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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Jun 04. 2022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어떤가요?

일곱 번째 편지

세상에는 즐길 거리가 참 많습니다. 유튜브, 웹툰, 인터넷 페이지, 게임, 책, 티비, 영화 등이요. 하지만 가끔 누군가의 연락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전화 한 통이 필요할 때가 있죠. 내가 먼저 걸 자신은 없습니다. 지금은 늦은 시각이고 아니, 이른 시각이라서요. 12시가 한참 넘은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시간이네요. 모두들 잠들어있거나 아니면 얕은 잠을 자고 있겠죠. 쌓여있는 일이 있지만 지금은 하기 싫습니다. 술은 덜 마셨고 이따 오후엔 일정이 있고 휴일은 끝이 나겠네요. 하루하루가 참 빠르고 일년일년이 참 빠른데 지금은 참 느립니다. 지금 따라 유튜브도 게임도 책도 어떤 유흥거리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을 달래줄 여러 노래만 흘러나오고 있네요. "요즘 무슨 일 있어?"라고 물으면 아무 일이 없는데. 나는 거울이니 오늘 만났던 누군가의 기분이 울적했나 봅니다. 그냥 그런 날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일도 없는데 호르몬의 장난으로 기분이 처지거나 아무런 일이 없어서 기운이 처지거나. 오늘 만났던 아무도 울적하지 않았다면 그냥 그런 날인가 봅니다. 윤도 그냥 그런 날이 있나요?

 

궁금해집니다.

윤도 오늘 많은 사람을 마주쳤을 겁니다. 그 사이에서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모두 앞을 바라보고 가는 버스에서 뒤 풍경을 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가야 할 길을 착착 걸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과거의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죠. 궁금했습니다. 저 사람은 왜 뒤를 보고 있는 걸까. 무언갈 두고 왔나? 누군가와 헤어지고 이 버스를 탔나? 내가 내릴 때까지도 그 사람은 뒤를 보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걸까요? 저는 한 번씩 버스를 타면 그 사람이 떠올라 뒤 풍경을 보게 될 겁니다.

 

조용한 거리를 시끌벅적한 비트의 랩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걸었습니다. 내적 댄스를 추며 머릿속으로 힙합 무대를 떠올렸지만 조용한 거리의 일원인 척 표정 변화 없이 얌전히 걸었죠. 거리엔 이어폰을 낀 사람이 많았습니다. 누군가는 유행하는 음악을 누군가는 필요한 강의를 누군가는 마음을 건드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들의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내가 시끌벅적한 비트를 숨기고 있듯 그들도 자신의 귀에 퍼지는 비트를 숨기고 있죠.

 

사람들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핸드폰 카메라에 담습니다. 맛있는 음식, 재밌게 읽은 책, 가다가 마주친 예쁜 꽃, 좋은 풍경, 함께한 사람 등 말이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의미가 있는 것에 핸드폰을 들이대죠. 예전보다 기억력이 나빠져서일까요. 예전보다 조금 더 남겨두고 싶어졌습니다. 내 핸드폰엔 사람이 많이 찍혀 있습니다. 윤도 있죠. 같이 찍은 사진은 별로 없고요. 얼굴이 제대로 나온 사진도 별로 없고요. 그냥 그 순간의 모습이 담긴 경우가 많습니다. 걸어가는 뒷모습, 앉아있는 흔들린 모습, 무언가를 보고 있는 모습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찍혀 있는 모습도 있죠.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듭니다. 사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자도 좋지만 의미를 순간으로 남기자가 더 마음에 듭니다. 언제부턴가 10초 영상 찍는 취미가 생겨 요즘은 10초 순간을 남기기도 합니다. 가만한 순간인 10초가 참 마음에 듭니다.

