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이아 May 08. 2022

오늘은 어떤 꿈을 꾸었나요?

다섯 번째 편지

아침에 가까운 늦은 밤입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잠이 오지 않아 이 시간에 편지를 씁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말입니다. 생각과 말을 글이나 기타예술로 표현한다고 해서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현이든 표출이든요. 얼굴만 알던 분의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뵌 지 너무 오래되어 얼굴이 가물했지만 몇 번 마주했던 분이라 충격이 상당했습니다. 혹시나 무언가 남아있을까 싶어 들어가 본 그분이 운영했던 페이지에는 힘든 글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 글이 그의 마음을 해소할 수 없었음에 내가 그분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정말 불행했던 건 내가 제대로 슬퍼할 틈도 없이 다음날의 일정을 준비해야 했다는 겁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정이라고 말입니다. 그분을 보고 싶다는 댓글들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밖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고인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말했지만 글로 쓰니 정말로 아립니다.      



예술로 표출한다 혹은 승화한다. 라는 말이 싫어진 건 아니지만 제대로 표출하고 승화하기엔 아직 예술이라는 장르는 많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이어지는 제 역할에 대한 고민이 듭니다. 누군가의 표출을 제가 다듬는 게 과연 맞는 걸까요? 표출로도 부족한 그 마음을 제가 제 입맛대로 다듬어 버리는 게 아닐까 고민이 듭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많이 아려서 이렇게 고민하는 것밖에는 할 줄 모릅니다. 섬세하지 못한 손을 내밀었을 때, 윤은 다른 이의 말을 빌려 '그러기로 선택한 것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말을 해주었죠. 그때도 저는 답변을 망설였습니다만 아직도 망설여집니다. 분명 저것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하지만 무언가 개운치 않습니다. 아직은 아집을 놓을 수 없나 봅니다. 충분히 아플 여유가 있고 충분히 아릴 여유가 생긴다면 개운해지겠죠. 그때의 저는 주변인이나 이방인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발만 걸쳐놓은 관계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 시작이 이런 슬픈 이야기여서 미안합니다. 마음을 정리하고 내일 다시 이어서 써야겠습니다.     



표현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감정이 잠겨있다는 말을 듣고 해보기로 했습니다. 지금 드는 기분을 그대로 입 밖에 내보기로 한 거죠. 0.1초의 행복이라도 행복하다 표현하고 맛있는 순간을 맛있다 표현하고 막막한 순간을 어렵다고 표현하고 한숨이 나오는 순간을 짜증 난다고 표현하기로요. 희로애락을 떠오르는 순간 표현해보기로 했습니다. 일종의 감정 일깨우기 연습인 느낌이네요.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건 아주 신기한 일입니다. 순간이 표현으로 명확해집니다. 그리고 나도 명확해지는 느낌을 받죠. 저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사람이라고 얘기해왔는데요. 이제 순간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순간의 연습이 쌓여 현재를 고찰할 수 있게 되고 나중을 기억하게 되겠죠.     



오늘은 오랜만에 아무 스케줄 없는 하루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늦잠을 잘 줄 알았지만 습관은 무섭네요. 아무런 계획 없이 일어난 아침은 여유롭기는커녕 이 시간에 뭘 해야 하지. 일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자연스레 공덕에 가야 했던 카페와 해방촌에 가야 했던 카페를 떠올렸죠. 공덕의 카페는 갤러리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책방에 들러주었던 손님의 작품 전시회가 있었죠. 5월 5일까지 한다고 했으니 오늘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해방촌의 카페는 제 오랜 단골이었던 카페의 사장님이 야심 차게 준비한 2호점 카페입니다. 다행히 동선이 이어져 있어 큰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겠습니다. 윤은 곧 일하고 있겠네요. 윤도 저도 무리 없는 하루를 보냈으면 합니다.     



