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편지
충돌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번 편지는 충돌의 시간 덕분에 좀 늦어졌습니다. 대충 아무 말이나 적어 보내고 싶지 않았거든요. “뭐 어때.”와 “뭐지. 어떡하지.”가 충돌한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여러 번 충돌할 테니 잠시 잠잠해진 이때 편지를 쓰려고요.
기승전결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말을 찾지 못한 이야기는 풀어놓지 못하는 거죠. 어떻게든 결론을 지어야 첫마디를 뗄 수 있다는 게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하지 못한 말도 많다는 게 이상했습니다. 항상 그래서? 라고 묻는 내가 이상했습니다. 어떻게 저떻게 갖다 붙인 결론이 모두 희망차다는 게 가장 이상했습니다. 나의 기승전결은 구조가 모두 비슷합니다. ‘의문-이론-고찰-그래도’ 로 흘러가죠. 이건 나의 하루 흐름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나의 생활과 뇌 구조에 깊게 뿌리박힌 습관이라는 거죠. 나는 기승전결의 쳇바퀴를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문을 가졌죠. 이제부터 내리는 결론은 윤처럼 지하철을 내리는 것일까요? 운전석으로 쳐들어가 터널 속에서 지하철을 멈추는 것일까요? 일단 충돌의 결론이 나지 않은 지금 떠오르는 대로 편지를 써볼까 합니다. 정제되지 않은 하고픈 말이 우수수 쏟아지겠죠.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어진 선상에 있어 어제 일이 오늘의 조금 전 있었던 일로 착각되고 오늘의 조금 후에 할 일이 내일 일처럼 착각됩니다. 책방에 출근하면 맞이하러 나오는 고양이가 있는데요. 모모입니다. 모모를 쓰다듬는 것이 첫 업무죠. 하루는 자다가 맞이하러 나오지 않은 모모가 뒤늦게 애옹하며 다가왔는데요. 아까 쓰다듬어줬는데 왜 그러지? 물음표를 띄우며 모모랑 놀아줬죠. 생각해보니 그날 첫 쓰다듬이더라고요. 적당한 쓰다듬과 적당한 궁디팡팡을 받은 모모가 다시 잠을 자러 떠났고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우리 빙수 먹으러 갔을 때 기억하나요? "나랑 있으면 시간이 엄청 빨리 흘러 있대요."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하나요?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고. 그래서 안녕안녕 반가운 인사 했을 때가 한참 전처럼 느껴진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지금 우린 내일에 있나 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거든요. 매일 반복된 쳇바퀴를 굴려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뒤섞어 굴리는 걸까요.
새로운 관계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일을 벌였기 때문이죠. 새로움은 언제나 무서움을 동반합니다. 익숙함 또한 두려움을 동반하죠. 새롭거나 익숙하거나 할 수밖에 없는것이 관계인데 언제나 두렵거나 무섭습니다. 경험주의자라는 말이 무색해지네요. 윤의 용기 있어 보인다는 말에 ‘그런 걸까?’ 생각해봤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즐겁긴 합니다. 새로운 영감을 주니까요. 하지만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건 무섭습니다. 새로운 무서움을 주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데서만 그치지 않나 싶습니다.
재밌는 것은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타인보다 생각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부러 입 밖에 내지 않지만요. 더 재밌는 건 모든 사람은 생각이 아주아주 많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도요. 생각이 많다와 생각이 깊다는 정비례가 아닙니다. 생각이 많다와 생각이 넓다가 정비례가 아니듯이요. 나는 사람의 생각을 관철하는 걸 좋아해 대화에서 주로 질문을 하고 경청합니다. 그들의 생각을 관철하면서 생각합니다. 여담인데요. ‘생각’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지네요.
