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편지
상대의 말에 담겨있는 소리와 단어는 긍정과 부정이 계산되어 머리에 들어옵니다. 그래선지 상대의 기분을 쉽게 알아채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거울처럼 상대의 분위기를 반사하는 버릇이 있어 주변의 영향을 곧게 비춥니다. 어딘지 들뜸이 느껴지는 사람과 만나면 아주 들떠집니다. 평소와 다름이 없는데 어딘가 쓸쓸하다는 마음의 소리가 계산되어 제 머리에 들어오면 저는 곧 쓸쓸함을 표출합니다. 그래서 위로가 어렵습니다. 제대로 공감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저 반사만 할 줄 아는 거울은 상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상대가 울면 저도 웁니다. 화를 내면 저도 화를 내고요. 다행이라면 조그만 희망을 내뱉으면 그걸 반사해서 제안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안아줄 수 있다는 것도요.
사람을 많이 만난 날이면 집에 혼자 멍때리거나 카페에 앉아 무언갈 적고 있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거울에서 자신으로 돌아오는 시간이죠. 요즘 주변에서 화두가 되는 이야기는 혼자만의 시간입니다. 인지하기 전까진 몰랐는데 저를 포함한 대부분이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아주 외향적이고 아주 인싸인 사람을 포함해서요. 오래전 같이 일했던 언니가 "너는 토끼띠라서가 아니라 진짜 토끼 같아. 토끼는 외로움을 많이 타니 사람과 항상 같이 있으렴." 했던 적이 있습니다. 모든 말을 새겨들었던 어린 저는, 언니가 스쳐 말했다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매시간 사람과 함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집 밖에서도 사람. 집안에서도 사람. 항시 항상 핸드폰에 알람이 꺼질 일이 없었죠. 왜 그랬을까요? 사람과 함께할수록 정신이 없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주변의 분위기를 반사하는 거울이 될수록 진짜의 나를 잃어가는 기분이었죠. 이런 나약한 기분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어요. 점차 사람을 멀리했고 개인주의 성향을 찾아갔습니다.
얼마 전 지인의 카페에 놀러 갔습니다. 커피를 마시기 전 옥상부터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늘공원에는 토끼 두 마리가 햇살을 받으며 반쯤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쩜 그리 무해하고 귀여웠던지요. 카메라를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 한 마리가 잠에서 깨어 새로이 보는 사람이 반가웠는지 쪼르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등을 내주었죠. 역사상 동물이 저를 싫어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토끼의 등을 포근히 쓰다듬었습니다. 마치 솜사탕을 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주 가볍고 아주 포슬 했죠. 토끼는 이제 되었다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조금만.. 더 쓰다듬고 싶었는데 그 이후 곁을 내주지 않았죠. 실제 토끼는 외로움을 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자 잘 뛰어다니고 혼자 건초도 잘 먹었어요. 가끔 둘이 뛰어다녔고요.
혼자만의 시간도 제각기 보낸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누군가는 바깥으로 나와 카페에서 조용히 보내는 사람이 있고. 산책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집안에서 격정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이 있고. 이불 밖은 위험한 사람도 있고. 저의 경우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보다 카페에 앉아 노트에 메모하며 보내는 게 온전히 혼자인 시간에 가깝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아 혼자 있지 않아서 그게 혼자만의 시간이라 깨닫지 못했나 봅니다. 언젠가 도전해 보고픈 건 혼자 하는 산책입니다. 밤 산책을 좋아하는데 아직은 쫄보라 밤에 혼자 어슬렁거리는 건 좀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 적당한 어둠과 적당한 빛이 좋으니 언젠가 이른 밤에 도전해보려 합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양도 사람마다 달랐어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 잠깐 정도만 필요한 사람이 있고 길게 필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재밌는 건 잠깐 혼자가 필요한 사람은 잠깐 함께가 필요했고 무한대 혼자가 필요한 사람은 사실은 무한대 함께가 필요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모두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했죠. 윤은 아무의 시선이 닿지 않는 시간이 얼마가 필요한 사람인가요?
