행기 대신 기차와 버스로 이동하고, 저렴한 호스텔에서 지내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언젠가 나보다 먼저 그곳을 다녀온 친구는 아르메니아가 코냑이 참 맛있는 나라라 하였다. 내가 보낸 열흘의 아르메니아가, 코냑보다 깊숙이 내 마음을 위로해준 나라가 될 줄을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스포츠 센터의 친구들     


예레반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소 앞의 스포츠 센터 등록이었다. 비록 열흘이지만 동난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스포츠 센터에서는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헬스, 수영, 요가 등의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운동하고, 낮에는 여행하고 저녁에 다시 체육관에 들러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러다 보니 마치 동네 사람이 된 듯했다. 게스트하우스 할머니, 슈퍼 직원, 스포츠 센터 직원과 친해졌고, 같은 시간대에 운동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진, 그거 아니야. 이렇게 해. 이렇게.”     


요가 교실에서 만난 카린과는 더없이 친해졌다. 아르메니아어로만 진행되는 요가 교실에서는 곁눈질로 동작을 따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호흡과 동작이 엉터리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 나를 도와준 친구가 카린이다. 카린은 수업 틈틈이 내 호흡과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수업 후에는 한국에 두고 온 친구를 만난 것처럼 수다도 떨었다.     

 

“진, 나는 공화국광장 바로 앞에 있는 정부청사에서 일해. 에너지부서 소속 공무원이야.”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건축 박물관 구경을 시켜주기도 했고, 정부청사 안 카페로 초대해 함께 차도 마셨다. 배우자와 결혼, 직장 등 결혼을 앞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에게 자극받아 좀 더 영어 공부를 해서 언젠가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여행하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고도 했다. 자신이 내게 베푼 것을 생각하기보다 베풀지 못한 것 때문에 아쉬워도 했다.      


“진,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걸. 아쉬워. 이건 내 작은 선물이야.”

“고마워. 나는 아무런 준비도 못 했는데.”

“괜찮아. 아주 작은 거야. 나와 아르메니아를 기억하라고.”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널 잊겠어. 정말 고마워.”     


지금도 카린이 선물한 펜던트를 착용하거나 아르메니아의 명소가 그려진 카드를 한 장씩 넘길 때면 우리가 운동하던 스포츠 센터, 함께 걷던 공화국 광장과 공원, 차를 마셨던 카페를 떠올린다. 우연히 찾아든 낯선 이에게 정성을 다해 친구로 대해주던 카린. 가끔 페이스북에 남기는 그녀의 근황을 보며 언젠가 예레반을 다시 찾으리라 마음도 먹는다.     

예레반 근교. 코르비랍 수도원. 

한국을 꿈꾸는 친구     


“다이나, 한국은 어떻게 알게 되었어?”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요. 저도 한국에서 살고 싶어요. 한국에서 공부도 하고 싶어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봐. 내가 있는 동안 가르쳐 줄게.”

“선생님, 권태기가 뭐예요?”

“권태기? 그런 단어는 어디서 들은 거야?”     


한국어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했더니 대뜸 TV에 자주 등장하는 어휘들을 물어보았다. 고등학교 3학년인 다이나는 예레반에 여행 온 한국인 여행자를 도와주며 한국어를 익히는 중이었다. 여기서는 한국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다이나 역시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한국에서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 다이나와 대화하면서 그녀가 드라마와는 다른, 한국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었다. 아직도 사람 사는 정이 살아있는 이곳에서 사는 다이나가 우리나라에서 비정한 삶의 이면을 보고 상처받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선생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같이 식사하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고마워. 좀 괜찮아졌어. 나도 아쉬워. 건강하게 잘 지내고, 다음에 한국에 꼭 와.”

“네. 선생님, 예레반 떠나시기 전에 꼭 다시 뵈었으면 좋겠어요.”     

몸살로 꼼짝없이 호스텔에 몸져누웠을 때는 수시로 걱정하는 문자로 보내기도 했고, 아르메니아를 떠나는 날에는 호스텔로 찾아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선생님, 아프지 마세요. 따뜻하게 다니시라고 준비했어요.”     


