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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드림 Aug 02. 2024

겁에도 계급을 매길 수 있다면 나는 고도 겁쟁이

한 달 전 나에게 편지쓰기

7월 1일의 나에게  


안녕, 7월 1일의 나야. 나는 8월 1일의 나야. 새삼스럽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의 공백을 두고 너에게 편지를 써본다. 보통의 나는 안 하던 짓을 잘 하잖니. 그래서 사실 새삼스럽지 않기도 해.

    

이번에는 독파에서 진행하는 시의적절 챌린지에 참여했어. 황인찬 시인의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이라는 책과 함께 말이야. 7월 첫날 시인의 에세이에서 내가 특히 눈에 들어온 구절은 ‘이사 온 지 두 달 만에 다리가 무너져버렸으니 그 황망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였어. 왜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하루의 시간이 거의 다 마무리될 때쯤에서야 그 이유가 생각났어. 이른 여름휴가를 떠난 그날이 마침 7월 1일이더라고.     


나는 그때 어떤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어. 사실 말이 준비지 마음만 먹다가 너무 먹어버려 몸이 빵빵해진 채로 꼼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마감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어. 그런데 그만 두려움까지 먹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결국 그 공모전을 포기하기로 했지. 겁에도 계급을 매길 수 있다면 나는 고도 겁쟁이인 것 같아. 꿈을 향해 나아가고 싶으면서도 꿈쩍도 하지 못한 이 모순된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찰나에 뚜자가 갯벌 체험을 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보령으로 떠났지.     


그곳은 이른 휴가를 온 나머지 너무 한적하게 느껴졌고, 도로에는 차도 거의 다니지 않아서 우리는 평소보다 더 어슬렁거리며 대천해수욕장 일대를 걸어 다녔어. 발밑으로 드넓게 펼쳐지는 바다를 두고 허공을 단숨에 가로지르는 집라인을 타며 신나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생망고 빙수를 먹으며 여름휴가의 단맛을 제대로 만끽했지. 그렇게 간조를 기다리며 드디어 갯벌 체험을 시작했어. 바다가 뒷걸음질 친 곳에는 갯벌의 민낯이 펼쳐졌고, 갈매기만 이따금 찾아와 어슬렁거렸어. 먼저 온 사람들이 캔 채취망은 바지락으로 그득해서 우리도 조만간 저렇게 가득 채워갈 수 있겠구나, 부푼 기대를 했지.     


선생님의 시범을 보며 따라 해도 나는 바지락을 캐는 게 영 시원찮았어. 뚜자는 손대는 족족 굵은 바지락을 캐냈지만 내 손에 잡히는 건 죄다 미끄덩한 자갈이었지. 그때 내 마음은 성급하고 초조했던 것 같아. 바지락을 캐려면 10cm 이상은 족히 파야 하는데, 나는 잠깐 파보고 나서 안 나온다고 단정 짓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에 바빴어. 찾았다, 이것 봐, 또 나왔어, 를 연신 외치는 뚜자를 보며 오랜만에 해맑은 미소를 보는 것 같아 기뻤어. 그리고 나도 비법을 알게 되었지. 물웅덩이 근처에서 조금씩 구덩이를 더 깊이 파보고, 흩어진 흙뭉텅이들을 다시 물에 풀어보면 바지락과 돌멩이가 걸러지는 것이 포인트였어. 꺼진 불도 다시 보듯, 캐낸 흙덩이도 다시 봐야 했던 거지.     


진득하게 나의 깊이를 파보는 것, 그리고 내가 조금씩 캐내고 모은 것을 다시 되돌아보고 내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을 깨닫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곁에서 바지락 캐는 데에 집중했고, 굵은 바지락을 캐내면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신나게 호미질했어.     

이윽고 간조시간에서 1시간이 지났습니다, 하는 방송이 들려왔어.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바지락을 캐다가 하늘을 바라보니 서서히 태양이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지. 나는 그 풍경을 보면서 슬픔과 보람 사이 어딘가 아득한 감정을 느꼈어. 그때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지나간 기회에 대한 아쉬움과 그런데도 내가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 발걸음을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     


채취망 입구를 닫기도 어려울 만큼 바지락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우리는 갯벌을 떠났어. 걸어올 땐 몰랐지만 순식간에 다시 갯벌에 바닷물이 차오르는 걸 보면서 내가 그토록 염원하고 바라던 그 기회와 순간도 자연스럽게 될 때가 되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어. 영원한 전진도, 영원한 후퇴도 없는 바닷물의 운동처럼 말이야. 지금 잠시 나는 한 발 물러서 나 자신을 관조하는 때라고 받아들이기로 했어.   

  

하지만 잊지 말도록 하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파도는 늘 자신의 몫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해서 황망함을 황홀함으로 재구성하고 있음을, 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야!


우리가 캔 바지락이라 더 맛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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