갑자기 든 의문인데요. 편지를 쓰는 시간은 온전히 저의 시간일까요? 머릿속의 윤을 앞에 두고 쓰는 것이니 윤과 함께하는 시간일까요?
"저는 다른 사람에게 별로 관심 없어요."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익숙했습니다. 많이 들었거든요. 나 한 몸 건사하기 바쁜 세상에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어렵겠죠. 그런데 많이들 저 말을 한다는 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말이 되고 결국 내가 무얼 하든 타인의 관심이 크게 닿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죠. 그러면 왜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며 사는 걸까요. 나도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타인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왜 다들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무서워하는 걸까요?
저 말의 절반은 거짓말인 걸까요? 정말은 타인에게 관심이 많고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걸까요?
혹시 색연필 한 자루를 선물 받을 수 있나요? 윤이 고른 색상이 궁금해졌습니다. 책을 안 깨끗하게 읽습니다. 접기도 하고 커피를 흘리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죠. 인덱스 테이프를 붙이려는 습관을 들여볼까 하다가 문득 밑줄이 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색연필을 하나 사려 했는데 색상을 못 고르겠더라고요. 선택지가 너무 많았어요. 그렇다고 무지개색 색연필은 너무 화려해서 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선택의 어려움을 윤에게 미뤄보려고 합니다. 다음 편지에는 색연필을 동봉해주세요. 윤이 가지고 싶은 이불과 비슷한 색이면 좋겠어요.
고백하자면 저는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저 호기심 가는 무언가가 많을 뿐이죠. 그래서 좋아하는 것에 진심이라는 사람을 보면 멋지고 부럽습니다. 카페에 앉아 노트를 끄적일 땐 내가 좋아하고 싶은 것을 써봅니다. 고양이, 카페, 책, 여유로운 시간, 빛, 따사로운 감정, 포옹 등을 말이죠. 하지만 이 무엇에게도 진심이 아니기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질문합니다. “뭐 좋아해요?”라고 말이죠. 분야를 막론하고 상대방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자신이 좋아하는 걸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죠. 기분이 좋아지고 싶어 물어봅니다. 윤은 무엇을 좋아하나요?
저는 좁은 공간에 가만히 있길 즐깁니다. 폐쇄와는 조금 다르지만 텅 빈 공간에 있는 걸 싫어합니다. 꼬옥 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기에 항상 좁은 구석이나 좁은 공간을 찾아다닙니다. 소극장 연극을 찾는 것도 작은 바를 찾는 것도 그 이유인가 봅니다. 윤을 흉내 내 이불속에 꼬옥 껴 있어 보았습니다. 들리지 않을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청소기를 약하게 틀어놓은 것과 비슷한 소리 말입니다. 안정감이 필요하다는 걸 보면 저도 온전한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핸드폰은 항상 방해금지 모드입니다. 음악을 들을 때 전화가 오면 잠시 끊기는 완전한 금지 모드는 아니지만, 업무적인 연락을 아예 놓을 수 없기에 비행기 모드 대신에 선택한 대안입니다. 그런데 최근 방해금지 모드를 풀었습니다. 풀었었습니다. 잠시 모든 세상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나를 좁은 곳에 끼워 넣었습니다.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안정감에 대한 욕구는 모두가 가지고 있는 걸까요?
이런저런 궁금증이 폭발하는 날이면 모든 걸 놓고 잠을 청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리셋되는 편한 뇌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오늘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날이 있습니다. 그날은 윤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고 저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죠. 오늘을 보내면 내일을 인정해야 하기에 오늘을 보내기 싫었습니다. 내일을 인정하는 건 어려운 숙제입니다. 어렵고 해결해야 하고 언젠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죠. 그게 제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니까요.
미리 준비했던 답장이 떨어졌고 저는 아주 많이 취했습니다. 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