 

핸드폰 바탕화면엔 한 페이지를 다 차지하는 위젯이 있습니다. 메모 어플입니다. 여기에는 오타가 가득한 순간적인 생각과 윤에게 하고픈 말이 여럿 적혀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듬어져 원고가 되기도 하고 어딘가의 자료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번 편지를 쓰기 전 한번 정리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윤에게 어떤 말을 했고 안 했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폴더 분류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부분부터 시작했습니다. 2천개가 되어가는 메모를 모두 정리할 순 없겠지만 최대한 해보려고요.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참, 신기했습니다. 분명 윤을 알기 전에 남겨놓은 메모인데 최근의 메모와 비슷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많이 있었습니다. 같은 소재인데 예전과 지금의 결론이 다른 경우도 있고 같은 경우도 있고. 아예 시점이 달라진 경우도 있었죠. 예전엔 결론을 지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못 지은 것도 있었습니다. 나는 비슷한 소재에 관한 고찰을 얼마나부터 해 온 걸까요? 예전엔 힘듦의 바다에 빠졌을 땐 바닥을 치고 올라와야지 했던 것이 지금은 가라앉아 있을 뿐 바닥을 치고 올라올 힘이 있을까로 바뀐 것은 우연일까요? 예전엔 호기심으로 시작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지금은 걱정으로 시작하는 관심으로 바뀐 것은 우연일까요? 이래서 지난 원고는 이불킥을 불러오나 봅니다. 그땐 틀리고 지금은 맞다 일까요. 아니 그때도 지금도 맞고 앞으로도 맞다겠죠.

 

발매만을 기다려왔던 게임이 많은 이에게 사랑받고 고인물이 생길 정도로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같은 소재를 여러 번 반복해서 곱씹고 있을 뿐이죠. 변한 것이 하나 있다면 소금빵 맛을 몰랐는데 알게 되었다는 걸까요. 맛있더라고요. 소금빵.

 

 

 

 

 

빛이 없는 곳을 무서워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이죠. 집의 거실은 항상 불이 켜져 있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두운 곳에 들어가는 행위가 두려워서요. 잠을 잘 때도 불을 켜놓고 잡니다. 어두운 곳에서 잠을 자는 게 무서워서요. 밝은 곳에서 자면 잠을 제대로 못 잔다기에 불을 끄는 습관 들이려고 했던 적이 있지만 오히려 공포 때문에 잠을 못 자더라고요. 습관을 들이려고 했던 한 달 동안 아주 괴로웠습니다. 잠을 설치고 깨고 보이지 않는 공포와 마주하는 시간이 힘들었죠. 그래서 그냥 거실 불을 항상 켜놓는 것으로 자신과 합의를 봤습니다. 24시간 밝은 곳이 있습니다. 우리 집 거실이요.

 

불을 끈 방에서 밝은 거실 불을 바라보며 '쉬는'시간이 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쉬기란 혼자 먹고 놀고 자는 것인데 먹는 것과 노는 것에 큰 관심이 없는 저는 요즘 부쩍 잡니다. 먹는 것에 관심이 없은지는 너무 오래되었고 (맛있는 행복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24시간 끼고 살던 유튜브도 시들해졌습니다. 하루종일 유튜브만 보면 무기력증이라는데 오히려 땡기지 않는 건 무기력하지 않은 걸까요? 언제나 날 기다리고 있는 게임과 책도 있지만 요즘은 손이 잘 안갑니다. 놀기를 대체하곤 하던 개인 업무도 뭔가 요즘은 거들떠보기 싫어졌습니다. 그렇게 남은 것이 자는 것이라 요즘은, 잡니다.

 

유튜브가 시들해진 건 꿩 대신 닭 콘텐츠가 쉬지도 않고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게 없으면 저거라도 괜찮아. 잠들지 못하면 자는 척도 괜찮아. 뛰지 못하면 걷는 것도 괜찮아. 전등이 없으면 양초로도 괜찮아. 밥이 없으면 빵이라도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걸까요? 대체제로는 높은 만족도를 얻을 수 없을 텐데요. 정말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대체제가 정말 원하는 것이었던 양 바뀌게 돼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럼 나는 영원히 대체제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겠죠. 저런 콘텐츠가 바라는 건 자는척하다 잠드는 것, 걷다가 뛰는 것, 전등을 사러 가는 것, 이번엔 빵을 먹고 다음엔 밥을 먹는 것이겠지만. 이번을 쉼으로 도약을 얻으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계속 괜찮아괜찮아대충괜찮아 하다 보면 진짜 괜찮다고 착각하게 되겠죠. 차라리 넉살과 까데호의 <알지도 못하면서>가 괜찮은 도약을 얻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알고 싶지도 않겠죠. 내가 누군지.

