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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정체성 Feb 15. 2020

집에게 쓰는 편지

7년을 함께 보내고 떠난다.

스무 살부터. 그러니까 9년째 이 동네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이만큼 나이를 먹었단 사실에 굉장히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집에서 7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고, 이젠 그 시간이 일주일 남짓 남았다.

이 동네는 ‘서울살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이뤄낸 나의 보금자리가 돼버렸고, 내 20대가 온전히 깃든 나의 또 다른 영혼 같은 존재가 됐다.

그런 이곳을 떠난다.


정이 많은 타입이라. 사람에겐 굉장히 칭얼대는 편(찌질한 면모도 굉장하지만)이고 장소도 잘 떠나지 못한다.

정이란 게 참 붙이긴 쉬운데 떼어낼 땐 상당한 아픔이 따른다. 특히나 난 더 그렇다.

이 집을 떠나기엔 쓰라림이 상당하다.

이 집에서 난 많은 것을 해냈고, 많은 것을 했고, 많은 것을 겪었다.

밤새 시험공부를 하며 이면지에 숫자들을 그려나갔고 매번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탔다.

기나긴 여행을 떠날 땐 이 집을 맡아줄 학우를 구했었고, 동생과 아래윗집에 살며 배달 음식도 시켜먹었다.

그런가 하면 한 때는 바닥을 치는 자존감을 붙들고 자소서를 써 내려가고 거울을 보며 면접 연습을 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난 첫 직장을 구했고 (생각해보니 어시스턴트도 이곳에서 합격해 샤워하면서 엄청 기뻐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회사를 출퇴근하며 설레어하고 힘들어하고 그러면서 또 관두고 다시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고.

정말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이 집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 땐 자살하겠다며 아등바등 거리기도 했었고. 울고불고 소리 지르면서 싸우기도 했었지.

그래도 좋았던 일이 더 많았던 여기.


나쁜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심심찮은 기억이든 돌이켜보니 다 정이고 추억이다.

기억을 정리하고 떠나야 하는 건 내가 정말 잘 못하는 일이지만, 추억하는 일은 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뭉클하게 잘만 하니까.

그래서 오늘, 퇴근하고 이불에 누워 내 시선의 천장을 몇 컷 찍었다.

이 집을 기억하고 싶고, 나의 찬란함을 담았던 이 공간을 새로운 기억 속에서 잃고 싶지 않다.


방이 세 개나 있고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골프장과 헬스장은 물론 수영장과 사우나도 갖춰진 그런 멋진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됐지만

그 무엇도 이 씁쓸함은 달랠 수 없다.

긴 세월을 함께해준 이 네 평 남짓한 방에게 고맙고, 그 세월 동안 내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 이 공간이 주는 기운에게도 고맙고,

내 열정적이고 찬란했던 20대를 이 아늑했던 곳과 함께 보낼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다고. 오래도록 이곳을 기억하고 싶다고. 인격체가 있다면 꼭 전하고 싶다.


이삿날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이 시원섭섭함은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내일은 집 앞에서 백반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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