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이아 Apr 28. 2022

생각이 뒤척일 땐 어떻게 하나요?

네 번째 편지


서로 생각한 것을 나누고 토론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생각이 부딪힌다고 해도 나름의 새로운 생각거리를 주니 즐겁습니다. 하지만 살면서 제대로 나누고 토론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나누지 못했고 서로를 배려하느라 제대로 토론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받는 것을 못 하는 사람'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비슷한 결론입니다. 겸손이 미덕이 되어 이것밖에 줄 게 없어 죄송한 사람이 되기보다 겸손이든 미덕이든 오다 주웠다며 쥐여주고 미움을 받든 이해를 받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론입니다. 



몇 주 전, 그러니까 윤과의 편지를 시작할 때쯤이네요. 그때의 저는 죄송한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도 아닌 그냥 번아웃된 사람이었는데요. 그 와중에도 뭔갈 이용해서 벗어나려고 했던 걸 보면 뼛속까지 나쁨으로 물들어 있나 봅니다. 그렇게 짧게 이십 날 정도를 내리 취해 있었고 추태도 부렸고 바닥도 찍어 봤군요. 이렇게 윤을 이용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미안합니다. 상당히 머쓱해지네요. 그래도 덕분에 적당히 이기적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워크숍의 기획안을 짜고 있었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뭔가 새로이 벌이려는 걸 보니 정신을 차렸나 보군."하고요. 사흘에 한 번씩 세상에 혁신을 가져올 거라며 들이밀었던 획기적인(저에게만) 기획안이 요새 보이지 않아 이상해하던 참이라고 했습니다. 친구에게 윤과 편지를 나누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기대했던 부럽다거나 잘해보라는 반응이 아닌 "너가 잘해야겠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온몸에 책임감이라는 비늘이 쫙 돋았습니다. 비늘이 돋았다고 갑자기 없던 리더십이 생기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로 인해 윤이 혼란스러워하면 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다 주웠다며 쥐여주는 것 중 추태는 다시는 없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일단 마음은 먹었습니다). 윤이 의외로 단단해서 추태에 면역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것은 미리 방지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변명이 길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술을 마시고 편지를 쓰지 않겠습니다. 죄송해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사람을 일대일로 만납니다. 그게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솔직하고 속 깊은 얘기를 물어보는 것을 좋아해서도 있습니다. 상대의 몰랐던 면을 파악하기도 편하고요. 내 취향을 드러내기도 조금 더 쉽습니다. 여러 명이 만나면 집중 상태가 흐트러져서 고장 납니다. 거의 말을 안 하거나 겉도는 화제만을 반복해서 던지거나 쓸데없이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약속에 갑자기 예정에 없던 사람이 나타나면 상대의 잘못이 아닌데도 짜증이 납니다. 예정에 없던 사람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정도일까요. 



만약 상대의 그 행동이 반복되면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선으로 꽂습니다. 나와 대화할 생각이 없냐고 말이죠. 혹시 불편하면 나와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죠. 



말은 무섭게 하지만 결국 저것은 투정입니다. 투정치고 너무 살벌해서 상대방은 예정에 없던 사람이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이제까지 잘 놀았으면서 갑자기 왜 그러냐고 당황하죠. 그래서 고민입니다. 어떻게 해야 살벌하지 않게 나의 투정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요? 이제 그 친구는 같이 오지 마. 라고 하기에 그 친구의 잘못은 없는데. 그렇다고 상대의 잘못도 없죠. 그저 즐거운 사람을 모아서 즐거움이 배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요.



약속 상황을 예로 들긴 했습니다만 요즘의 고민은 부드럽게 전하는 투정입니다. 윤은 잘 모르겠지만 삐뚤어진 성격으로 세상을 살면 투정이 많아집니다. 꼬꼬마 때는 투정을 힝힝거렸지만 안 꼬꼬마인 지금은 투정을 살벌하게 터뜨리죠. 살벌한 표정이 문제일까요? 평온한 표정으로 얘기하면 부드럽게 전달될까요? 말이 직선인 것이 문제일까요? 평온한 표정으로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고 하면 될까요? 혹시 좋은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습니다. 아는 것이 약일 때도 있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환상 속에 살아도 된다는 느낌이고 아는 것이 약이라는 말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느낌인데. 그렇다면 모르는 게 달달한맛이라면 아는 것은 쓴맛입니다. 그렇다면 모르고 싶었지만 알게 되는 건 럼을 숨긴 초코인 걸까요? 요즘은 그 초코를 너무 많이 먹어 매일 취해있는 느낌입니다. 모르고도 알고도 싶지 않아 럼초코를 못 본 척 숨겨도 보고 안 먹은 척도 해보았는데 매일 집에 오는 길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면 분명 먹긴 먹었나 봅니다. 



