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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드림 May 03. 2024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심어 가는 과정

등산과 글쓰기의 공통점

첫 직장의 선배 선생님과 언제 한 번 산에 가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100대 명산 완등이 목표였던 그녀는 빈말이 아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이미 숙소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경남권 등반을 모두 마친 그녀는 언제든 전국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있었고, 마침 내가 대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둔산으로 향했다.


대둔산은 그래도 비교적 최근에 한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등반한 곳, 출렁다리가 있고 돌계단이 많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일부러 다른 정보를 많이 찾아보지 않았다. 너무 많은 정보를 보다 보면 왠지 덜컥 겁이 날 것만 같아서.


선배의 차를 타고 가는 1시간 정도 멀미를 했다. 최근에 너무 무자비하게 위를 혹사시킨 탓에 부대낀 속을 조금 정리할 있기를 바라며, 산행이 간절해지기는 처음이었다. 커버댄스팀 연습복이 조금씩 작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넉넉했던 윗옷은 앉으니 윗배가 불룩하게 나왔고 힘을 주어도 큰 변화가 없었다. 몸무게는 인생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었다. 좌절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모습이든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긍정하기에 이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바람막이를 입고 가방에는 '혹시나', '어쩌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갖가지 걱정의 개수만큼 짐이 들어간 채, 산행을 시작하려고 하는 나를 보며 선배는 더울 텐데, 무거울 텐데 하셨다. 평소만큼 가방이 무거워야 왠지 안심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유경험자의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등산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지 않아 땀이 주르륵 흘러 바람막이를 벗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가방 무게신경이 눌러 바람막이가 벽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게 수만 있다면 아무렇게나 가방을 내버려 두고 가고 싶었다. 다시 돌아갈까 후회도 했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보자고 우직하게 걸음을 옮겼다.




산을 오르면서 문득 어린 시절에 했던 등산이 비추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오르고 싶지만 괜히 엄마에게 왜 이렇게 돌이 많냐고, 오르막길은 언제 끝나냐고 투정을 자주 부렸다. 내려오는 길에는 너무 쉽게 긴장을 놓았고, 다리가 풀리자 데굴데굴 굴러 여기저기 다치기도 부지기수였다. 넘치는 에너지를 조절하는 방법을 몰라 서툴렀던 순간들이 문득 마음에 스친 것은 왜일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대둔산을 오르며 그에 대한 대답을 해본다. 쉽게 지치지 않기 위해 눈앞에 있는 돌 하나에만 집중하며 발을 온전히 디딘다. 바위에 도장을 찍듯 뒤꿈치부터 발가락까지 깊이 딛으며, 몸과 마음의 속도를 점점 맞추어가는 느낌을 느꼈다


그래, 빠르게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지.
나는 천천히 가더라도 매 순간 중심을 단단히 잡으며 걷고 싶었다.



그리고 어쩐지 오르막을 오르는 과정에서 글쓰기와 비슷하다는 울림이 있었다. 쓰고, 지우고, 읽고, 다시 쓰면서 나의 속도와 방향을 감각하는 것. 도무지 언제 도착할지 가늠도 안 되는 발이지만 결국에는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두 발에 심어 가는 과정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틈틈이 휴식하고 물을 마시며 정상에 도달할 때 즈음 가방은 제법 가벼워졌다. 순진한 등산 초보는 그제야 주변이 보인다. 올라오는 길이 힘들 때면 올라왔던 길을 한 번씩 뒤돌아본다. 내가 이런 험준한 길을 올라왔다니, 너무 대단하다! 숨은 가쁘고 표정은 오만상이 되지만 마음만큼은 나를 한껏 기특하게 여긴다.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바라본 풍경에는 햇빛이 통과하여 투명해진 연두들이 싱그러운 응원을 해주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등산을 마치고 나니 부기가 빠지고 배가 제법 들어갔다. 얼굴을 쓱 훑어내리니 자잘한 알갱이가 만져진다. 내가 먼지가 너무 많이 묻었나 봐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그거 소금일걸, 하고 대답했다. 흘린 땀들이 식어 알갱이로 매만져지는 게 얼마만인지. 그러자 그것들이 하나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내가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는 아주 귀한 어떤 것이 되었다.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면 그동안 써왔던 노트들을 들춰본다. 소금처럼 짭짤한 그날들이 지금의 나를 묵묵히 밀어주며, 다시금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준다. 아무래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 나의 글쓰기 삶에 마지막이 온다면 그때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갈망하던 무언가를 회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등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를 허락해야 한다고 하던데. 그날은 산뿐만 아니라 내가 나에게 원하는 모습으로 다가갈 확신을 준 아주 상서로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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