왜 가만히 하루를 보낼 수 없나. 나의 급한 성미 때문인가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예전부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강해서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그저 손을 뜯는 일밖엔 할 수 없는 자신이 조금 답답합니다. 거기에 혼자만의 고찰보단 무언가의 접점에서 깨닫는 것이 많다 보니 무작정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처음 가는 가게의 사장님과도 쉽게 친해지는 이유죠. 바 테이블이 있는 곳을 좋아하는데 대화를 나누기 쉽기 때문입니다. 어딜 가든 먼저 질문을 붙여봅니다. 어떤 사람이든 다 그만의 스토리가 있기에 대화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질문을 한다면 모두들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가끔 그렇게 관계 속에 즐겁다가 집에 가면 외롭지 않냐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이 겪었던 관계의 허탈함이나 외로움을 말하는 것이겠죠. 저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시간이 아까워 할 일을 만드는 답답한 사람이라 그렇진 않지만 저게 어떤 느낌인지 머리로는 압니다. 분명 치사하게 한 발만 담가놓은 저와 달리 관계에 본심을 다 한 사람이겠지요. 진심으로 관계에 공감하고 마음을 주었기에 집에 돌아와 혼자인 자신이 외로워지는 것이겠죠. 저들이 그 외로움과 허탈함을 사무치게 느낀다면 애초에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거나 관계에 집착해버리게 될 겁니다. 그렇게 삐뚤어지는 경우를 아직 못 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제가 안 보았을 수도 있겠죠. 혼자가 외로울 때 가끔 전화하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밤새 펑펑 울기도 했고 어떤 이는 취해서 기억도 못 했습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외로움을 채웠다면, 그래서 아직 허탈해지지 않았다면 그걸로 다행입니다.     



사람은 기대라는 걸 합니다. 그리고 실망이라는 것도 하죠. 실망은 기대가 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원인에 따른 결과 일 겁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실망하는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우리는 매번의 실망을 반복하면서도 또 한 번 기대합니다. 저 사람은 다를 거야. 저 사람은 괜찮을 거야. 하면서요. 같은 대상에게 반복하는 경우도 있죠. 이번엔 다를 거야. 이번엔 괜찮을 거야. 하면서요. 하지만 결과는 또 한 번의 실망입니다. 상대가 아닌 기대했던 자신에게요. 그리고 후회합니다. 다음번엔 절대 기대하지 않을 거야. 인간의 뇌는 대상을 보면 기대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있는 걸까요? 이 사람에게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다른 사람은 혹은 시간이 지나면 다를 거로 생각하는 시스템 말입니다. 결국, 너도 나도 윤도 결국, 같은 사람인데 말이죠. 결국은 우리는 사람이기에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일까요.      



최근 사람에 관해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나쁜 말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관계에서 억눌러 왔던 욕심이 타당한 것인지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관계에 욕심이 생기면 상처를 준다는 나의 본성은 결국 타인과 나의 거리감이 필요함의 무의식적인 표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무리에서 한 발짝 빗겨 서지 않아도 언제나 온전히 혼자였음을 알아챘습니다. 타인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나를 이해받길 바라는 순전히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관계에 관한 여러 문제가 한 번에 터졌습니다. 저의 고민도 한 번에 터졌죠. 사적인 관계에서는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문제, 공적인 관계에서는 애먼 데 찡찡거린 문제, 애매한 관계에서는 부러 얘기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죠. 모든 관계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희망하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하고 다시 절망하는 걸까요? 이럴 거면 또 한 번 아무하고도 깊은 관계는 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만 짙어지다가 결국 고민에 휩싸이는 겁니다. 예전이라면 에잇! 안 해! 하고 도망쳤겠지만 항상 도망 시마다 찝찝했던 무언가를 이번엔 털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도망가도 다시 희망하고 다시 절망하는 그 찝찝함이요. 나의 문제점도 제대로 알고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무엇이 잘못인지 왜 애먼 데 찡찡거리는지 왜 부러 얘기하지 않는지. 세상을 한 박자 늦게 깨닫다 보니 항상 속죄의 골든타임을 놓치거든요. 나의 문제점을 고친다면 조금 더 빨리 깨닫고 속죄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찝찝함이 남았던 건 나의 배려가 충분치 않았다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일단 나를 오래 안 사람부터 시작했습니다. 배려를 알려줄 수 있냐 물었습니다. 질문이 추상적이라 오는 대답이 추상적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다들 알뜰살뜰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물었고 가서 맨날 조용히 책만 읽고 오던, 나눠본 얘기라곤 커피 주문이 전부인 카페 사장님께도 여쭤봤습니다. 정리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1. 배려 말고 매너를 가져라