타인에게 휘둘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세탁기 속 빨랫감처럼 생각이 휘둘리는 요즘입니다. 시간을 들여 애써 쨍마른 햇볕에 건조해 두었는데 건조하기 전인 축축하고 더러운 상태로 돌려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당했습니다. 내 생각은 건조하기 이전으로 돌아갔고 다시 세탁기 속인 듯 요동치고 있습니다. 요동친들 무엇할까요. 과거에 생각을 세탁기에 돌리며 시간을 보낸 만큼, 시간을 들여 생각을 건조하기를 오늘에 반복해야겠죠. 오래 차근차근 씻고 말린 생각이 갑자기 우르르 무너져 예전의 것으로 돌아가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야 할 일이 있고 푸념을 털어놓을 편지가 있다는 겁니다. 윤은 매번 날뛰는 편지를 미안하다 했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도 윤에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날뛰는 나를 편지에 담고 있거든요.
관계는 늘 무력감을 가져옵니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늘 무력합니다. 노력은 한계가 있고 무너짐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나는 대부분을 좋은 게 좋은 거려니,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었지만 무력감에서만큼은 무너집니다. 각각의 개체로 존중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것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감정보다 이해가 우선이기에. 존중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깊어지는 것에 늘 무력합니다. 그저 존재하는 감정과 느낌을 담아두면 될 텐데 말이죠. 이기적이게도 나의 무력감을 인정해가는 중입니다.
외로움은 타인이 채워줄 수 없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외로움은 정도만 다를 뿐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모두가 가지고 있는 건 맞는데요. 정도가 변동되더라고요. 어떨 땐 사무치게 외롭다가 어떨 땐 외로울 틈도 없다가. 예전에 외로움을 거의 느껴본 적 없다는 분에게 "그럴 리 없어요!"라고 손가락으로 삿대질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외로움이 커지고 나서 내가 가지고 있던 외로움이 아주 작은 녀석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타인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이 되면 지금의 외로움이 엄청나게 커져 있을 수도 있겠죠. 어쨌든 외로움의 크기와 나의 생활은 아무런 연관 없이 흘러갑니다.
항상 같이 내리던 전철역에서, 나가는 출구가 이제 달라져도 집에 잘 도착하는걸요.
서운함은 좋아하니까 생기는 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좋아하지 않으면 되겠죠? 그런데 마음은 마음대로 안 돼서 마음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결국 좋아하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서운함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척만 열심히 하게 되죠. 우리는 모두 그렇지 않은 척에 익숙해갑니다. 살면서 점점 더 익숙해져만 가죠. 어떻게 하나 싶었던 포커페이스도 이제 마피아 게임에서 걸리지 않고 선동질을 할 만큼이나 늘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도 서운한 마음도 그대로인데 마피아가 승리한다고 행복한 밤이 찾아오진 않습니다. 좋아하는 마음도 서운한 마음도 그대로인데 마피아는 새로 선출되어 새로운 선동질이 시작됩니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던데. 감기와 서운함이라는 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져서 그런 걸까요? 아스피린을 먹으면 나을까요?
최근에 새로이 대화한 인물이 많았습니다. 모든 대화가 즐거웠죠. 생각점이 된 부분도 많았고 영감도 많이 얻었습니다. 알던 사람이든 모르던 사람이든 대화의 시작은 언제나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뭔가 모를 답답함이 따라다녔습니다. 이게 뭘까. 왜 즐거운데 답답한 걸까. 윤을 만나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오늘 처음 무표정을 지어본다는 것을요. 윤은 윤대로 생각에 잠겨있고 나는 멍한 채로 앉아있는, 대화가 오가지 않는 그 상황에서 짓는 무표정은 이상하게 나를 너무 편하게 했습니다. 과거의 기억에서 무표정이 필요할 때 윤을 찾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윤과의 대화는 즐겁습니다. 유우머도 즐겁고요. 그리고 각자 무표정일 수 있다는 게 편합니다.
주어와 목적어와 동사가 없는 문장이 있습니다. 주로 윤이 뱉고 내가 듣습니다. 예전의 나는 그것을 해석하려고도 해봤지만 이제의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윤에게는 그것이 필요가 없거나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뱉은 거겠죠. 해석하지 않아도 상관없거나 해석의 상관이 필요치 않거나.
세상의 모든 그래프는 자세히 보면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서 관계의 흐름 또한 계단식이라고 해요. 나는 최근 윤과의 그래프가 기울어지다 평지에 도달한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단기간에 많고 많은 정보를 우르르 주고받았으니 잠시 편편한 길을 걸으며 그걸 소화할 시기가 온 것이죠. 그래프가 계속 이어진다면 언젠가 자연스레 다시 우리는 가파른 길을 걷겠죠.