 

 

 

 

 

나의 언제나 차분한 성격을 닮고 싶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차분이라. 차분하게 막말하는 모습을 봤던 걸까요? 김영하의 유퀴즈 인터뷰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달라서 MBTI를 믿지 않는다고. 확실히 내가 보는 나는 차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격정적이진 않지만.. 뭐랄까.. 텐션이 높진 않지만.. 뭐랄까.. 윤이 보기에도 저는 차분한가요? 제가 생각하는 저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짜증을 못 참는 모습인데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대부분의 관심사입니다. 그만큼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는 말이고 그만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한다는 말이죠.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관심은 곧 내가 남을 어떻게 보는지로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무의식적으로 평가 당합니다. 그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평가라고 불리지도 않고 거부감을 느끼기도 허탈한 일이 되었죠. 그렇구나 넘깁니다.

 

예전엔 사람을 보고 내 과인가 아닌가 생각했던적이 있습니다. 나랑 잘 맞겠다 아니다. 친해질 수 있겠다 아니다. 하지만 삘이 틀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판단은 하지 않습니다. 윤과의 편지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내용을 나눌 수 있을지 몰랐던 것처럼요. 예상보다 아주 즐거운 편지 생활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의 고찰도 깊어지고 넓어졌습니다. 내가 보는 윤은 뚜렷해지는 중입니다. 복숭아가 익어가는 중입니다.

 

저는 똘똘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바보로 보이는 걸 좋아합니다. 혹은 멍청이나. (결은 다르지만 또라이도 좋아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착해 보이기 때문이죠. 약자의 위치를 유지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죠? 보호받는 위치가 편하기 때문에, 나서지 않는 게 편하기 때문이라는 말 기억나나요? 그것과 비슷합니다. 착해 보이는 모습을 이용합니다.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눈치 없이 행동하고 쉽게 무리에 끼거나 쉽게 자리에서 이탈합니다. 실수해도 "그래도 애는 착해."란 말이 나오는 바보의 표본이죠. 딱딱한 차림새보다 유한 차림새를 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보가 습관 되다 보니 똘똘해야 할 때 그렇지 못한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보인 척하더니 진짜 바보가 됐습니다. 그래도 애는 착해가 아닌 "쟤 진짜 바보야."가 된 거죠. 꽤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고민해 왔는데요. 나는 안 똘똘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을 뿐입니다. 똘똘한 척은 진짜 똘똘해야 할 수 있는 거였고 실제로 똘똘하지 않으면 그런 척도 할 수 없더라고요. 이제와서 똘똘한 사람이 되려니 힘듭니다. 헤헤. 그냥 바보로 살려고요.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눈치 없이 행동하고 쉽게 무리에 끼거나 쉽게 자리에서 이탈하겠습니다. 일부러 하는 게 아니라 알아서 그러고 있더라고요. 안녕하세요. 바보입니다.

내가 남에게 보이는 행동은 사실은 내가 받고 싶은 행동이기도 합니다. 내가 친절을 베푸는 행위는 사실 내가 친절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거죠. 내가 너에게 친근하게 군다면 너도 나에게 친근하게 굴어줬으면 좋겠다는 거죠. 나에게 필요한 걸 상대에게 줌으로써 그것과 비슷하게 돌려받길 원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요. 무의식적으로 그렇다고 해요. 윤이 필요한 게 관심과 사랑이라면 내가 필요한 건 무관심과 내버려둠입니다. 그래서 난 오래도록 기억력이 나쁩니다. 무관심하거든요. 일부 강렬한 사람이 머리에 남는 거죠. 그이라고 오래 기억되진 않습니다. 내버려 두거든요.

 

 

 

 

 

부쩍 삐뚠 하루입니다. 아무 소리가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내보인 무관심과 내버려둠은 왜 돌아오지 않는 걸까요. 내가 내보인 눈치 없음과 센스 없음은 왜 돌려주지 않는 걸까요. 그때는 나를 다독이는 노래도 유튜브의 잡음도 아무의 연락도 필요 없이 조용한 공간에 홀로 앉아 있습니다. 내가 내는 바스락 소리에도 예민해져 양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가만한 순간의 10초가 수없이 반복됩니다. 장면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가만한 순간입니다.

