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3구역 동갑내기 빌라에 사는 어느 셀프 인테리어 중독자의 고백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나는 여러모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배우가 되겠다고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온 지 2년째, 입시도 연기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다이소 아르바이트와 투잡, 쓰리잡을 병행하던 나는 어디서든 잠들 수 있을 만큼 매사에 피곤했다. 무엇보다 서울살이에 드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친구와 둘이 살던 연남동 투룸은 여러모로 너무 좋은 집이었지만 매달 나가는 월세를 감당하는 게 점점 버거웠다. 고정비용을 줄일 방법이 필요했고, 주거비를 줄이는 게 무엇보다 시급했다. 어떻게든 전세로 바꿔보자는 마음에 당시 내가 받을 수 있던 전세대출 한도 6천만 원 이하 전셋집을 이 잡듯이 뒤졌다. 서른 개쯤 알아봤을까. 지역도 도봉, 성북, 노원, 은평 할 것 없이 조건에 맞는 매물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집 구하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물론 대출금이 적어서도 있었지만 돈도 없는 주제에 방 한 칸짜리 원룸에는 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나는 뜻대로 되지 않는 주변의 모든 일들에 지쳐갔고, 내 집만큼은 내가 바라는 대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사계절 옷을 모두 보관할 수 있는 집이어야 했고, 서울에 신세 질 곳 하나 없는 비서울권 지역민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졸업한 친구들이 면접차 서울에 오더라도 하루정도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되었으면 했다. 결국 나의 이런 이상한 고집과 절박함이 모여 나는 무리수를 두게 되는데, (내 인생이 항상 이런 식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이 한남동 언덕 끝에 있는 95년생(나와 동갑이다) 다 쓰러져가는 전세 4천만 원짜리 집을 계약한 것.
이 집과의 첫 만남이 생각난다. 방문과 몰딩은 누구의 취향인지 옥색으로 페인트 칠이 되어 있었고, 결로로 물방울이 맺힌 장판 위로 곰팡이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베란다는 고사하고 보일러실도 따로 있지 않아 부엌 상부장 옆에 먼지 쌓인 보일러와 파이프가 그대로 노출되어 이게 부엌인지 창고인지 모를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장실엔 세면대는 없으면서 수도꼭지는 각 벽면에 하나씩 도합 세 개가 요상한 위치에 달려있었고, 냉장고는 작은 방에, 세탁기는 큰방에 놓여있는 것을 보아 이 집이 가전을 놓는 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집을 계약했느냐. 그동안 돌아다녀본 집들은 이보다 더욱 처참했고, 그런 집들을 보며 차츰 인식하게 된 나의 현실과 그에 맞춰 하향평준화되는 나의 기준, 비슷한 컨디션이라면 이왕 교통이 편한 한남동이 낫겠다는 계산과 투룸 계약 만료일이 다가온다는 조급함,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집 보러 다닐 힘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집을 계약하겠다고 하자 중개인 아저씨는 잘 생각했다며 여기서 돈 모아서 더 좋은 집으로 가면 되지 않겠냐고 덕담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을 했다. ‘서울에서 방 세 개짜리 빌라가 전세금 4천만 원이다’. 집을 좀 보러 다녀본 사람은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즉슨 집주인이 재개발 차익을 노리고 집을 사두긴 했는데, 그냥 둘 수 없으니 전세를 놓고 있지만 곧 재개발될 집에 십원 한 장 쓰고 싶진 않고, 전세금 낮춰서 내놓으니 이것저것 따지지 않을 세입자가 들어와 알아서 살아보라는 뜻이다. 실제로 도배, 장판은 고사하고, 집주인은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아마 십 년 전 이 집을 사두고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을 테지. 집주인은 계약하던 날 나를 보더니 젊은 아가씨가 이런 집에 혼자 산다니 기특하다고 말하면서도 어딘가 안쓰러워하고, 민망해하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사활을 건 셀프 인테리어가 시작됐다. 당시 나는 오기와 패기로 똘똘 뭉친 20대 중반으로 무서울 것이 없었다. 매일이 생존이었기 때문에 곰팡이 가득한 다 쓰러져가는 전세 4천의 동갑내기 빌라에서 살아내는 것이 이번에 내게 주어진 미션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신촌 다이소에 출근하고, 오후 1시에 퇴근하면 곧장 한남동 전셋집으로 와서 혼자 공사를 시작했다. 장판을 걷어서 버리고, 벽지를 뜯고, 곰팡이를 지우고, 그 위에 퍼티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하고, 쓰레기를 나르다 보면 어느새 저녁 일곱, 여덟 시가 되었고, 나는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녹초가 된 몸으로 다시 연남동 투룸으로 돌아갔다.
두 달 동안 정신없이 연남동과 한남동을 오가며 집을 환골탈태시키고 난 뒤, 친구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이 집주인은 너한테 돈 줘야 하는 거 아니니. 이 집 재개발되면 이거 다 아까워서 어떡해. 재개발 늦게 돼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라며 한남 3 구역 재개발 추진이 지연되길 온 맘으로 빌어주었다. 그리고 어느덧 3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정권이 바뀌었고, 내 인생에 오세훈이 다시 서울 시장이 되는 걸 볼 줄은 꿈에도 몰랐고, 한남3구역의 재개발은 한남뉴타운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진행되어 올해 6월 관리처분인가를 받았다. 단군 이래 최대 재개발 사업장이라는 한남3구역. 재개발이 끝나면 평당 시세가 1억 원을 넘어설 전망이라는데, 그럼 내가 사는 이 11평짜리 빌라는 11억이겠네. 하긴 이 집 보러 왔을 때 중개인 아저씨가 이 빌라 시세가 15억이라고 그랬지. 실제로 아직 재개발이 덜 진행된 옆동네 한남4구역 빌라가 21억에 거래됐다는 기사를 봤다. 우리 집주인은 아파트 분양권을 받겠지.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는 얼마짜리일까. 요즘 건너편 주택에 사는 건물주 아저씨 표정이 좋던데. 부럽다. 한남3구역 재개발이 완료되면 임대주택은 876세대, 토지와 건물 소유자에게 돌아가는 게 4,069세대, 일반분양은 831세대가 지어진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세대수가 1만 가구라는데, 이 중에서 4,069개의 황금티켓을 가져가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보다도 더 작은 바늘구멍 같은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들어가는데, 우편함에 노란 봉투가 꽂혀있었다. 보낸 이는 ‘한남3재정비촉진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조합’. 이주 보상 안내에 대한 내용이었다.
신청 기간 : 10월 5일부터 10월 19일까지. 신청장소 : 이주관리 사무실. 이사비 대상자는 최초 사업시행 인가일(2019.03.19) 전부터(해당일 포함) 실제 거주하고 있는 주거용 건축물의 세입자로서…(후략). 내가 이 집에 들어온 건 2020년 10월 27일. 나는 조합이 결정한 이사비 지원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내가 이 집에 어떤 애정을 쏟았는지, 이 집이 내게 어떤 의미이고, 내가 이 망가진 집을 어떻게 되살렸는지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건 보상체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곧 재개발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도 제 발로 들어와 거주한 사람. 이 집에 나의 지분은 조금도 없다. 따라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은 없다. 그들은 이주 명령은 문 앞에, 보상 안내는 우편함에 넣어두고 갔다. 우편물에 내 이름이 처음으로 똑바로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