손뜨개질 양말이었다. 며칠 아파서 숙소에 누워있던 나를 걱정해서 준비한 선물이었다. 조그만 체구의, 작은 얼굴에 큰 눈망울이 선한, 조곤조곤한 말씨로 이야기를 하던 다이나. 공항으로 떠나오는 길, 나는 길거리에서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어준 다이나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다이나가 그랬던 것처럼, 예레반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눈에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되면 대체로 환대했다. 현대, 기아, 삼성, LG 등을 거론하며 우리나라가 최고라는 듯 엄지를 세우기도 했다. 숙소의 직원 한 사람은 여동생이 연세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는데,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했다며 전화 연결을 해주기도 했다. 택배를 찾으러 간 우체국에서 알게 된 직원 한 사람은 부산으로 벚꽃 구경을 하러 가기 위해 항공권을 예약했다며 반가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나라를 인정해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책임감도 느껴졌다. ‘우리는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이 우리의 허상만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그러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나라를 찾는 사람들에게 더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슬픈 초승달의 나라     


아르메니아는 우리나라만큼이나 역사적인 아픔을 겪은 나라였다. 조지아, 터키, 이란,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만, 터키와 아제르바이잔과는 갈등 관계에 있어서 국경이 닫혀 있었다. 특히, 아제르바이잔과는 직접 오가는 일도 금지되어 두 나라를 오가려면 반드시 이웃 나라를 거쳐야 했다. 나 역시 아제르바이잔을 여행한 후 이스탄불에서 예레반으로 입국했는데 출입국관리소에서 긴장해야 했다.      


“그 나라를 갔다 왔군요. 왜 갔지요”

“... 네? 무슨 말인지?”

“여기, 당신 여권에 그 나라 출입국 스탬프가 있잖아요. 왜 갔지요?”

“저는 여행자예요. 단지 여행으로 갔을 뿐이에요.”     


새벽 3시에 도착한 예레반 공항에서는 여권에 기재된 아제르바이잔 여행 기록을 문제 삼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요구하는 온갖 서류들을 다 제출했는데도 한참을 붙잡혀 있어야 했다. 모든 여행자가 빠져나가고도 한참 후에야 겨우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두 나라 사람들은 상대국의 이름도 입에 담지 않았다. 필요한 경우 ‘그 나라’라는 표현을 쓸 뿐이었다. 터키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예레반 외곽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에 의해 숨진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추모하는 제노사이드 기념관이 있었는데, 제노사이를 인정하지 않는 터키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    

  

“할머니, 이것 좀 드세요. 디저트예요.”

“이것, 혹시 터키에서 가져왔어요?”     


이스탄불에서 산 달콤한 디저트를 게스트하우스 할머니께 드렸는데, 할머니의 표정이 미묘했다. 영문을 몰랐던 나는 제노사이드 기념관을 다녀오고 나서야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갈등을 알게 되었고, 할머니의 표정에 담겼던 마음을 이해했다.      


“인간에게는 양면성이 있어요. 선한 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는 거지요.”     


수영 교실에서 친해진 할머니 한 분은 아픈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지만, 인간이 가진 두 면을 함께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어떤 이는 아르메니아를 방문한 사람이면 제노사이드 기념관에 꼭 가봐야 한다고도 말했다.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건, 아픔을 속에 묻어두건 간에 여전히 아르메니아의 아픈 역사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아르메니아 영토 중 일부는 절대로 방문해서는 안 될 곳도 있었다.     

 

제노사이드 기념관


누군가가 말하지 않더라도 여행으로 잠시 스쳐 지나는 것과 사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오랜 여행자는 한 도시를 빨리 스쳐 가기보다 오래 머물며, 일상을 살듯이 여행하는 것을 소망한다. 완벽하게 그 도시를 알 수는 없어도 도시의 결과 속살을 느끼고, 주민들의 마음에도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여행을 다녀온 내게 사람들이 오래 살고 싶은 도시를 말해 보라고 할 때면 예레반을 떠올리게 된다. 열흘 머물렀고, 언젠가 다시 가고 싶은 그곳을. 흔히들 조지아를 보름달에, 아르메니아를 초승달에 비유하며 코카서스 3국 중 조지아를 최고의 나라로 꼽기도 한다. 그렇기에 예레반은 한 달 살기에 적당한 도시일지 모른다. 너무 빛나면 그 빛에 가려 주변이 보이지 않지만, 고만고만한 것들이 모여 있으면 더 자세히 보게 되고 숨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아르메니아가 그랬다.      


엉덩이가 맞닿는 미니버스에서 초콜릿을 나누어 먹으며 세반 호수의 눈바람에 언 몸을 녹였고, 경건한 기도를 올리던 수도원의 사람들 속에서 진심을 엿보았고, 거대한 주상절리가 펼쳐진 아자트 계곡 마을과 성채도시 가르니에서 이방인에게 따뜻한 웃음을 보내는 사람들의 소박함도 느꼈다. 무엇보다 카린을, 다이나를, 담소를 나누던 할머니를 만난 나의 아르메니아였다. 공화국 광장이나 오페라 극장, 캐스케이드 조각공원, 고문서관을 산책하며 아르메니아는 그저 코카서스 3국 중의 한 나라가 아니라 이방인을 따뜻이 품는 선한 친구들이 사는,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내 마음에 남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에치미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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