 

가만한 순간을 보내다가 끌어안은 무릎이 저려오면 찾는 곳이 있습니다. 윤과도 몇 번 함께한 곳이죠. 괴물동굴입니다. 이곳을 알게 된 지 벌써 4년이지만 언제 가도 편한 곳이죠. 바 테이블이 있고 가끔 마주치는 단골들이 있지만 언제 가도 혼자 있는 편한 느낌을 받는 곳입니다. 속해 있어도 편한 느낌을 받는 곳입니다. 가만한 순간에서 조금의 소음이 들어오며 나를 평상시 모습으로 돌려주는 곳입니다. 책을 읽다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글을 쓰다가 농담을 나누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인사했다가가 자유로운 곳입니다. 커피 입맛을 고급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죠. 으으. 이곳의 커피 맛은 너무 좋아서 입맛이 너무 고급져졌어요. 커피 입맛이 사장님의 맛에 길들어 버렸다고요. 살려주세요.

 

어떻게 이런 편한 느낌의 바를 만들었냐고 사장님께 여쭌 적이 있습니다. 해방촌에 열었다는 2호점을 가는 길이었죠. 얼마 전 편지에도 적었던 그때 말이에요. 그때 이동시간이 겹쳐 사장님의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조수석에 앉아서 해방촌으로 옮길 짐을 바리바리 안고 꾸겨져 앉아 있었죠. 차에선 올드 스쿨 라디오가 나오고 있었고 사장님은 리듬을 타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사장님의 이어폰 속 비트를 엿들은 기분이었습니다. 뒷좌석은 이미 짐으로 가득했죠. 일을 벌여 바쁘고 힘들지만 즐겁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편한 느낌의 바를 만들 수 있었냐고. 여럿이었다가 혼자였다가 다시 여럿이었다가 다시 혼자여도 편한 바를 만들게 되었냐고. "글쎄요.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바 테이블을 중독시킨 곳이기도 합니다. 이 괴물동굴은. 여러 바 테이블이 있는 가게를 다니지만 이곳만큼 혼자가 편한 곳은 없었죠. 모두 바 테이블을 벗어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거나 뒤로 밀거나 하면서 둘이, 여럿이, 혼자가 됩니다. 그것이 선을 넘지 않는다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말을 놓지 않죠. 그것 또한 이곳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중이 존댓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존댓말이 더해져 서로가 각각의 개체로 존중한다는 느낌을 주죠. 그리고 이곳의 수장인 사장님의 유머가 적당히 선을 조절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닐까 싶어요. 분위기가 과하거나 처지지 않게 적당히 치고 들어오는 유머는 모두를 웃게 합니다. 항상 사장님은 바 테이블로 된 선 안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유머를 건네줍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요." 사장님이 늘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나는 그것이 진짜 인지 아닌지 옛날에는 헛갈렸지만 이제는 그게 진짜라는 걸 압니다. 사장님이 가게의 문을 열고 바에 서는 순간은 정말 저 모습일 겁니다. 그것이 으른의 여유라는 걸까요.

 

나는 내가 감정이 없다는 편지를 진지하게 썼다가도 감정이 넘치는 편지를 진지하게 썼다가도 하면서 아직 선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디게 사는 것이 그저 욕심을 억누르고 숨겨놓았을 뿐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걸 어떻게 잘 풀어놓아야 날뛰지 않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내가 잘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못 알아들은 척 바보 표정을 짓는 것뿐인데 요즘 슬슬 나쁜 본성인 야비한 표정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 알지만 부러 말하지 않고 다 들었지만 모른 척하는 그 야비한 표정이요. 나는 으른의 여유가 없어 감정을 잘 조절해 선을 유지하는 법을 아직 모르니 바보이거나 야비한 극과 극의 모습을 한동안은 가져갈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야비한 바보입니다.

 

 

 

 

 

필요시 약이 정확히 무엇에 필요한 건지 잘 모릅니다. 몰래 찾아봤지만 해당하는 병명이 많아 윤의 어떤 부분에 처방이 되었는지는 전문가가 아니라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필요할 땐 먹을 수 없는 필요시 약이라는 것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윤을 지탱하고 있다면 그런 것이겠죠. 다행입니다.

