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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a Sep 27. 2018

한라산 산행기

백록담을 보았고 두 다리를 잃었다.

추석을 앞두고서 연휴가 시작되면 무엇을 하고 시간을 보낼 것인지 고민이 들었다. 제주에서 맞이할 마지막 연휴라고 생각하니 좀 더 생산적이거나 의미가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한라산.

지난 2년 반 동안 제주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보통 1년에 자동차 주행거리가 8,000~1만 km 정도라고 하는데 나는 14,000km를 탔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했었다. 매주 어딜 그렇게 다니냐고들 했다. 내가 그렇게 많이 돌아다녔나? 하고 스스로도 되물었지만 안 가본 곳을 꼽자니 한라산밖에 없었다.


작년 12월 31일 한라산을 다녀오긴 했었다. 성판악에서 시작해 해발 1,300m쯤인 사라오름에 올랐다. 사라오름에는 백록담과 같은 '분화구 호수'가 있다. 겨울이라 산행 중에 눈이 왔고 소복이 눈이 쌓인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었다.

작은 백록담이라는 사라오름 호수

하지만 사라오름의 감동도 나를 정상까지 이끌지는 못했다. 1,300m를 가는 것도 왕복 5시간이 걸렸는데 1,950m 정상 까지라면 왕복 9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체력 안배에 실패하여 이미 올라오는데 모든 기력을 쏟은 나는 하산하는 길에 몇 번이고 이건 꿈일 거라고 되뇌었었다. 다 내려와서는 굳게 다짐했다. 정상에 오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돌아와서 한 이틀은 근육통 때문에 계단 오르내리기가 힘들었었다.


그런 내가 한라산을 올라갈 생각을 하다니.. 주어진 시간 안에 뭐든 의미 있는 일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이 지난 산행의 근육통도 잊게 만들었나 보다.


왕복 9시간이라고 하나 10시간 이상은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정상 등반을 위해서는 등산화와 배낭은 물론이고 스틱까지 챙겨야 했다. 날씨는 선선했지만 정상에 오르면 춥다고 해서 옷도 단단히 입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7시에 성판악에 도착했다. 휴게소에 들러 물과 김밥을 사 배낭에 넣고 산행을 시작했다.


연휴 시작이라 그런지 오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생각보다 외국 관광객들도 많이 오르는 것 같았다. 내국인들은 여러 등산 장비와 전문 등산복을 갖추고 올랐지만 관광 중에 산에 오르는 외국인들은 컨버스나 단화에 반바지, 민소매 차림도 많았다. 저런 복장으로 정상에 오르는 게 가능할까 하고 의문을 품었지만 속속들이 나를 앞서는 그들을 보고 역시 '최고의 등산 장비는 체력과 나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지난겨울 산행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올랐던 것 같다. 첫 번째, 두 번째 화장실이 있는 속밭 대피소와 진달래 대피소까지는 무던하게 올랐다. 정상에 오르면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음료를 마시는 것이 많이 신경 쓰였다.


진달래 대피소부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였다. 하지만 이 코스는 경사가 매우 높고 계단이 많기 때문에 가장 난코스였다. 하지만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중간중간 제주와 서귀포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곳들이 있어 많이 지치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매서워졌다. 가을에도 이런 바람이 부는데 겨울 산행은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나무가 보이지 않는 평지가 나타났고 정상에 거의 근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자 사람들 너머 백록담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백록담을 마주친 순간, 짜릿하고도 경외로웠다.

와-

가뭄이거나 한 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백록담의 물이 모두 말라있기도 하고 워낙 심한 안개 때문에 일 년에 채 100일도 볼 수 없다는 그 백록담이 내 눈 앞에 있었다.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멋있기도 신비롭기도 경외롭기도 한 그 모습에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바다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는데 백록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며 눈, 머릿속까지 구석구석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 감상을 하고 나니 추위와 배고픔, 근육통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정상의 추위는 체감 5도 수준이었다. 세찬 바람에 땀이 식어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꽤 챙겨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입술이 달달 떨리게 추웠다. 열량 보충을 해야 하산이 가능할 것 같아서 얼른 배낭에서 김밥과 주전부리를 꺼냈다. 보온병에 싸온 따뜻한 물도 마셨다.

