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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9. 2021

[생각 12] 내 세금은 어디로 갔나.

요기요기 요기 있지.

삭막한 도심에서 생활하다 보면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기 어려울 수 있다. 직장동료들의 아우터가 점점 얇아지는 변화 정도가 다인 사무실과는 달리, 도심 속 공원이나 횡단보도 옆 화단을 볼 즈음에서야 '아. 봄은 봄이구나' 싶을 때가 많다. 4월. 겨우내 움츠렸던 씨앗 속 새싹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피는 계절. 새싹의 계절이라고 할 만큼 여기저기 다양한 초록이 물드는 시간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지름신이 다가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다 설레는 걸까. 쇼핑몰이나 길거리 옷가게를 둘러보면 옷들이 꽃을 피우듯 화알짝 폈다.  우중충하거나 조금 따뜻한 색의 단조로웠던 겨울옷과는 달리, 봄옷은 대부분 하늘하늘하고 화려한 패턴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에도 여러 지름신들이 꽃을 피우신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오늘은 구름이 예뻐서. 오늘은 미세먼지가 없어서. 매번 핑계도 다양하다. 봄 내음이 풍길 때마다 카드슬래쉬를 무한정하고 싶은 손모가지를 잡으라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카드슬래쉬를 넋놓고 시작하면 어느샌가 텅장이 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지어다.



요즘에는 아예 체크카드를 들고 다니면서 새는 돈을 막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 지름신의 꽃을 피우는 대신 정말 꽃과 새싹을 보려고 노력한다. 새싹이 좋아지고, 꽃이 예뻐 보이면 점점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라고 하던데 사실인가보다. 아직 인생은 청춘인데 벌써 안간힘을 내 빼죽 올라온 연한 새싹 하나가 그렇게 귀여워 보이고, 화려하게 핀 꽃을 보면 넋을 놓고 벤치에 앉아 구경한다.



최근에도 볕이 좋은 날 내천가 벤치에 앉아 넋을 놓고 자연을 만끽했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며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을 흔들었다. 약간의 흙내음과 풀, 꽃이 섞여 나는 자연의 냄새가 마음을 놓이게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와. 내 세금. 너무 예쁘다."



속세와 자연 그 어딘가의 발언이 아닐 수 없는데, 옆 벤치에 앉아 계시던 할머님께서 한참을 웃으셨다. 나는 내 말에 웃으시는지도 모른 채 좋은 일이 있으신 가보다하고 계속 넋을 놓았는데, 긴 너털웃음을 끝내신 할머님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학생이 왜 다 산 늙은이처럼 말을 해? 이 늙은이도 그렇게 생각은 안 해봤고만."


"...... 저요 어르신?"


"그래. 학생이 아니고 아가씨인가?"


"네. 아가씨가 맞긴 한데 학생이라고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요즘은 마스크 때문에 늙은이들은 사람 구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아유. 아니에요. 마스크 때문에 아는 사람도 못 알아보시는 분들 많으세요."



처음 뵙는 할머님과 나는 그렇게 벤치 하나 만큼의 멀찍한 거리 두기를 지켜가며 얘기를 나누었다. 자연을 즐기러 온 마음이 같았고, 볕이 좋은 날 아가씨 말대로 세금이 너무 예쁘지 않냐고 말씀해주셨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래 이렇게 좋은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그 한마디에 할머님 손 주름 사이 고생이 한껏 녹아들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해 보여서 감히 내가 가늠해볼 만한 한마디가 아니었다. 어린 이 사람은 그저 그렇다고 긍정의 대답을 드리는 게 다였다.



그 이후 할머님과 나는 한참 예쁜 세금을 보며 말없이 말을 나누었다. 이후 일정이 있었던 내가 먼저 일어나자 조심히 가요 학생이라는 정말 감사한 말을 건네주셨다. 할머님께는 당뇨가 없으시면 드셔보라며 작은 다크초콜릿 몇 개를 나눠드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앞으로 낼 세금이 엄한 곳에 가지 말고 더 화려하게 피어, 다음에도 이렇게 감사한 우연을 만날 수 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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