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

Chapter 8- 흘러간 시간

by 구십이년생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녀의 기억은 여전히 어딘가 멈춰 있는 듯했고, 계절만이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여름의 빛은 사라지고, 이제는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날, 그녀는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거리는 바람에 날리는 하얀 입김과 무겁게 깔린 하늘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길가의 나무들은 잎을 모두 잃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마치 회색의 선으로 겨울 하늘을 긋고 있는 듯 보였다.

그녀의 발걸음은 느리고, 표정은 이유 모를 쓸쓸함에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한 여자가 다가왔다.

밝은 크림색 코트를 입고, 얼굴은 햇살처럼 환했다.

마치 추운 겨울 한복판에 혼자만 따뜻한 계절에 있는 사람처럼, 그녀의 표정에는 맑고 행복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스며들었고, 이내 머리가 찌릿하게 저려 왔다.

두통이 파도처럼 몰려와 숨을 고르지 못하는 사이, 시야가 흔들렸다.

이상한 끌림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여자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여자는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걸음을 옮겼다.

군중 사이에서도 유난히 밝아 보였고, 그 빛이 그녀를 홀린 듯 끌어당겼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눈으로만 쫓던 시선은 곧 몸을 이끌었고, 그녀는 좁은 인파 속에서 그 여자를 향해 나아갔다.


그 순간—


머리가 찌릿하게 아파왔다.

시야가 흔들리며, 억눌려 있던 장면이 터져 나오듯 열렸다.


햇살이 쏟아졌다.

차 안 가득, 창을 뚫고 들어온 빛이 투명하게 번졌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그 빛을 따라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햇살 속에서 눈동자는 반짝였고, 작은 손은 허공에서 춤추듯 흔들렸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완전했다.

햇살은 부드럽게 흐르면서도,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묵직하게 머물렀다.

그 빛 속에, 너무도 짧고 찬란한 순간이 영원히 새겨지는 듯했다.


그러나—


쾅!

금속이 찢어지는 굉음, 차체가 뒤엉키며 전복되는 충격.

햇살은 여전히 창밖에서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세상은 느리게 기울었고, 모든 것이 현실이면서도 현실 같지 않게 뒤틀렸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햇살과 함께 흩날리며 멀어졌다.

남은 건 얼어붙은 정적뿐이었다.



현실이 무너졌다.

그녀는 무언가에 끌린 듯 앞으로 몇 걸음을 내딛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


“괜찮으세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녀의 주위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멀어지는 시선 끝에서—

그 여자는 여전히 밝은 얼굴로,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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