 

열량 보충을 하고 나서 백록담을 더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었지만 매서운 추위에 얼른 하산을 해야 했다. 이렇게 파란 하늘에 또렷한 얼굴을 보여준 한라산에게 감사의 인사를 마음으로 전하고 하산 코스인 '관음사' 방향으로 향했다.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코스는 성판악과 관음사 두 가지다. 성판악이 거리가 가장 길지만 난이도가 높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이 코스로 오르내린다.반면 관음사 코스는 경사가 높아 난이도가 높은 코스다. 저질 체력을 생각하면 성판악코스로 내려와야 하지만 관음사 쪽에서 바라보는 절경이 멋있다는 말에 관음사 코스를 과감히 선택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까마귀는 다 한라산에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까마귀가 산다.
장구목 능선. 부드러운 선이 제주를 닮았다.
웅장한 한라산 북벽의 모습.
용진각 대피소 터. 꽤 지대가 높은 곳인데 2007년 태풍 때 급류에 쓸려갔다고 한다.
관음사 코스의 수문장격인 삼각봉.

하산 시작부터 절경에 절경이 계속 나타나서 다리가 아픈 줄 모르겠다. 어딜 둘러봐도 모두 멋있는 풍광뿐이었다. 산을 오를 때는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며 별생각 없이 걸었는데 목표를 완수하고 내려오자니 여유가 생긴 것인지 눈 앞의 광경에 계속 감탄사만 내뱉었다. 올라올 때는 핸드폰을 꺼낼 생각도 못했는데 하산하면서는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내려가는 길에 인도에서 온 청년이 죽을 상을 하며 얼마나 남았냐고 물었다. 대략 내려온 지 30분쯤이지만 '20분 정도만 가면 된다'라고 말해줬다. 정상까지 남은 소요 시간을 축소해서 말하는 건 내려오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인가 보다.


급격한 경사의 본격적인 하산 코스가 시작되자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두고 올라올 때처럼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며 내려갔다. 이미 발목과 종아리의 고통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내려가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움직였다.


하산을 시작한 지 4시간이 지나자 내 의지로 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리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정신력과 체력은 이미 하산을 포기한 상태였지만 다리만은 그렇지 않았다. 무릎이 꺾여도 발목이 꺾여도 이 길을 내려가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예전 동화에서 읽었던 '빨간 구두'를 신은 아가씨의 다리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다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길고 어려운 산행도 나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한 가지 더 고통스러운 게 있었다. 바로 산행에서 만나는 쓰레기들이었다. 바닥만 보고 걸으니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들이 눈에 더 잘 보였다. 올라올 때도 있었지만 어째 내려가는 길에 더 많은 것 같았다. 아마 체력 소모 때문에 열량을 채우기 위해 까먹는 사탕이나 초콜릿 등 주전부리를 까먹고 껍데기를 바닥에 버리는 것 같았다.

(좌) 내가 주운 쓰레기들. 양쪽 주머니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우) 한라산에 원숭이가 사는 걸까.

쓰레기를 주울 때마다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유해한가'라는 생각을 되풀이했다. ‘주머니나 가방에서 쓰레기를 의도치 않게 흘렸겠지’라며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쉼터에서 우연히 올려다본 나뭇가지 위에 바나나 껍질이 대롱대롱 걸려 있는 걸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욕지기가 나왔다. 자신의 열량을 채우기 위해 바나나를 까먹고는 껍질을 휙 던진 그 인간을 생각하며 '3대 멸족'이라는 극형을 혼자 내렸다.


오전 7시에 시작한 산행은 오후 6시가 되어야 끝날 수 있었다. 장장 11시간. 평균 9시간이 걸린다는데 나 같은 저질 체력은 이 정도 시간을 잡아야 할 것 같다.


다리에는 이미 아무 감각이 없었지만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관음사 관리사무소에 들렀다.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력서 한 줄에 쓸 수도 없는 인증서지만 기념으로 뭔가 갖고 싶었다.


1,000원을 내고 인증서를 받아 드니 no.7964라는 인증번호가 보였다. 한라산을 등반한 사람들은 더 많겠지만 한라산 등정을 인증한 사람 중에 내가 7,964번째라니 뭔가 특별해 보이는 숫자 같았다. 11시간의 고행으로 대한민국 인구 5,100만 중에 1만 번째 안에 드는 인증 이력이 생겼다는 게 재밌기도 우습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앞으로 인생에서 한라산을 오르는 일은 다신 없을거라고 맹세할 정도로 너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올라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번쯤은 백록담을 보고 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산이 주는 자연이 주는 그 어떤 강렬함을 모두 한 번은 느껴봤으면 한다. 물론 산에 다녀온 후 한 나흘쯤은 걷는 게 무서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근육통에 시달려야할 각오는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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