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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 숨쉬는 그녀 Feb 11. 2021

사람을 여행하다

캐시미어 스웨터에 담긴 추억

느끼지 못한 새 봄기운이 찾아왔다. 매화꽃도 피었다. 겨우내 입었던 옷들을 정리하며 자유롭게 여행다니던 때를 떠올린다. 올 겨울 잘 입었던 검은색 캐시미어 스웨터.  한 올 한 올에 추억이 스민 옷. 여행 친구로부터 건네받은 따뜻함이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래오래 간직할 스웨터. 2018년 불가리아 여행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스웨터에 얽힌 추억을 올려본다. 




그랬다. 

맥주 한 병으로 시작된 인연이었다. 불가리아의 소도시 플로브디프에서는 친구 라디의 집에서 며칠 머물렀다. 프로농구선수인 라디는 게임 시즌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집에 보관하고 있던 맥주 두 병을 이별의 선물로 내밀었다. 호스텔로 숙소를 옮겼을 때 같은 방을 쓴 마리안에게 나는 그중 한 병을 건넸다.     


“이것 마실래?”

“와우, 고마워. 마셔도 돼?”

“응, 친구가 두 병이나 주더라고. 내가 다 못 마셔.”

“그럼 내가 마실게.”     


마리안은 독일에서 온 친구였다. 하이델베르크 근처의 소도시가 고향인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길에 오른 지 4년째라고 했다. 곧 집으로 돌아간다는 그녀는 오랜 여행의 경험과 피로함, 여행을 끝내야 하는 아쉬움을 나와 나누었다. 생물학적인 나이로 따져 본다면 엄마뻘인 나와 마리안 사이에는 세대 차이가 날 법도 했지만 어색함이나 서먹함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여행을 좋아하는 한 인격체로 만나 고향 이야기, 여행 이야기, 가족 이야기, 그리고 각자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졌다. 또 한 사람의 지구촌 친구가 생긴 순간이었다.      


나의 여행 이야기가 담긴 『상파울루에 내리는 눈』을 읽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는 기술이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많은 친구를 어떻게 만났어요?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요?”라는 질문이 많았다. 대체로 자신들은 유명한 관광지의 특정한 공간이나 중요한 유적지를 숙제처럼 보고 온 것에 비해, 나는 어떻게 현지인이나 여행자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물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사람을 사귀는 특별한 기술이 내게 있을 턱이 없다. 차이점이라면 여행법일 것이다. 나는 여행할 때 대체로 30% 정도만 계획을 세우고 나머지는 비워둔다.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우연을 즐기기 위해서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귈 기회가 많아졌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랬다. 대략적인 여행 코스만 잡아두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것을 정해두어 아쉬움을 느낀 경험이 많았기에 출발하는 항공권과 첫 여행지의 숙소만 정해두었다. 적당하게 채운 냉장고에 음식을 더 보관할 수 있는 것처럼, 여행에도 여유가 있으면 일정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가 있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이틀 머물 것을 사흘로 또는 일주일로 기간을 늘려도 된다. 또 어떤 도시는 가볍게 건너뛸 수도 있다. 호스텔에서 마음이 맞거나 일정이 비슷한 친구를 만나면 함께 여행하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는 나이, 직업, 국적 같은 사회적 관계를 내세워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내가 가진 틀을 내려놓고 한 인격체로서 사람을 대했다. 우리는 모두 지구별에 살아가는, 같은 삶의 무게를 지닌 한 사람의 인격체일 뿐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겼다. 마리안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였다.      


“여행 중에 아픈 적은 없었어?”

“특별히. 그렇게 무리하지는 않으니까. 가끔 피곤할 때도 있지만, 좀 쉬고 나면 괜찮아.”

“집이 그립거나, 친구, 부모님, 독일 음식이 그립지는 않아?”

“별로. 가끔 그립기는 하지만 꼭 독일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내 친구는 지금 3년째 세계여행 중인데, 한국 음식을 많이 그리워하더라고.”

“그럴 거야. 한국 음식은 특별하잖아. 나도 한국 음식이 그리워. 한국을 여행하면서 정말 맛있게 먹었거든.”     


산을 좋아한다는 마리안은 여행 중에 산이 있는 곳마다 트래킹을 즐긴다고도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제주도를 여행했다는 그녀는 한국의 산들, 특히 지리산에 대한 애정과 한국 음식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보였다.      


“지리산은 정말 대단해. 너무 아름다워.”

“그래? 지리산을 올랐단 말이지! 지리산은 나도 좋아하는 산이야. 다섯 번이나 갔거든. 네가 지리산을 좋아한다니까 더 반갑네.”