모든 세상이 내 중심으로 흘러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럼이 들어있지 않았던 거였죠. 생초코처럼 부드러운 맛이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초코가 딱딱해지더니 그 속에 럼이 들어있었습니다. 사실은 내 중심이 아니었고 사실은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주변인으로 어딘가에 멈춰 있었죠. 럼은 썼고 찐득했습니다. 



덮어주는 초코는 달았지만 결국 럼의 쓴맛에 찐득하게 먹혀버렸죠. 



내가 럼초코를 먹었다는 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결국 멍때리는 표정으로 다 드러나는데도 말이죠. 왜 갑자기 멍때리냐는 상대의 질문에 퍼뜩 정신이 듭니다. 평소에 멍을 좀 때려뒀던 것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아냐, 나 원래 멍 잘 때려."라고 위기를 넘깁니다. 하지만 억지로 멍한 표정을 숨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먹었다, 싶으면 바로 집으로 도망칩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않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모든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니라는 걸 모른 채로 

내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싶습니다. 



진심은 전해진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걸 오래 모르고 살았습니다. 알고 나니 가졌던 겁 중 조금이 없어진 기분입니다. 그동안은 내 진심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까 무서워한 적이 많았는데 어차피 전해지지 않을 거라면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치사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내가 주는 것은 진심이지만 상대가 받아들이는 게 의심이라고 해도 끄덕여주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상대의 진심도 나는 모를 때가 많습니다. 눈치채지 못하거나 마음이 삐뚤어져서 모를 경우가 태반이죠. 그런데 왜 나는 나의 진심만이 제대로 전해질까 전전긍긍했던 걸까요. 왜 전해지지 않아 서운해했던 걸까요.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욕심이라는 건 아는데요. 그게 참 쉽게 포기되지 않더라고요. 저 자신도 생각이 왔다 갔다 할 때가 많은데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니. 참 궤변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말에 딱 맞는 답변을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고민이 시작됩니다. 어떤 말을 해야 했을까, 어떤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생각 짧게 너무 가볍게 얘기한 건 아닐까, 세상 너무 무겁게 얘기한 건 아닐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상투적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여기면 마음이가 아픈데. 



보통은 상대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다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멍청하게도 말입니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백에 99.9명은 괜찮다고 하겠죠. 안 괜찮다고 하면 제가 무얼 해줄 수 있을까요.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포옹을 해주거나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너무나 한정적이고 한정적이어서 쪼그라드는 마음입니다. 진심은 전해지지 않아도 괜찮다더니 하나도 안 괜찮나 봅니다. 맞아요.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그저 진심으로 쪼그라들어 있죠.


 

상업적인 힐링을 파는 회사에게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관철이 있어 상업 힐링이 필요하지 않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냥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요. 어렵습니다. 힐링을 소비하고 싶은 사람이 존재하고 그에 맞추어 돈을 버는 힐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업적 힐링을 비판하는 사람도 존재하죠. 힐링은 아이템은 아닙니다만 아이템으로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진심은 상업적이진 않지만(애초에 체계적이지도 않고) 상업적으로 비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생각을 관통하는 글로 누군가의 공감을 사야 할 때입니다. 그럴 때면 단어 하나의 고민 마침표 등의 부호 하나의 고민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힐링을 아이템화 시키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런 기교 없이 잘 쓴 글을 보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일까의 의문이 먼저 듭니다. 생각은 먼지처럼 잘게 뇌 속에 떠다니는데. 그걸 잘 이어서 잘 표현해서 잘 닿게 쓴 글을 만나면 그저 놀랍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어쩜 그리 똑똑할까요. 자신만의 관철법이 있는 걸까요. 많은 사람을 이해하는 걸까요. 아니면 상업적인 걸까요. 