 

아픔을 동경한다고 말했었죠. 윤이 자주 아프다면 자주 걱정이 되지만 자주 불편하진 않습니다. 가끔 의문은 듭니다. 동경하는 아픔을 겪는 모습을 나는 어떻게 지켜보아야 하는지. 그저 바람처럼 흐르게 두어야 할지. 그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지켜봐 주어야 할지. 보이는 마음과 들리는 말이 모순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윤의 마음을 존중해야 할지 말을 존중해야 할지 헛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마치 할머니의 욕 안에 츤데레적인 정이 숨어있는 것처럼 윤의 친절한 말에는 가시 돋친 못이 숨어있었죠. 아픔을 동경한다는 말과 아픔은 무섭다는 마음 중 어떤 것을 존중해야 할지 몰라 가끔 말리고 가끔 내버려 두고 가끔 잔소리하고 가끔 돕습니다. 머릿속에선 떨어지는 이의 눈을 마주치며 그 눈에서 공허함을 느끼지만 현실에선 떨어지는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겠죠. 나는 그런 윤을 보며 어느 쪽을 존중해야 할지 몰라 가끔 눈을 마주치고 가끔 일으키고 가끔 내버려 두고 가끔 많이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합니다.

 

무엇이든 제대로 마주하는 건 무섭습니다. 그것이 안이든 밖이든 그 밖이든. 나는 무엇도 마주해본 적 없어 제대로 무서워해 본 적은 없지만 가끔 윤에게서 마주하는 빛을 보면 무섭습니다. 어두움을 무서워하는 나인데 빛이 무섭습니다. 그래서 그림자를 찾아 숨습니다.

 

내 그림자는 초록색이기도 파란색이기도 하며 하얀색이기도 합니다.

 

 

 

 

 

조직생활을 공부 당한 사람입니다.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꼰대죠. 틀이 없으면 사회의 틀을 끼워 맞추려고 하고 매뉴얼이 없으면 사회의 시선에 맞춘 매뉴얼을 만듭니다. 조직 생활에서 가장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접니다. 가장 칠렐레팔렐레해 보이는 사람인데 말이죠. 저는 저의 융통성 없음이 마음에 듭니다. 독창적이지도 않고 유들하지도 않은 그 모습이요. 자신만의 색깔을 뚜렷이 만들어내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지만 적당히 회색인 이 색깔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지 않은 뚜렷한 색깔을 소비하면서 삽니다. 하나의 영감거리로 생각하면서요.

 

해침을 그대로 보여주며 분노하게 하는 콘텐츠와 해치지 않음을 그대로 보여주며 희망하게 하는 콘텐츠를 연달아 보게 됐습니다. 표현방식은 달랐지만 두 콘텐츠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같았습니다. 생존이었습니다. 아마 윤이라면 두 콘텐츠 모두에 몰입해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을 풍부하게 떠올렸겠죠. 조심히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감수성이 발달하지 않은 자입니다. 마치 두 콘텐츠는 대중성이냐 예술성이냐를 늘 융통성 없이 고민하는 내 머릿속의 단면처럼 느껴졌고 자극적이냐 치유적이냐를 늘 따지는 내 머릿속의 융통성 없는 단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콘텐츠가 전달하는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죠. 드라마를 보며 주제를 어떤 캐릭터와 어떤 화면으로 어떻게 매력적으로 전달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듯이요. 앞선 편지에서 말한 거울적인 면이나 감정이 무딘 면은 나름 삐뚤어진 나를 잘 포장한 말이었습니다.

 

윤의 말이 맞습니다. 어떻게 인간인데 감정이 없을 수 있을까요. 느껴졌다. 고 표현한 것이 모두 감정일 텐데 말이죠. 무섭다는 것도 감정이고요.

 

감정보단.. 감성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감수성이라고 할까요.

여하튼 융통성 없이 살면 그런 것들이 필요치 않게 됩니다.

감정도 마찬가지고요. 그걸 저는 삐뚤어졌다고 말했죠.

 

우리가 솔직하게 나누고자 했던 편지에서 저는 1%의 솔직을 기반으로 미사여구를 많이도 사용했습니다. 아마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이었을 겁니다. 나는 생각을 감정이라는 미사여구를 붙여 포장했습니다. 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살짝 미색인 옛 종이에 펜촉에 잉크를 묻혀 정성스레 편지를 쓰고 잘 접어 조금 까슬한 봉투에 넣은 후 실링 왁스를 녹여 인장을 찍어 마무리합니다. 인장을 확인하고 봉투를 연 윤은 종이에 남아있는 잉크의 향과 글씨에 남아있는 흔들림 자국으로 나의 감정을 유추하며 편지를 읽겠죠.

