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고은 Dec 14. 2018

‘기레기’의 시대

2-2. 저널리즘 글쓰기

사실 앞에 겸허해야 한다는 ‘기자 정신’을 혹독하게 교육받은 후, 수습기자들은 드디어 수습이라는 딱지를 떼고 비로소 진짜 기자가 된다. 그러나 마치 훈장처럼 붙은 ‘일진(해당 경찰 라인을 관할하는 담당 기자)’이라는 이름을 얻자마자 혼란이 닥친다. 바로 보도자료, 통신사, 출입처 제도 등 언론인을 위해 조성된 완전한 생태계를 경험하면서다. 물론 스마트폰이 없어 통신사의 속보를 실시간 검색해볼 수 없던 시절과 비교하자면 ‘하리꼬미’ 자체가 사라지는 추세인 지금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동안 한국 언론의 역사와 문화가 이를 토대로 쌓인 측면을 감안하면 생각해볼 만한 지점일 것이다.


수습기자 시절에는 밤새 하나하나 애타게 정보를 얻다가, 정식 출입기자가 되면 경찰이 보도 자료를 통해 정보를 알아서 ‘풀(pool, 소식을 공식적으로 공유한다는 의미)’해주는 편리한 시스템을 접하게 된다. 경찰서 기자실 내에 각 언론사의 지정석이 있는 출입기자단 내부에는 단단한 질서가 존재하고, 취재원인 경찰과 기자단 사이에 협력적 공생 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이 같은 출입처 제도는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언론이 다루는 이슈와 관련한 대부분의 공공기관 및 기업 등에서 운영 중이고, 취재기자들은 탐사기획팀 등 출입처가 없는 부서를 제외하고 모두 그 질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제도와 문화가 개인을 완전히 잠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질서는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상당히 제약한다. 한국의 출입처 제도는 기자들이 해당 기관을 가까이에서 감시하며 더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어낼 수 있도록 돕지만, 한편으로는 기자들을 정제된 질서 안에서 취재하는 시스템에 머물며 야성을 잃어가도록 만든다. 질서정연하고 공고한 체제는 익숙해질수록 벗어나기 어렵고 그 속의 개인을 점점 더 옭아맨다. 질문을 권하는 미국 대통령에게 손들지 않는 한국의 기자들, 브리핑 룸에서 뚫어져라 노트북만 보며 타이핑하는 기자들, 타 언론사의 오보를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쓰기하는 기자들…. 지난날의 나 자신 역시 부끄러워지는 오늘날 기자들의 자화상. 그 근간에는 공고한 출입처 제도가 자리한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는 기자들의 무능과 안일함에 국민들은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속보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경찰과 정부가 불러주는 대로 검증 없이 받아서 쓰고, 현장의 한계를 이유로 처참한 상황과 유족이 처한 현실을 보다 면밀히 취재하지 않은 대가다. 출입처 시스템의 문화는 자리를 진도 팽목항으로 옮겼다고 해서 달라질 수 없었을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기레기’로 호명되는 것은 비단 세월호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십 년간 유지되어온 언론계 취재 관행의 한계로 인해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딱딱하게 굳은 취재 방식은 그 결과물인 기사에도 영향을 미친다. 신문지면이나 방송 리포트 시간 등 한정된 시공간 내에서 효율적인 생산물을 선보이기 위해, 올드미디어들은 스트레이트 기사나 역피라미드 기사 등 언론학개론서에 나올 법한 정해진 형식의 교과서적 기사 스타일을 오랫동안 고수해왔다. 정형화된 방식으로 기사를 쓴다는 것은 결국, 형식에 필요한 사실들만을 편집적으로 취재해도 괜찮다는 의미다. 그래서 위험하다.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울 마포경찰서는…”, “청와대는…”, “기획재정부는…” 등으로 시작하는 기관 발(發) 기사 형식들은 사실을 일별하고 진실을 추구해야 할 언론의 책무를 해당 기관의 입증 책임으로 떠넘겨버린 채 스스로를 ‘받아쓰기’ 언론으로 전락시킨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고, 내용은 형식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악순환이다. 글쓴이 스스로 궁금해 못 견뎌서 꿋꿋이 파고들어 건져 올린 사실이 아니라, 출입처가 선별하고 잘 가공해 90퍼센트 가까이 완성된 형태로 던져준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쓰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사들은 복제품이 되고 독자에게 읽히지 못한 채 의미 없이 인터넷 공간을 부유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독자의 뉴스 소비 패턴이 바뀌었음에도, 언론이 환경의 변화에 아랑곳 않고 새로운 방식의 기사쓰기라는 중요한 과제를 홀대해온 점은 문제를 더욱 증폭시킨다. 사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면서도, 퍼즐의 수많은 빈 구멍들을 용인한 채 구시대적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관행은 결정적으로 독자의 신뢰를 잃게 한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무언가 새로운 취재를 하는 것이 힘들다면 같은 기사라도 새로운 방식으로 쓰고 다르게 유통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지만, 언론의 노동 현실과 기사 생산의 구조를 감안한다면 기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기레기의 시대’로부터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살인 사건을 취재하려고 현장과 유족을 무작정 찾아갔던 일, 현안의 중심에 선 정치인을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집 앞에서 밤늦게까지 ‘뻗치기(취재원을 만나기 위해 약속 없이 기다리는 일)’했던 일 등은 지금도 특별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일상적이지 않은 취재 방식이었다. 부끄럽지만 기자로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출입처에서 출입처 사람들을 만나고, 출입처의 브리핑을 듣고, 기자실에 앉아서 전화로 취재하는 일이었다. 유력 정치인의 ‘입’만 바라보고, 기자단 내부의 질서에 맞춰 튀지 않으려 애쓰고, 기사의 형식에 맞추기 위해 편집적인 취재를 하는 일도 일상다반사였다. 연차 높은 선배 기자들이 현장을 찾으면 후배 기자들이 경의를 표할 정도로, 점차 현장과 멀어지는 기자들의 업무 환경과 문화. 그 속에서 강하게 저항하거나 변화를 도모하지 못한 나 역시 ‘기레기’를 만들어낸 당사자 중 한 명일 것이다.