아픔이 습관인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불확실한 불안에 쫓겨 익숙하고 안정감을 주는 아픔으로 피신한다고 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마치 내가 긍정을 사이비종교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들은 아픔을 그렇게 여기는 건지. 그렇다면 그들의 마음이 이해 갑니다. 그들과 나는 표현 방법만 다를 뿐이지 결국 같은 곳에 웅크려 있습니다. 나의 본성이 '나쁨'이라는 것이 납득 가는 항목입니다. 결국은 나도 긍정이라는 아픔에 습관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생각에 뒤척일 땐 핸드폰으로 ‘캔디 크러쉬 사가’ 게임을 합니다. 똑같은 모양을 3개 맞추면 타일이 없어지는 퍼즐류의 게임입니다. (이런 걸 사가라고 부릅니다. 게임 장르 중 하나죠.)  애니팡류 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머릿속을 잠시 멈추고 싶어질 때면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을 굴리기 좋습니다. 단계마다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하면 라이프 하나를 잃습니다. 라이프는 총 5개인데 꽤 많은 단계를 즐길 수 있어 생각을 멈추기 딱 좋은 시간을 보냅니다. 오랜 기간 해서인지 2864단계까지 왔네요. 이 편지를 보낼 때쯤이면 더 많은 단계를 클리어했을 겁니다. 이번 답장은 캔디 크러쉬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했거든요. 어떤 말을 보내야 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엎질러진 물 잔의 꼬리까지 이어져 심장에 닿을락 말락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치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발 하나만 걸치려고 하는 치사함이죠.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게끔 수를 쓰는 겁니다. 나는 내가 못된 말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성숙하고 싶지만 생각이 못돼 먹어서 오지랖을 부리는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나쁜 모습을 들키기 싫어 치사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섭거든요. 관계에 욕심을 가지는 순간 나는 분명 상대방을 상처 입힐 겁니다. 그리고 내가 나쁨을 다시 확인하게 되겠죠.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하지만 나의 본성인 나쁨은 흐르기 쉽지 않고 변하기 쉽지 않기에 무섭습니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욕심을 누릅니다. 이 가엾은 방어기제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상처 입혀야 없어질까요. 내가 쫄보라는 건 인정하기 쉬운 사실입니다만, 내가 상처 준다는 건 인정하기 싫은 사실입니다. 



가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나의 말은 전부 치사함입니다. 



감정에 굉장히 무딘 사람입니다. 감정이 무뎌지는 만큼 생각이 짙어져서인지 인생에 귀한 경험이 없습니다. 아.. 이제야 사람들이 왜 제게 로봇이라고 말하는지 이해 갑니다. 이상한 기분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상처 주지 말고 상처받지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던 것이 무언가 귀한 경험을 할 기회를 놓쳐버렸나 봅니다. 지금의 저는 감정의 문을 열기에 너무 늦지 않나 싶습니다. 잠가놓은 문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 안에 담아놓은 검은 것도 저는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어두운 면도 밝은 면도 없습니다. 



윤과의 편지를 써가면서 왜 중간중간 생각을 멈추고 싶은 현상이 일어나는지 의문이었는데요. 원래의 저는 감정이 멈춰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사람보단 것에 가깝습니다. 좋아요. 그동안 미뤄왔던 걸 인정하겠습니다. 아, 그래서 어쩌면 감정이 풍부한 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배우고 싶었겠죠. 양철 로봇이 도로시에게 심장을 배웠듯이요.


 

이 깨달음도 곧 있을 강의와 일에 치이고 나면 잊어버릴지 모릅니다. 감정을 크게 동요시키기는커녕 머리가 아예 멈췄거든요. 기계는 이만 일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맞다. 고민해보았는데요. 계산해서 반사하는 것도 투영해서 반사하는 것도 아닌 그저 비출 뿐입니다. 기계가 아니라 사물이네요. 도를 닦아 경지에 오른 거울이 되고 싶기도 하군요. 저는. 그렇다면 거울은. 이만 일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사람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 그 사람에 대한 감정선이 유지됩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싫어하면 싫어하는 대로. 더 커지거나 더 작아지는 일 없이요. 다시금 그 사람을 만나면 머리가 정보를 재정리합니다. 아, 나 이 사람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구나. 아, 나 이 사람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구나. 그럼 그게 또 다음에 만날 때까지 유지되다가 만나면 또 정리합니다. 이건 모두 일대일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다수는 아까도 말했듯 집중력이 저하됩니다. 신기하게도 땅땅땅하고 완성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모두 조금씩은 변했죠. 정리를 여러 번 해도 크게 정보가 변동 없는 사람과는 꾸준히 관계를 유지합니다. 아주 가끔 만나도 어제 본 것 같다는 말을 듣는 이유이지요. 그게 좋은 감정이든 싫은 감정이든 상관없이 정보가 변동 없다면 관계는 유지됩니다.