2. 표적과 사냥터를 잘 골라라

3. 살아서 속죄해라     



배려를 배워갈수록 말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모든 사안에 관해서 오히려 말하기 꺼려지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게 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내재해 있던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욕구가 들끓었나 봅니다. 억제당하자 답답해졌습니다. 이렇게 억누르다간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겠다. 그럼 더 큰 일이 생기겠다. 그래서 그냥 말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생각이 짧다면 사과하고 배워 가면 될 것이고 내가 생각이 길다면 휘감고 줄여나가면 된다고. 누군가에겐 무례하고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겠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려봤자 나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한 걸 표현해야겠습니다. 혹시 나의 말 중에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그래야 나는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속죄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큰일 나거든요.     



단 며칠만의 결정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강의를 찾아봤을 때의 결론으로 나의 나쁨을 인정해보기로 했습니다. 어설픈 배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 거죠. 윤의 배려는 여전히 질투가 나지만 내가 어차피 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내 것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도 이런 부분이 있나요? 어차피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되는 부분이요.      



배려를 제대로 익히진 못했지만 인정이라는 테마를 얻었습니다. 모든 관계는 각자를 한 개체로 인정하면서부터 제대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누군가가 나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그건 별로 좋지 못한 생각이었던 거죠. 그로 인해 생겨났던 나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겠다는 강박, 무언갈 하나라도 더 해주려는 오지랖,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허세 섞인 시선, 사람을 파악하겠다는 욕망 등 많은 좋지 못한 모습이 생겨났던 겁니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오만함에서 시작된 거죠. 나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대는 사람도 아니죠. 하지만 기대어도 되고 기댈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각자 그런 사람이란 걸 인정하는 게 각자가 한 개체라고 인정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우리 그런 얘기 나눴었잖아요. 어떤 사람을 대하느냐에 따라 내 모습이 바뀐다고. 그건 무의식적인 욕망의 결정체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요. 당장 그 욕망을 내려놓을 순 없겠지만 욕망을 인정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누군가를 만나면 어버버해지고 멍청해지겠지만 그러면서도 아, 이건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구나. 라고 무의식을 인정해보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나쁜 사람으로 보일 필욘 없잖아요? 관계를 이어 나가면서 저도 상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고 상대도 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면 우리는 각자의 한 개체로써 존중되겠죠.     



그래서 말인데요. 그들은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거 아닐까요?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사는 게 아닌 하고 싶지만 못한다고 인정하는 거죠. 인정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는 게 현실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비웃겠지만, 누군가는 포기하고 현실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게 순리라고 하겠지만. 그냥 그들은 인정했을 뿐입니다. 현실과 한계를 자기 그릇에 담았음을요. 자신과 다른 인정을 한 사람을 지탄할 자격은 없고 지탄받은 사람이 괴로워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윤도 그들을 하나씩의 개체로 인정해보면 어떨까요? 그들의 그릇과 윤의 그릇은 모양이 다르다고요.     



예전에 누군가가 이상적인 관계에 관해 물어봤었는데 '솔직해도 편할 수 있는'이라고 답했습니다. 당연하게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사니까요. 그것이 타인의 시선을 위해서든 나의 가림막을 위해서든. 윤은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한가요? 제가 한 대답은 자신과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저는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이방인이었습니다. 제 가면은 얇아 보였겠지만 아주 두꺼웠죠.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알아야 타인에게 비추는 가면을 잘 만들 수 있다는 심리학책을 봤습니다. 윤은 여러 페르소나에 잡아먹혔다고 표현했지만 나보다 더 많이 자신과 마주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지 않았나도 싶어요. 그럼 우리 조금만 가면을 다듬어봅시다. 조금 더 알고 조금 잘 만들어봅시다.     



새삼스럽지만 요즘 뇌 과학 관련 강의에 빠져 있습니다. 아주 옛날 강의부터 최근의 강의까지 유튜브로 틈날 때마다 보는데 볼 때마다 신기해서 헤어 나올 수 없더라고요.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설득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듣는 사람, 그러니까 상대가 말을 지속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윤은 그저 ‘듣기만’ 한다고 했지만 나의 말이 길어지고 저의 편지가 점점 길어지는 것을 보면 윤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네요.     



