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의 겨울이 가고 화합의 봄이 찾아온 지금
난 어릴 적부터 친구가 많았다. 반 전체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애들이 기본적으로 나에게는 호감을 갖고 있었다. 잘 웃고 다녀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한 30년 정도 살고 나니까 이 얽히고 설킨 내 인간관계에 너무 지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뭔가 도피처로 독일행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독일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였던 듯 싶다.
독일로 온 나는 처음에 정말 행복했다. 남편과 나, 그리고 인사만 하는 아랫집 식구들, 나와 연관된 사람은 이게 다였다. 너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6개월쯤 뒤 어학원에서 여러 친구를 알게 되었고 일본어 할 줄 아는 미국인 친구와 특히 친해졌다. 우리는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지금 근 9년간 쭈욱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주 만나진 않지만 뭔가 나와 인생의 방향성이 비슷한 친구랄까, 아무튼 만나면 배울 것도 많고 마음이 따수워지는 친구이다.
그리고 범수가 만 세 살이 되기 전 봄에 알게 된 한국인 친구가 있다. 범수가 말이 너무 늦어 페이스북 한국인 엄마 그룹에 글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때 연락이 닿은 뉘른베르크 사는 한국인 엄마였는데 알고보니 동갑이었고 서로 수다 떨고 싶을 때 만나는 친구가 되었다. 원래 가장 친했던 아랫집 터키 가족은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만나긴 하지만 뉘른베르크 내에 있는 친구는 이 두 명이 다이다. 다시 말해 당장 연락해서 만날 수 있는 친구는 단 두 명이다. 하지만 이들도 차로 20분쯤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나기는 매우 힘들다. 각자의 생활이 있고 바로 이웃이 아닌 이상에야 그 생활권에 서로 들어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동네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친구는 범수 유치원을 통해 자연스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수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없다. 범수가 사회성이 부족한 것이 매우 높은 언어장벽으로 인해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내 탓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일부러 놀이터를 자주 나가고 아는 사람에게 일부러 말도 걸어보고 했지만 아무래도 언어장벽 때문인지 깊은 대화는 어려웠다. 나에게 나의 어려움을 감안해 친절히 얘기해주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이를 키우느라 다들 피곤하고 예민해질 때도 있을 것 같다. 아이와 함께 만나는 자리밖에 없다보니 더욱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의 이사 문제가 정리되고 아직은 이곳 뉘른베르크에 남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독일어 실력을 더 올려야겠다는 결심도 섰다. 예전보다는 독일어로 얘기하는 게 아주 조금 더 편해졌고 이제는 조금 엄마들이랑 얘기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은 엄마 친구들이 조금 갖고 싶었던 것 같다. 마음 맞는 엄마들과 아이들의 어려움이나 잘하는 점을 얘기하고 남편 얘기나 우리집 사정, 그리고 지금 고민거리를 얘기하며 웃고 떠들고 싶은 기분이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추운 겨울이 지나고 지난주부터는 낮에 참 따뜻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다 보니 동네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제는 조금 베테랑 엄마가 되어 모래놀이 장난감을 나눌 때도 거리낌 없이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지난주에 영어를 하는 엄마와 아이를 만났다. 속으로는 '엇, 드디어 우리 동네에도 영어하는 엄마를 만났네. 친해지고 싶다.'라고 생각했지만, 영어로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을 건다는 건 언어와 상관없이 연습이 안 되어 어려운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끝내 용기를 내어 "How old is he?"라며 가벼운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역시나 영어로는 독일어보다 훨씬 다양한 얘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마주침으로 번호를 물어보거나 그럴 용기는 나지가 않았다. '내 열정이 부족한 걸까' 싶었지만 첫 만남에 모르는 사람에게 번호를 묻는 건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 어떤 인연은 흘러가는 걸까?
그리고 바로 어제는 동물원에 다녀왔다. 미국인 친구 가족과 같이 갔다. 독일 동물원에는 어디든 큰 놀이터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시간을 놀이터에서 보내긴 하지만 그래도 난 동물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동물원에 가끔 가곤 한다. 그런데 따뜻해진 날씨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동물원에 사람이 참 많았다. 미국인 친구도 오며가며 아는 얼굴들을 만나 인사를 하길래, 혹시 나도 범수 유치원 친구를 만나지 않을까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놀이터에서 유치원 친구를 만났다. 잠깐이지만 독일어로 그 엄마랑도 살짝 대화를 나누었다. 범수의 어려움이나 범수가 그 친구를 좋아한다고 집에서 말하곤 한다. 이런 얘기도 하고 그 엄마도 이런 저런 얘기도 물어보고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약간 동선이 겹치는 가족이라서 '이제 조금 가까워질 수 있을까? '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번호를 물어볼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하나도 애쓰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지내고 있지만 속으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갈팡질팡 하면서 나는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다. 애들 친구 엄마는 내 친구가 아니라는 말, 그런 말을 들으니,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아이들로 맺어진 인연은 아이들이 사이가 틀어지면 끝이 날 것이다. 애들의 관계가 끝나면 함께할 이유가 없어지니까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수의 사회성을 키워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인간관계는 억지로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억지로 했다간 결국은 끝이 날 관계로 피곤해질 뿐이라는 걸 나는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래 이사람 저사람에게 말을 붙이는 기술을 습득하고, 스몰톡하는 연습을 하는 것은 언어를 늘리고 관계 형성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좋은 능력이 될 수 있으니 갈고닦되,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싶어 허둥대지는 않기로,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봄이니 말 붙이는 연습할 기회도 많아지고, 그러다가 또 어떤 인연이 찾아와 주지 않겠냐는 기대를 슬그머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