하지만 유독 정보 정리가 힘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서 오는 정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서 만나고 와도 한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파악하고 질문하기 위해 다시 만나자고 괴롭히게 됩니다. 부담스럽게 여기는 건 아닐지 걱정을 하지만 내 머릿속 정리가 급한 이기적인 인간이지요. 다시 한번 성질이 느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윤은 그 간격이 큰 사람입니다.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몇 번 만난 적은 없어서일까요. 편지로 만나 정보를 정리하는 일이 어색해서일까요. 아, 나 이 사람 좋아하는구나 아, 나 이 사람 싫어하는구나의 간격이 큽니다. 괜찮다면 밤의 산책을 가시지요. 간격이 큰 사람을 만나는 건 그리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에 흥미로우면서도 간격을 줄이고 싶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동시에 합니다. 



편지라는 물성은 참 신기합니다. 대화할 때 보통 눈을 보잖아요? 그런데 눈 마주함 없이 쓰는 대화는 기분이 묘합니다. 내가 허상의 나를 보고 있기도 하고 윤을 보고 있기도 하죠. 편지로 만든 책이라는 물성은 더욱 신기합니다. 나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윤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윤을 넘어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생각과 감정이 남아 있는 과거의 것이기도 하면서 봉투를 열어 발견될 미래의 것이기도 하죠. 



간직하고 있다는 노트가 있다는 걸 듣고 부러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궁금해졌죠. 기회가 된다면 다음 편지에 조금 더 들려주었으면 합니다. 



욕심을 가진 사람을 좋게 봅니다. 욕심을 갖는다는 건 의지를 갖는 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산말로 비슷하게 '애살'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욕심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고 부정적인 부분이 있듯이 애살도 그렇게 쓰입니다. "니는 왜 이렇게 애살이 없노?" "니는 왜 이렇게 애살스럽노?" 처럼 말이죠. 보통은 의욕을 가지라는 뜻으로 좀 더 쓰입니다. 애살 좀 가지라고요. 무엇을 하는 데에 욕심도 좋고 가지려는 욕심도 좋고 그게 도덕적으로 나쁘지 않다면 저는 역시 애살 있는 쪽을 좋아합니다. 살아있어 보여요.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을 보고 살아있어 보인다니. 조금 웃기네요. 그래서 의도가 무엇이 되었든 윤의 표현하고자 하는 애살은 기분이 좋습니다. 그것이 어두움이든 몽환이든 괴이함이든 잔인하든 철학적이든. 그러니 어려워하지 말고 더 표현해주었으면 합니다. 



어렸을 적 외동딸인 저는 통금시간이 따로 없었습니다. 자유시간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죠. 일어나면 학교에 가고 학교가 끝나면 학원엘 가거나 바로 집에 갔습니다. 언제나 통제하에 있는 게 여간 귀찮았지만 친구들과의 군것질 로망이 없었던 터라 달리 할 것도 없었습니다. 몰래 아빠의 서재에서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는 게 하루의 재미였습니다. 숙제 노트 아래에 펼쳐놓고 엄마의 감시가 닿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봤죠. 아빠의 취향은 저와 달리 편협하지 않아 시사, 경제, 과학, 동화, 수학, 문학, 경영, 고전 등 다양한 서적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몰라도 교과서보단 무조건 재밌었죠. 기억에 남는 건 '아네모네의 마담'이라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유명한 주요섭 작가의 책을 읽다가 엄마에게 들켜 아빠가 혼났던 일입니다. 이야기의 소재는 어린아이가 이해하기 힘든 사랑, 그것도 기성 윤리가 허락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표현 또한 그때 당시의 책으론 외설적이라 볼 수 있었죠. 엄마는 작은 아이의 키에 닿게 그 책을 둔 아빠를 혼냈고 아빠는 그저 문학일 뿐이라며 작게 반론했죠. 키가 안 작았던 저도 이 책은 재밌었다며 나름 힘을 보탰습니다. 그때부터 아빠와의 모종의 거래가 시작됩니다. 물리 선생님이었던 아빠는 집에서 저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걸 시간 외 근무처럼 끔찍이 귀찮아했는데, 저에게 수학을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자유로이 서재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수학 공부를 핑계로 아빠는 아빠가 읽고 싶은 책을, 저는 제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었습니다. 엎드려서 누워서 앉아서 기대서 읽는 책이 재밌었습니다. 나이 제한이 있는 책은 아빠에게 물어봤지만 상관없이 읽고 싶은 걸 읽으라고 했습니다. 대신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알려주진 않아 혼자 열심히 찾아보고 이해해야 했죠. 그래서 모르는 걸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나 싶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 기억 대부분은 날아갔지만 아빠의 서재만큼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어렸을 적 얘길 하니 철없었던 교복 시절이 떠오르네요. 흔들리는 버스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어 손잡이를 잡지 않고 두 발로만 중심을 잡으려 했던 바보 시절이 있었습니다. 부산의 길은 아주 험했고 버스 기사님은 모두 질주 본능을 가지고 계셨죠. 해방촌의 언덕길처럼 가파르고 시골길의 비포장도로만큼이나 울퉁불퉁한 길을 질주하는데도 제 손은 허공에 있었습니다. 과거의 나 자신은 왜 그랬을까요. 아주 부끄럽네요. 다행히 크면서 버스보다 머릿속 생각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아 손잡이는 잘 잡게 되었습니다. 버스는 손잡이가 있는데 생각은 손잡이가 없다는 게 아쉽네요. 그나저나 윤의 어릴 적은 어떤 기억이 남아있나요? 



