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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Oct 14. 2024

명함 활용법

사회생활의 물꼬, 관계의 시작

2005년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모은 명함만 해도 족히 수천 장이 다. 신문기자로 사회에 나왔으니, 드나드는 출입처에 따라 명함의 종류도 각양각색이었다. 사건기자로 경찰서를 출입할 때에는 서울 시내 32개 경찰관서의 경찰들에게 받은 명함이, 관내 대학교를 출입할 때에는 대학교수들의 명함이, 국회를 출입할 때에는 국회의원과 보좌진들의 명함이 쌓였다.


명함들을 다시 꺼내 보면 011, 017 등 옛날식 번호로 시작하는 휴대전화 번호도 있다. 지나고 보면 정말 귀한 명함들인데, 사회생활 초년생 때에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당시 취재를 위해 자주 연락해야만 했던 몇몇 취재원을 제외하고는 휴대전화에 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채 명함을 넣어두었고, 차마 버리지는 못해 물건 보관함 안에만 차곡차곡 쌓아두곤 했다.


예전 직장의 한 선배가 만나는 사람마다 명함에 그의 첫인상이나 특징을 메모해 둔다는 이야기가 이따금 떠오른다. 사회에 나온 지 내년이면 20년 차에 접어드는 입장에서, 나 역시 그 많은 명함들을 잘 관리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인맥을 잘 관리했으면 좋았겠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일터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들의 무게를 알고 조금의 정성이라도 더 들였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관점에서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정해진 범주 애초부터 있는 게 결코 아니라, 시간과 세월을 먹으며 함께 자란다는 것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다행히도 그런 의미에서 기술은 축복이다. 스마트폰이 도입되고 연락처 저장이 보다 쉬워지면서, 그때부터는 받은 명함을 허투루 쌓아두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연락처 정보를 저장할 때면 그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뿐만 아니라 정확한 소속과 직책을 풀네임으로 기록하고자 하고, 인사 변동을 알게 되그때마다 정보를 변경하고자 한다.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을 때 가장 최근의 직책으로 호칭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성의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명함을 사진으로 찍기만 해도 그 안의 정보가 자동으로 입력되는 편리한 플랫폼도 있으니, 이를 십분 활용하고자 한다.


각각의 개성을 가진 다양한 명함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명함은 그 주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최초이자 최소한의 ‘굿즈’다. 우연찮게도, 나는 다니던 직장마다 회사의 CI나 슬로건을 만드는 브랜딩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덕에 회사 브랜딩과 명함 디자인의 상관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심혈을 기울여 참여한 작업이 적용된 명함을 사용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 뿌듯하기도 하다.


다양한 전문가들의 명함 중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경우들도 다. 어떤 이는 자신의 캐리커처를 삽입한 명함을, 어떤 이는 남들과 조금 다른 특이한 재질의 용지를 사용하는 정도의 감각으로 상대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아예 증명사진을 박아 넣어 ‘나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호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명을 기재해 명함을 미니 포트폴리오처럼 사용했고, 다양한 경력을 가진 한 전문가도 조직의 명함 대신 자신의 이력을 써넣은 개인 명함을 쓰기도 했다. 모두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명함은 사회생활의 물꼬이고, 관계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첫 직장 퇴사 후 명함이 사라졌던 순간의 당혹감을 생생히 기억한다. 마치 내가 사회에서 무가치한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는 기분이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를 규정하는 정체성은 언제든 다시 새롭게 갱신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새로운 이력을 쌓아가며 제2, 제3의 명함을 만들어 갔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현재 직장의 명함 하나만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는 이제 명함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명함 하나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요즘처럼 한 군데 직장에 소속된 조직원으로서의 정체성만 지니고 사는 시대가 아닌 N잡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다음언젠가 직장의 울타리를 다시 벗어나게 된다면, 나도 한 번쯤 나만의 하나뿐인 근사한 명함을 제작해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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