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의 희망이 필요한 시대에 만난 박수근 전시
나무 좌우에 걸린 그림들을 제쳐놓고 빨려들 듯이 곧장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박완서, '나목'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에 다녀왔다.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속 문장처럼 실물로 본 그림 '나무와 두 여인' 속 나무는 고목이 아니라 나목임이 분명했다. 빛깔이 절제된 그림 속에서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생명력.
그림 속 사람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잔뜩 지거나, 이거나, 아이를 업고 있는 고단한 모습이었지만 살아있는 삶의 향기가 났다. 왜 어느 평론가가 박수근의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시를 읊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에도 어떻게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 수 있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