인생의 즐거움은 틈에서 생긴다는 한 드라마 대사를 봤습니다. 길을 걷다 잠깐 샛길로 새어 평소와 다른 풍경을 보거나 식비를 아끼고 아끼다가 하루 비싼 하겐다즈를 먹거나 하는 일 등이죠. 곧 여름입니다. 거리두기가 완화되어 여러 페스티벌이 열릴 준비를 하고 있죠. 잔디 잔뜩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며 뛰고 있는 모습도 다들 틈 속에서 뛰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일상 루틴의 큰 변화를 반기지 않는 저도 페스티벌만큼의 큰 틈은 아니지만 적당한 틈을 만들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모빌을 샀습니다. 한 번도 관심 가져보지 않았던 거였죠. 나무로 된 모빌이라 햇빛이 필요 없다는 게 이상하게 위안되었습니다. 침대 위에 걸어두었습니다. 이불 위에 모빌의 틈이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하네요. 느껴보지 못한 이상함은 즐거움입니다. 누워서 위를 보니 동그란 것이 엮여있을 뿐. 어딘가에 매달려 있을 뿐. 저에게 딱 맞는 ‘뿐틈’입니다. 윤이 이불을 어디까지 덮고 자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불을 걷으면 보이는 곳에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 동봉합니다. 이건 작은 나무로 된 틈입니다. 이 동그랗고 작은 것이 틈만한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가끔 이불속으로도 도망가기 힘들다면 바깥에 틈이 있다고 생각해주세요.


 

덕분에 잊고 있었던 취향이 하나씩 생각나는 중입니다. 여러 가지로 잊고 살았던 일본 드라마를 몰아서 보기도 했습니다. 집밥 요리를 소재로 한 잔잔한 드라마였죠. '어제 뭐 먹었어?'라는 드라마입니다. 변호사 일을 하고 매일 6시에 칼퇴근해서 장을 보고 요리하는 평범한 45살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한 회당 하나 이상의 집밥 레시피가 나옵니다. 그 음식이 너무 맛있어 보여 화면을 멈춰놓고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했죠. 지금이야 변변찮은 부엌이지만 자취생활 초반엔 요리를 곧잘 했습니다. 기름을 좋아해서 대부분이 볶은 요리였지만요. 소스나 양념류 만드는 걸 즐겼습니다. 뿌려 먹어도 맛있고 끓여 먹어도 맛있는 고추장 베이스 양념을 만들겠다고 나서거나 절대 취향의 파스타 크림소스를 만들겠다며 엄청 꾸덕한 놈을 만든 적도 있어요(다행히 저와 살았던 모든 룸메가 다 맛있게 먹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음.. 쨈이나 청, 음료나 디저트류를 만드는 것도 즐겼어요. 제가 만든 와인베리쨈은 정말 맛있다고요? 메인이 고기든 생선이든 야채든 상관없이 소스 홀릭이었네요. 슴슴한 맛을 좋아하면서 소스를 그렇게 열심히 만들다니. 만드는 생각을 하니 와인베리쨈이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이런 즐거움이 생각 난 건 이불 위에 틈을 두었기 때문일까요. 그동안 틈 없이 살았기 때문일까요. 아, 편지를 쓰는 틈을 만들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몰랐는데 이미 저에겐 틈이 있었군요. 항상 이렇게 두세 박자 늦게 세상을 깨닫곤 합니다. 베리를 사러 가야겠어요.