 

윤이 먼저 하고 싶은 말을 꺼내어봤으니 이번엔 제가 꺼내 봐야겠죠.

감정이라는 미사여구 없이 말이죠.

 

해침과 해치지 않음을 번갈아 그냥 보여주기만 하는 콘텐츠를 봤습니다. 아무런 메시지를 던지지 않고 그냥 보여줌으로써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죠. 그것의 결론은 달랐습니다. 생존이 아닌 존생이었습니다. 살아서 존재한다가 아닌 존재하니까 살아간다. 해치기도 하고 해치지 않기도 하면서 존재하고 그렇기에 망가지며 망가지지 않으면서 살아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사람마다 다르겠죠. 본능일 수도 있고 필요일 수도 있을 겁니다. 내일 아침 눈을 뜰지 뜨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도 있을 겁니다. 변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버티는 것일 수도 있고 남으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살려고 하는 걸까요? 왜 그렇게 죽으려고 하는 걸까요? 지하철의 닫힌 문이 언젠가 열리는 것처럼 열린 문은 언젠가 닫힙니다. 똑같은 지하철 문이 구간 동안 그것을 반복하죠.

 

갓난아기 일 적이 기억나나요. 이제 막 갓 태어나서 울기밖에 못했던 그때 말이죠. 그때는 살고 싶었을까요 죽고 싶었을까요. 살려고 발버둥 쳤을까요 죽으려고 발버둥 쳤을까요. 이기려고 했을까요 지려고 했을까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느끼든 아이는 무조건 보호 받아야(지켜야) 하는 존재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다 자란 모습의 어른이 죽겠다고 하면 저는 말리지 않을 겁니다. 말리면 오히려 자유를 침범한다 하겠죠. 모든 생물은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놓는 것도 의지겠죠. 아직 바라본 이 중 삶을 놓은 사람은 없기에, 경험해보지 않아 철없이 말하는 거라 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누군가 날 비난하겠죠. 냉혈한이라고 정이 없냐고 손 한번 내밀 수 없었냐고. 말 한번 걸 수 없었냐고. 민감한 문제입니다만, 그건 그가 놓기 시작하기 전에 할 수 있었던 거겠죠. (그래도 놓았느냐, 그래서 놓지 않았느냐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의문입니다. 그가 모든 걸 놓은 후엔 남은 이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하염없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겠지만요. 그렇다고 막아야 할까요. 놓는 자는 놓는 자의 몫이 있고 남은 자는 남은 자의 몫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은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갈 뿐이라고 했죠. 그건 놓는 자의 몫입니다. 남은 자의 몫은 남은 자 각각이 정하겠죠. 비난하든 그리워하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든. 놓는 자의 몫은 그가 지고 가듯이요. 그렇게 평생의 몫으로 남겠죠.

 

오월의 청춘이라는 드라마를 봤습니다. "당신의 마음만 말해줘요. 그럼 내가 간단하게 만들 테니까." 아주 로맨틱한 대사였지만 동시에 아주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자신을 말려달라고 하면 도시락 싸다니며 뜯어말릴 것이고 슬프다고 하면 서라운드 울음을 밤새 들을 것이고 밥을 먹자고 하면 커피에 빙수까지 먹을 겁니다. 걷자고 하면 지구 반대편이라도 걸을 겁니다. 간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만 말해준다면. 그러니 윤의 마음을 말해주세요. 말려달라고. 슬프다고. 밥 먹자고. 걷자고.

 

나의 색색깔 그림자는 나의 몫으로 가져가겠습니다.

 

 

 

 

 

그 어떤 문자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적을 순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소리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더더욱이 문자로 표기하기 어렵겠죠. 우리는 글자 따위의 것으로, 말 따위의 것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니 한계가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죠. 하지만 적지 않으면 뱉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게 됩니다. 존재하기 어려운 게 아닌, 존재하지 않은 게 됩니다. 나는 그래서 나도 윤도 문자로 표기하기 어렵더라도 꾸역꾸역 글자 따위의 것으로 말 따위의 것으로 그려둡니다. 그때도 지금도 맞고 앞으로도 맞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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