뇌는 어떻게든 주체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합니다. 기분이 처지는 건 생존에 나쁜 정보이기 때문에 열심히 희석하느라(헤쳐 나갈 방법을 생각하고 고민하느라) 힘든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뇌가 인지부조화가 오면 희석에 지쳐 모든 걸 내려놓고 싶고 모든 것에서 쉬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게 번아웃이라고 하더군요. 어릴 때 꿈을 꾸었었는데요. 그곳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아닌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죽음은 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 내려놓고 자신도 내려놓았음을 꿈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 꿈을 꾸었을 때 저는 어렸고 그게 무슨 느낌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떨어질 때의 그 아이의 표정으로 ‘내려놓음’을 느꼈습니다. 모든 죽음을 단일화할 순 없지만 그냥 그것이 모든 걸 다 내려놓은 그에게 남은, 놓아야 할 유일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망설이는 순간이 있나요? 아침 10분 더 자기를 망설이는 것, 오후 비 소식에 우산을 가져갈지 망설이는 것, 전화기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를지 망설이는 것, 이 얘기를 해도 될지 망설이는 것.     



후회는 고등생물이 하는 것이고 그것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합니다. 다음에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뇌의 기능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죠.     



인생은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도 합니다. 그럼 그 선택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걸까요? 성향? 취향? 생각? 경험? 선택으로 인해 내가 안전한지의 판단?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인데. 우리는 왜 선택을 망설이고 책임을 회피하는 걸까요.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죠. 너무 고등생물이라 그런 걸까요?     



인간은 하루에 4개 정도의 꿈을 꾼다고 해요. 스토리가 뒤죽박죽이고 말도 안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꿈 말이죠. 머지 않은 미래에 꿈을 동영상으로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예시로 돼지꿈을 꾸고 복권을 사는 장면을 들었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이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지금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가 되면 꿈 영상인지 실제 영상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그때면 SNS에 꿈 영상을 올리게 될 텐데 비도덕적인 영상이 꿈이라고 처벌이 약해지지 않을까. 애초에 꿈은 꿈이라 신비스러운 건데 그때면 또 다른 신비스러운 뇌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 등 여러 생각이 앞다투어 들었습니다. 물론 뇌와 꿈의 연구는 끝이 없겠지만 꿈을 영상으로 남기는 연구뿐만 아닌 외부에서 꿈을 개입할 수 있다는 연구 등 '인간은 사실 모두 창의적인 존재다.'를 앞세운 꿈과 관련한 연구들은 아직 고리타분한 제가 받아들이긴 먼 존재입니다. 윤은 어떤가요? 만약 자신의 꿈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다면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나요?     



밤 산책을 함께 해주어 고맙습니다. 몇몇 이와 함께 산책해보았지만 정직하게 오래 걸은 산책은 처음이었습니다. 윤의 혼자서의 산책을 조금 엿본 느낌입니다. 노란 선을 따라 뛰었다던가, 강아지가 갑자기 다리를 물었다던가, 겨울엔 분수에 고드름이 생긴다던가, 간판이 신문사로 바뀌었다던가, 폐허에 불이 켜져 있다던가, 홍제 유연은 예쁘다던가, 여러 친구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다던가. 많은 대화를 나눔에 즐거웠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가끔 느슨히 함께 걸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그날 산책을 제안해주지 않았더라면 편지를 잠시 멈추자고 제안할 뻔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린 날이었거든요. 윤과의 산책과 대화 덕분에 아직 부족한 나지만 다시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윤과의 대화에서 새롭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다음에’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음에 가자 다음에 먹자 다음에 하자 등 윤과의 만남은 다음을 기약하는 단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너무 익숙하게 다음에를 사용하며 살아온 터라 갸웃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윤에게 물어봐야지 했습니다. 윤은 왜 다음에가 없나요?