“와, 너 정말 대단하다. 지리산은 꼭 다시 가고 싶은 산이야.”     

그런 그녀가 마케도니아로 떠나면서 자신의 스웨터와 작은 가방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진, 혹시 이 캐시미어 스웨터 필요하지 않아?”

“너는 어쩌고?”

“나는 이제 집에 가잖아. 없어도 돼. 이것 진짜 따뜻하거든. 진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꼭 주고 싶어. 이 가방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야.”

“고마워. 내게 정말 필요한 것들이야.”     


여름에 여행을 시작해 따뜻한 옷이 없다고, 날이 추워져서 걱정이라고 하던 말을 마음에 담아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따뜻한 스웨터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던 나는 마리안 덕분에 고민을 해결했다.      


“마리안. 이 옷과 가방에는 네 추억이 가득 들어 있을 텐데. 고마워. 소중하게 사용하고, 또 내 추억을 보탤게.”

“그래 주면 정말 고맙지.”     


그녀가 주고 간, 여행길의 추억이 한 올 한 올 스민 작은 배낭과 캐시미어 스웨터에 나 역시 또 새로운 이야기를 보태었다. 당장 그날 아침부터 햇빛 찬란한 플로브디프의 가을 냄새와 도시의 이야기들, 음악 소리, 음식 냄새가 가방에 스미었다. 그저 맥주 한 병을 건네면서 가볍게 시작된 마리안과 나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마리안은 나의 남은 여행을, 나는 독일로 돌아갈 그녀의 삶을 응원해주었다. 


마리안이 선물한 가방과 스웨터 덕분에 코카서스, 중동 여행에 큰 도움이 됐다.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은 우리가 그저 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에 눈을 반짝이고, 때때로 우울해지기도 하고 슬픔도 느끼는 한 인간. 그저 조금 먼저 태어나고 뒤에 태어났을 뿐, 생물학적 나이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들을 통해 배웠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알고,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성숙한 마음이었다.      


물론 여행에서 여유 있는 일정을 즐기거나 친구들을 사귀려면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여행 전에 충분한 준비를 한다. 여행지의 정보를 확인하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내가 꼭 보고 싶은 것들을 챙긴다. 하지만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세운 계획을 실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지는 않는다. 여행이라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확인하는 숙제 같은 것은 아니니까. 예를 들어 내가 파리에 가면,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겠지만, 박물관 안의 전시물보다 그 순간의 루브르를 즐기는 것이 나의 여행법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지, 다른 여행자들은 어떻게 여행하는지, 무슨 고민이 있는지. 그러다 보면 여행이 훨씬 더 풍요로워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즐거운 일이 일어나는, 나만의 루브르 여행이 만들어진다.     


불가리아에서 만난 타이완친구는 작은 팔찌를 선물하며, 팔찌의 의미를 이미지로 보여줬다. 
조지아에서 만난 러시아 친구들 덕분에 유쾌해졌다. 
나미비아 빈트후크에서 만난 아이들

아마도 인간을 꼭 닮은 로봇이 여행한다면, 로봇은 학습한 대로만 여행할 것이다. 최고로 짧은 시간에, 최고로 저렴한 가격으로, 최고로 합리적인 여행을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여행은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때로는 실수를 하고 손해를 볼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괘의치 않는다.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럼없이 내게 선물을 안긴 마리안 덕분에 나 역시 여행길에서 내 것을 나눠줄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낯선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은 결국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나를 내려놓는 자세,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만 있으면 된다. 이번 6개월 동안의 여행에서 나는 많은 친구를 만났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큰 대접을 받기도 했고, 불가리아에서는 프로농구선수인 친구 집에 며칠 머물며 그의 농구경기를 관람하며 응원을 하고, 동네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이란에서는 젊은 친구들을 사귀며 그들의 삶의 애환을 들었다. 타이완과 노르웨이에서 온 친구들과는 세 번이나 함께 여행하는 즐거움도 누렸다. 그 친구들은 오늘도 페이스북으로, 인스타그램으로 소식을 전해온다.      


“진, 한국에서는 생일을 어떻게 기념해? 한국 친구가 있는데, 왜 작년과 올해의 생일이 다른지 이해가 안 되네. 좀 가르쳐줄래?”

“진, 아내가 드디어 임신했어. 축하해 줘.”

“진, 나 이번에 사진 전시회를 가져‥….”

“진, 나도 네가 여행했던 이스라엘에 왔어. 지금은 네가 갔던 사해에 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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