누군가에게 선물 주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생일 선물로 그 사람이 아닌 자기가 갖고 싶은 걸 준다던 윤이 생각났습니다(저도 비슷하거든요). 생일 외에도 우린 살면서 작고 큰 선물을 주고받죠. 저는 선물 주는 걸 좋아해서 오다 주웠다를 많이 시전 하는데요. 지나가다 누군가 떠오르면 사놓았다가 그 사람을 만날 때가 되면 준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오랜만에 생각나는 사람이면 부러 약속을 잡아 전해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평범한 선물로는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숙제입니다. 선물로 숙제를 주는 거요. 윤의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질 모습이 보이네요. 모든 사람은 자신을 표출하기 좋아한다는 생각을 꽤 옛날부터 하고 살았습니다.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표출은 조각이 되거나 모습이 되거나 이불킥이 되거나 예술이 됩니다. 숙제라는 명목하에 그 사람이 표출한 예술을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머리를 짜내 선물을 고안합니다. 정성스레 만들어 받는 사람이 거절하지 못하게끔 말이죠. 아주 치밀하죠? 윤에게 줬던 빈 병 그림이 가득한 스케치북도 일종입니다. 혹시 건네준 지가 오래되어 까먹고 있었다면 오랜만에 한 번 들춰주세요. 



부러움이 많습니다. 질투 또한 많죠. 이 우글우글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본 적은 없습니다. 내가 약해 보이기 싫은, 자존심만 더럽게 세기 때문이죠. 하지만 내면의 우글우글함이 내가 표출하지 않는다고 티 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계속 자만심과 허세로 따라다녔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적당한 자만심과 허세가 필요하다곤 하지만 내가 뿜어내는 건 현타가 오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모습이 나도 모르게 나오려고 하면 후다닥 도망쳤습니다. 부러우면 부럽다, 질투 나면 질투 난다, 솔직하면 됐을 것을 말이죠. 정말, 세상을 굳이 하드 모드로 살고 있네요. 부러움과 질투에 관해 조금 힌트가 되었던 건 윤의 시선입니다. 바에서 윤을 마주치면 윤의 시선은 모두에게 닿아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뭐랄까. 항상 전체를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요?(물론 초점이 또렷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시야가 좁아서 눈앞의 내 맥주잔에만 머무는 제 시선과는 달랐죠. 처음에는 그것이 대동물의 배려일까 소동물의 겁일까 생각해봤는데요. 그런 것을 따지기 전 윤의 시선을 질투하는 내가 있었습니다. 질투했기에 분석하고 있었던 거죠. 나중에 제멋대로의 분석으로 거들먹거리기 전에 내가 윤의 시선을 질투한다는 걸 알아서 다행입니다. 윤은 부러움과 질투의 차이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여러 견해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건 상대방이 되고 싶으면 부러움이고 상대방 걸 가지고 싶으면 질투입니다. 무언갈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부러움과 그 사람의 무언가를 갖고 싶은 질투죠. 그래서 윤의 시선이 어떤 힌트가 되었냐고요? 방금 썼던 부러움과 질투의 차이점을 정의 내리는 힌트가 되었습니다. 맞아요. 저 정의는 나에게 윤의 시선이 부러움일까 질투일까 고민의 끝에 나온 결론입니다. 윤의 ‘배려’를 갖고 싶거든요. 



부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페르소나에 숨어서도 자신을 인지하려고 하는 부분 말입니다. 극적인 양면을 모두 지녔다고 하는 부분 말입니다. 자신이 그러기로 한다면 감정선의 방어기제를 풀 수 있다는 부분 말입니다. 그게 설령 윤은 싫어하는 부분이라 하더라도요. 



병원은 잘 다녀왔나요? 우호적인 선생님을 만났다는 거에 조금 안심이 됩니다. 하지만 물어보는 것이 민폐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습니다. 윤이 정신의학과에 가든 응급실에 가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력감에 또 한 번 조심스럽습니다. 괜찮다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대 초반의 반항심, 우울, 오만함을 가졌던 윤에 관해서요. 이야기를 끝낸 하루의 끝에는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라는 것은 옳지 않아도 되고 잘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의 진동하고 잃어가고 애원하고 공허하고 뒤틀린 편지를 제가 잘 답장했는지 고민입니다. 호전이 되었으면 하기도 하고 잃지 않았으면 하기도 합니다. 태양은 항상 위에 있으니까요. 오늘도 고생했습니다. 윤이 잘 잤으면 좋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