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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Feb 25. 2024

북한산 자락길

지난밤사이에 폭설이 내려서 오늘 아침에는 온 세상이 하얗게 은세계로 변했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자주 오기는 했으나 낮이 되면 기온이 올라 대부분 녹아 버려서 제대로 설경을 감상할 기회는 적었다. 어떤  부지런한 친구는 강원도까지 다녀와 눈 덮인 선자령에서 눈구경을 실컷 했다고 자랑하기도 하지만.

눈이 많이 와서 경치는 좋지만  눈길을 걸어야 하니 조금 염려된다. 오늘 우리는 북한산 자락길을 걸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유튜브 방송에서는 북한산자락길이 계단이 하나도 없는 무장애 숲길이라고 소개하기는 했지만 눈이 많이 쌓였을 테니 걷는 길이 미끄러울까 봐 조심스럽다. 어쨌든 홍제역에서 만나보고 의논해서 결정하기로 한다. 경사진 산길이 너무 위험해 보이면 차선책으로 홍제천을 따라 평지를 걸을 수도 있으니까.


홍제역에는 일곱 명의 친구들이 모인다.  모처럼의 눈 구경의 유혹을 떨칠 수 없었나 보다.

원래 홍제역 1번 출구에서 북한산 자락길 입구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홍은동의 아파트 단지 사이로 올라가는 길이 꽤 경사진 길이므로 오늘은 마을버스를 이용해서 가보기로 한다. 1번 출구 뒤쪽으로 마을 버스정류장이 있고 우리가 타게 될 12번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팔각정이라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리자마자, 모두들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른다. 동화 속의 눈 덮인 산속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다.  실락어린이공원이라는 표지판도 보이고 맞은편으로 북한산 자락길 팻말이 보인다.  북한산 자락길에 들어서니 무장애 데크 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져 올라가므로 편안하게 숲 속길을 걸을 수 있다. 산이 많은 서울 시내에서는 안산자락길에서부터 시작하여 동네마다 앞 다투어 산중턱에 자락길을 만들어 놓아 주민들이 산책하기 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북한산 둘레길은 이미 부분적으로는 걸어 보았으나 자락길은 오늘이 처음이다.

이 자락길에 들어서니 나무들 가지마다 소복이 목화솜 같은 눈꽃이 피어서 온통 눈꽃길이 이어진다. 마치 설악산 깊은 산중에라도 들어간 듯 눈꽃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친구들은 걸으면서도 수시로 감탄사를 연발한다. 다행히 눈 쌓인 산길의 눈이 아직 녹거나 얼지 않아서(녹으면 진창이 되고 얼면 얼음판이 될 테니) 눈길이 폭신폭신하고 덜 미끄러워 걷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곳곳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서울의 산들은 또 어떤가? 맞은편의  안산, 인왕산, 북악산이 진경산수화의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그림을 보여준다.


홍은동 북한산 자락길의 거리는 입구에서 옥천암까지 4.5 킬로미터라고 되어 있어 빠르게 걸으면 한 시간에도 걸을 수 있겠으나 오늘은 눈길이라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걷기도 했지만 이 보기 드문 절경을 카메라에 담아두려고 도중에 열심히 사진을 찍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어 옥천암에 도달하니 거의 두 시간이 걸린다.

이 자락길의 종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옥천암과 그 아래  홍제천변에 있는 보도각의 백색 마애불(정식 명칭은 옥천암마애보살좌상으로 보통은 보도각 백 불이라고 부른다)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장소이다. 지금부터 113년 전 이곳을 다녀간 독일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여행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소중한 글과 그림과 사진으로 이곳의 풍경을 상세히 남겨서  그 글을 읽은 나에게 뒤늦게 서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계기로 탐방을 시작하여 작년 이맘때는 홍제천변을 걷고 이곳을 지나며 보도각 백 불을 확인하고 쉬어 간 적이 있다.


오늘은 옥천암까지 오느라고  예정한 시간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으므로 보도각과 옥천암에는 머무르지 않고 홍제천을 따라 계속 세검정 방향으로 간다. 홍제천 물가의 산책길은 벌써 눈이 녹아서 질척거리기 시작하며 신발을 적신다.

이 산책길 도중에 홍지문과 탕춘대성이 보이는데 여기서 보는 풍경이 또 한 폭의 그림이다. 우리는 도시가 아니라 마치 어느 먼 산골마을에 들어가 계곡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이 탕춘대성의 오간수문과 홍지문도 내가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서울의 유적이다. 그동안 오랜 세월 세검정로를 자주 지나다녔으면서도 또 어렸을 적에는 세검정 계곡에서 물놀이를 했으면서도 내부순환로의 고가도로 아래 감춰져 있는 이 그림 같은 장소를 모르고 지나쳤다. 백 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이곳을 알게 해 준 베버 신부에게 새삼 감사의 마음이 든다. 그때 신부님은 지금 우리가 가는 길과는 반대로 창의문을 거쳐 세검정을 지나오면서 홍제천을 따라 내려가다가 다시 무악재 고개를 넘어 독립문 옆을 지나  서대문으로 해서 시내로  들어간 것 같다. 그때의 그 길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언뜻 상상이 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세검정까지 못 가고 세검정 직전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창의문 방향으로 가다가 부암동의 자하문로  도중에 있는 우리가 잘 가던 만두집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평소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이다.


오늘은 북한산 자락길의  눈꽃길을 걸으며 설경에 취했다가 대단히 만족하여 행복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니 11000보 이상 걸었다.


 2024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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