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지향적 사고
한국에서 태어나 현재 30, 40대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출세해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와 같은, 또는 그 비슷한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중학교의 내 장래희망 조사서 아래 학부모란에는 '변호사'나 '선생님'이라는 글자가 적혔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부모님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듣고 자랐다. 간혹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이 계시긴 했지만, 그건 이상에 불과한 말로 들렸다. 나는 그렇게 결과가 다인 세상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을 쫓으려고 노력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었다. 성적순으로 대학교를 가고 또 학교 간판, 학점순으로 취업을 하는 그런 세상과 밀접했던 나는 바로 내 가까이에 있던 그 세상에 발을 들여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와는 안 맞는 옷을 입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세상 안에서 살기에는 내가 너무 게을렀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인생 끝까지 누군가와 비교하고 경쟁해야 할 것 같은 그 세상과 단절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이건 그 세상에 대한 내 개인적인 편견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나는 그런 생각에 갇혀 20대를 보냈다.
결혼을 하고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내 원가족과 큰 갈등을 겪었다. 나는 엄마랑 친하지 않은 딸이었다.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희생하는 엄마를 좋아하고 존경했지만 단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도 나는 엄마에게 말로써 얘기하지 못하고 늘 글로 썼다. 대학교 진학 시에도, 결혼을 결정할 때도 나는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집에서 늘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내가 성격이 안 좋아서 뒤끝이 길어서 함부로 말도 못한다고 나를 평가했다. 근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가족들이 대하는 게 늘 어려웠다. 겉으론 아무말이나 하면서 웃었지만 진짜 내 마음은 잘 얘기를 못했던 것 같다. 비난받지 않을 만한 방식을 찾아 얘기했던 것 같다. 그렇게 겉으로만 친하게 지냈던 그런 관계는 진짜 내가 선택한 가족이 생기고 그 가족을 그러한 비난으로부터 지켜내야겠다는 결심이 서면서부터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그러한 큰 갈등이 생기고 나서 나는 내 원가족을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참으로 엄마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진지한 대화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니, 아니, 엄마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는 엄마를 세상 좋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우리네 전형적인 희생적인 어머니상으로 그렇게 엄마를 그려왔던 것 같다. 엄마가 자식들 공부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던 것은 적어도 사실인 듯하다. 그렇게 내 환상 속에 있던 엄마를 나는 참으로 존경했다. 그런 엄마의 삶을 나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존경했다. 감히 나는 이를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색안경이 벗겨지고 나니, 그저 한 인간이 보였다. 엄마는 참으로 성취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는 나를 참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엄마의 사회생활 속에서 나는 좋은 자랑거리였다. 나를 어떤 식으로 자랑했는지는 다만 짐작할 뿐이다.
그 후폭풍으로 온 동네 아줌마들이 나를 좋아했고, 그와 동시에 그 자식들 중 몇몇은 나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심지어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4살 때부터 친구이던 내 소중한 소꿉친구가 나를 따돌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나를 주동하여 따돌리던 그 아이는 그간의 정 때문에 무척 괴로웠는지 2주가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 나에게 울면서 사과했다. 그때 그 아이는 나에게 엄마가 나와 비교하는 게 너무 괴로웠고 내가 너무 얄미웠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아이가 특별히 밉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지내기는 어려웠다. 나는 뒤끝이 긴 성격이라. 나는 그렇게 한 번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스스로를 뒤끝이 긴 나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점점 성취와 멀어졌다. 성취를 이뤘더니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것보다는 내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아이였다. 사람을 너무 좋아했던 아이였다. 나는 집보다 밖에 나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이미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집에 있는 것보다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다. 선생님들을 좋아했다. 학교를 좋아했다. 학교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내 지적 호기심을 충족해 줬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배울 게 너무나도 많아서 좋았던 것 같다. 곤란을 겪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 바른 말을 하며 나서는 것도 좋아했다. 그냥 학교에는 내가 알고 싶은 새로운 것들, 새로운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났다. 나는 방학이 되는 게 싫었다. 학교에 늘 가고 싶었다. 그런 내가 따돌림을 당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은 그때의 나에겐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말이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그때 그 감정이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영부영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초등학생일 때보다 훨씬 더 소극적인 아이가 되었고, 성적은 체구가 작은 나를 친구들이 무시하지 않을 정도로 유지했다. 그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1등이 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기를 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1등 반에 가도 꼴찌 반에 가도 반에서 6~9등을 유지했다. 그래서 우습게도 꼴찌 반에 가면 성적이 떨어지고 1등 반에 가면 성적이 올랐다. 급기야 고등학교에 가서는 공부와 멀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기 전까지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간 익혔던 기본 실력과 시험 기간 때 요령 있는 벼락치기로 내신을 유지했던 것 같다. 성취를 요구하는 환경에 있을수록 나는 성취와 멀어졌다. 그 어떤 뭔가에 대한 거부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 어렸을 때의 부정적인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그런 성취 지향적 사고들과 씨름을 했던 것 같다. 남편은 그와는 아주 멀리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주 편안한 마음이 뭔지, 진정 나다움이 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독일로 왔다. 독일은 획일화된 성취 지향적 사고가 없는 곳이었다. 몸이 불편한 사람도 길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곳이었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은 남들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관심 없는 듯 보였다. 누구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말을 더듬더듬 해도 말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사람이 많았다. 늘 뭔가에 쫓기듯 살았던 나는 처음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게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인 것 같다.
얼마 전에 프로보노라는 드라마를 보았는데, 거기서 주인공 엄마가 돌아가시면서도 아들에게 출세하라고, 올라갈 수 있는 만큼 올라가라고 말한다. 그 대사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출세가 대체 뭐길래. 저 주인공은 엄마의 유언 때문에 저리 피곤하게 사는 건가?' 그러면서 또 엄마가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 아빠들은 그런 시대를 산 것 같다. 근데 또 어찌 보면 누군가 뒷바라지만 해 주면 높이 올라갈 수 있었던 시대였던 것 같다. 그렇기에 항상 누군가의 뒷바라지에 대한 결핍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래서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자식들 뒷바라지를 한 게 아닐까? 어찌 보면 참으로 고달프고도 슬픈 세대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또 그 세대 때문에 그 자식들은 그 죽일놈의 성취 때문에 엄청난 정신적 부담을 지고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부디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부담을 주지 않고 자기 인생을 책임만 질 수 있다면 범죄 외에 무슨 일을 해도,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분위기의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 바로 가까이에서 그런 가정 분위기를 직접 목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바람이 더 커지는데, 그렇게 자라지 않은 내가 그런 환경을 만들고, 그런 경험을 심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고민이 많은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