독자는 냉정하다. 주류 언론사들을 위시한 전통 언론계의 암묵적 카르텔, 권언유착과 경언유착의 현실을 따져 묻는 국민의 시선은 날카롭기만 하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인터넷 뉴스 시장의 엉클어진 언론 생태계를 혐오하고, 1인 미디어 시대에 전통 언론사 기자의 몰개성과 나태함을 저평가하는 독자의 평가는 정곡을 찌른다. ‘기레기’라는 오명뿐만 아니라 기성 언론에 대한 독자의 외면이 오늘날 언론이 받아들고 있는 성적표다.



오랜 시간, 언론은 기사를 써서 독자 앞에 던져두기만 하면 되는 권력을 누리고 살았다. 전통적인 언론이 아니면 뉴스를 접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독자를 생각하고 연구할 필요와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독자는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지게 되었고, 언론이 아니라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뉴스를 소비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언론의 경쟁자는 검색 사이트와 소셜 미디어, 팟캐스트와 유튜브 등 날로 늘어나고 있다.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 독자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기자의 노동은 무가치한 일이 되어버릴 위기의 시대다. 저널리즘의 혁신을 선도하고 있는 〈뉴욕타임스〉가 2014년 내놓은 「혁신보고서(Innovation)」에서 강조한 것 역시 “독자를 핵심으로 만들라(make develop our audience a core)”는 것이었다. 독자를 가장 먼저,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언론의 미래는 어둡기만 할 것이다.


이것이 비단 언론의 기사쓰기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실패하지 않는 글쓰기란 과연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나는 그것이 결국 독자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글은 결국 독자에게 읽히기 위한 작업이다. 그러나 글이 닿게 될 독자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존재다. 글쓴이는 그저 마음속에서 어림짐작으로 독자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펼쳐놓아야 한다. 독자와 나의 거리가 어느 정도 될까, 독자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어디쯤에서 만날까. 수없이 고민하고 재면서 상상만으로 접점을 조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치다 다쓰루의 말처럼 “독자에 대한 경의”가 필요하다. 독자를 두려워하고, 살피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독자와 나 사이의 거리, 차이, 괴리를 예측하고 어떻게 하면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진심은 반드시 읽는 이에게 가닿는다.


기레기의 시대는 이 글쓰기의 기본을 망각했기 때문에 도래했다. 여기에 언론사 내부의 구조적 문제와 뉴스 유통 환경의 변화라는 외적 요인까지 더해져 길고 어두운 터널을 헤매게 되었다. 이 어둡고 침침한 터널로부터의 탈출은 성공할 수 있을까.

이전 04화 ‘그림 그리듯’ 취재하고 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