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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Apr 07. 2022

밤 벚꽃을 품고 있는 봄은 어떤 모양일까요?

두 번째 편지

요즘 잠은 잘 자요? 저는 종종 걱정되는 사람에게 잠을 묻습니다. 잠은 잘 자는지, 잠은 푹 자는지. 잠은 사람의 에너지를 충전해준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제 몸은 움직임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지라 잠도 많이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워 찡찡댔죠.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많고 하고픈 일도 많은데 잠으로 쓰이는 시간이 아쉬웠습니다. 새벽이면 몸과 머리가 싸웁니다. 항상의 승자는 마음이죠. 일을 더 하고픈 마음과 에너지를 충전하고픈 마음이 싸웁니다. 가끔 감성적인 새벽 마음이 폭발할 때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일하곤 하죠. 주변에서 왜 그리 아등바등 사냐고 물었을 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등바등은 무엇에라도 파묻혀 있어야 할 수 있는 건데 저는 그만큼을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아등바등하고 싶어 잠과 싸우나 봅니다.



최근에 ‘이방인’이라는 키워드를 들을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최근 읽었던 책에서도 있었죠. 이방인은 막연히 다른 곳에서 온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마다의 이방인은 ‘마음 붙일 수 없는 외로움’이라는 걸 알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오랜 친구의 전화에선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확인을 계속 받고 싶다고 했고 마주쳤던 사람과의 대화에선 외롭지만 누군가가 주는 사랑을 쉽게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책 속에서는 도망치고 떠났죠. 그들은 모두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윤이 자신을 지칭하는 이방인도 불온전함에서 오는 외로움일까요?    


 

이방인의 속뜻을 몰랐을부터도 저는 부지런히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긍정을 나눠주고 싶었기 때문이죠. 조금 떼어준 긍정은 닿아 재가 되고 조금 나눠준 긍정은 삼켜져 배설물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렇게 삐뚤어진 저는, 그들이 불온전함을 채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한 적도 있습니다. 조금 낡고 우아한 몽환적인 음악이 온전하지 않아서 아름답듯 그들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서일 거라고요.


     

지금도 여전히 정답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세심하지 못한 방법으로 손을 내밀고 있고 다치고 있고 읽고 말하고 씁니다.     



만나보고 얘기해보아 알겠지만, 낯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장 난 리액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말 걸기도 잘하고 먼저 질문도 많이 하는데 리액션이 고장이라니. 이상하죠?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 이상 말을 걸 필요성을 못 느껴서 스몰토크에 정말 취약합니다. 누군가가 “요즘 벚꽃이 너무 예쁘죠?”라고 한다면 “오, 맞아요.”로 끝나버립니다. 또한 내 질문에 관한 상대의 대답에서 더 이상의 궁금증이 없다면 대화는 “어, 음, 좋아요.”로 끝나버립니다. 도대체 리액션은 어떻게 하는 걸까요.. 도대체 대화는 어떻게 스무스하게 이어 나가야 하는 걸까요.. 저와의 대화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서 윤이 말하는 ‘흐름을 유연히 만들어내는 능력’이 부럽습니다. 그것이 가치 없는 살아남기라고 하더라도요.     



자존감이 높아서 좋겠다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닌데. 나 쫄본데.” 대답했지만 당당하게 쫄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자존감이 높아서 할 수 있는 행동이라며 오히려 나를 혼냈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걱정하지 않는 정도에 따라 자존감의 높낮음이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걱정을 많이 할수록 자존감이 낮은 거라고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자존감이 너무너무 높은 대신에 배려라곤 너무너무 없는 사람이 아닐까. 내 멋대로 손 내밀고 내 멋대로 질문하고 내 멋대로 대화를 끝내버리는 사람이 저였습니다. 다치고 살아남으면서 타인의 시선을 조금은 걱정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윤에게 배울 점이라고 생각했고요.     



사람은 저마다의 어른의 경계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넘었다고 해서 계속 넘어있는 상태일 필요는 없고 넘지 않았다고 해서 계속 넘지 않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의 경계선은 정말 실로 된 끈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의 경계선은 벽돌로 튼튼한 벽일 수도 있겠죠. 경계선의 모양이 다른 만큼 각자 어른의 모양도 다를 겁니다. 타인이 보는 어른에 맞추어 혹은 타인이 생각하는 어른의 기준에 맞추어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윤이 하는 무한대의 고민은 나와 타인의 경계선의 합의를 찾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불온전함과 불안정함의 방어기제를 바탕으로요. 저의 경계선은 ‘적당히’라는 단어로 된 선이었습니다(아직 경계선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요). 적당히가 통용되는 시간의 저는 어른이고 허용되지 않아 욕심부리는 시간의 저는 어른이 아닙니다. 책임감이나 성숙함이 주는 무게감 있는 모습이 사회적으로 비치는 어른이라면 저의 어른은 적당히 책임감 있고 적당히 성숙한 모양이겠네요. 책임지려고 욕심부리고 성숙하려고 욕심부린다면 아니겠고요. 이처럼 윤이 경계선에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는 말은 자신만의 어른 모양을 찾는 것으로 보였다는 말입니다. 어렵고 번지르르하게 썼지만 저 역시 나중에는 모양이 바뀌겠지요.     



제가 윤에게 타인에 대한 배려를 들었듯 윤도 나에게 무언가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밤 벚꽃을 보며 잠시 설렜던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진을 갤러리에 남기고 가끔 꺼내어보는 오랜 설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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