      

상상과 망상의 차이가 궁금해졌습니다. 여러 사전과 지식을 뒤져봤습니다. 더욱더 모르겠더라고요. 공상과 몽상까지 나타나서 더욱 어지러웠습니다. 전부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걸 생각한다는 것까진 알았습니다. 얄팍한 이해로는 상상은 보통 물음표로 끝나고 망상은 보통 마침표 혹은 느낌표로 끝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더욱 이해가 어렵습니다. 극성 아이돌 팬이 그 아이돌과 결혼하는 상상을 한다고 칩시다. 하지만 이건 팬의 상상이 아닌 팬의 망상이라고 부르죠. 실제로 그들은 ‘뇌내망상’이라고 쓰니까요. 방송에서는 상상도 못 한 전개라는 자막이 흔히 사용됩니다. 그것은 또 망상이 아니죠. 무엇이 다른 걸까요. 예상이 가능하면 상상이고 예상이 가능치 않으면 망상인 걸까요? 머리 아픈 점은 또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상상으로 비행기(혹은 나는 것)를 발명했습니다. 이건 예상이 가능하기에 상상인가요? 아니면 상상은 긍정적인 단어고 망상은 부정적인 단어여서 하늘을 나는 망상이 비행기 발명 이후에 상상으로 바뀐 것일까요?     



한자어를 뜯어보기로 했습니다. 망상(妄想)은 망령되고 어그러지고 헛된 생각입니다. 상상(想像)은 모양이나 형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망상은 생각(想)이 뒤에 붙어있고 상상은 생각이 앞에 붙어있군요. 상상의 어원은 코끼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설명을 듣고 코끼리를 떠올리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코끼리라고 하니 체스의 비숍이 생각납니다. 체스의 조상 격 보드게임에선 비숍이 코끼리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럽에는 코끼리가 없었기에 나라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바꾸어 사용했고 지금의 비숍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상상력이 없었나 봅니다.     



세상이 체스판이라면 저는 비숍입니다. 평생 체스판의 절반만 움직일 수 있는. 전략에 따라 착한 비숍이 되기도 나쁜 비숍이 되기도 하는 체스말 말입니다. 똑바로 가기 싫어 삐뚤게 가면서, 언제든 나이트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위태로운 길을 가면서, 고작 3점짜리 길을 가면서, 체스판의 말이 적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체크메이트를 노리는 비숍입니다.     



하고 싶은 것과 했을 때 재밌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하고 싶어서 했는데 재미가 없을 경우가 있다는 거죠. 저의 경우는 커피였습니다. 커피 일을 하고 싶어서 했는데 막상 해보니 커피보다 카페를 좋아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생산자보다 소비자로서가 즐거웠던 거죠. 프로모션을 짜고 매뉴얼을 만드는 일은 나름대로 보람 있었지만 하루하루 지쳐갔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미련 없이 속 시원하게 관두게 되었죠.     



책을 만드는 일은 즐겁습니다. 다른 이의 글을 읽고 다듬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책의 형태로 만드는 것은 이전에 했던 일보다 신경을 더 많이 쓰고 시간을 더 많이 쓰는 일이지만 재밌습니다. 윤이 가제본을 보며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면, 더 즐겁고 더 재밌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또 한 번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이 즐거움을 놓을 수 없는 욕심쟁이라서.     



나는 경험주의자다. 라는 말을 했었는데요. 확실히 저는 뭐든 해보는 주의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 몸으로 생각했을 때 답이 나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경험에서 얻어지는 정보가 있기 때문이죠. 경험은 어쨌든지 해두면 어딘가에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어릴 때 배워 두었던 피아노 덕분에 악보를 볼 수 있어서 뮤지션들과 대화가 편했다던가, 자의타의로 알게 된 포토샵 덕분에 책 만들기를 금방 배웠다던가 말이죠.     



순간의 기분을 표현해보고자 했던 것도 그것의 일종입니다. 떡볶이를 먹으며 행복하다 했던 것도 낮의 커피를 마시며 행복하다 했던 것도 좋은 얘기를 나누어 행복하다 했던 것도. 행복의 경험을 정보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순간의 행복을 쌓아 현재의 행복을 고찰해서 나중의 행복을 기억하려고요. 그래야 내가 감정이 둔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야 윤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