나는 늘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들 변하듯 나도 변해버릴지도 모릅니다. 나는 변하는 게 싫어 언제나를 지키려고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두지 않죠. 우리가 지나는 평지의 앞에 오르막이 있든 내리막이 있든 어쨌든 시간이 흐른 만큼 길은 변할 테니 여러 농담을 건네며 편편한 길을 걸어봅니다.
거의 매일 잠이 들던 시간에 눈을 떴습니다. 왜인지 아까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잠들었거든요. 바깥이 깜깜하고 제 위장이 깜깜하네요. 저번에 윤과 반띵해서 산 비빔면을 먹어야겠어요. 가끔 이렇게 새벽에 배고플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라면 몇 봉을 집에 둡니다. 윤의 집에 술이 몇 병 있듯이요. 쓸쓸한 마음의 허기를 대비해서 술이 윤의 집에 유지되고 있는 걸까요. 대부분의 대비는 채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위장을 채우고 마음을 채우듯 비어있는 무언가의 대비죠. 안전을 채우고 안정을 채웁니다.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사랑도 과하면 오히려 아프듯이요. 그런 의미에서 라면 한 봉지는 딱 적당합니다. 따듯하고 꼬들하고 짭조름하죠. 만족스러운 위장으로 다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금해졌죠. 사람들은 각기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무엇으로 대비하고 있을까요? 진짜 뜬금없는데 행복을 대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행복할 라면 몇 봉 술 몇 병을 대비하듯 행복하기 위해, 외롭지 않기 위해 행복을 대비하려고 행복을 대비하는 거 아닐까. 앗, 이런 말투는 분명 윤의 것일 텐데요.
캐릭터성을 둔다고 했잖아요. 그럼 지금의 윤은 어떤 캐릭터인가요? 불온전하지만 사랑스러운 캐릭터인가요? 나중의 윤은 달라지나요? 궁금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싶어집니다. 만약 캐릭터성이 극과 극을 달린다면 지금의 윤과 편지를 나눌 수 있음에 고맙군요. 적당히 매콤새콤한 것이 아까의 열무비빔면 같아서 마음에 들거든요. 괜찮다면 언젠가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지금 말고요.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캐릭터성을 가졌을 그때요.
무언가에 의미를 남기는 사람이 항상 신기합니다. 이 물건은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으로 산 거니까 의미 있는 것이야. 보다 조금 더 깊은 의미 있잖아요. 그런 걸 남기고 애틋해하고 그리워하고 떠올리고 찡그리며 봤다가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이 항상 신기합니다. 전 물건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물건이 별로 없기도 하고 버리는 것도 잘하거든요.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물건이 그 사람의 성향을 보여준다며 "당신에게 의미 있는 물건은 무엇인가요?" 질문받았습니다. 쉽게 떠오르지 않았죠. 누군가는 첫 해외여행에서 사 온 구두를 누군가는 오래된 일기장을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찍은 사진을 말했습니다. 어떤 마음일까요? 혹시 윤은 알고 있나요? 누군가는 서랍에 의미를 두고 누군가는 편지에 의미를 두고 누군가는 커피 한잔에 의미를 둡니다. 그 물건에 대한 기억이 소중한 건가요? 아니면 애착 인형처럼 그 물건과 함께 한 시간이 중요한 건가요? 무언가 알듯 모를 듯 해서 어렵습니다.
나는 이불 속에서 글을 쓰지만 이불에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속’에 의미가 있는 걸까요? ‘안’이라는 의미가요. 그건 바깥으로 나갔을 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걸까요?
뾰족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 칼 같이 거절할 줄 아는 사람.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 주체적인 사람. 리더십 있는 사람. 여하튼 뭔가 분명한 사람인 느낌이죠. 천성으로 서포터 기질을 타고난 저는 저런 성향을 보인 사람을 늘 어려워했는데요. 친구가 저에게 그랬습니다. 그거 동족 혐오라고. 나는 내가 상대의 보좌를 맞춰주는 페이스 메이커라고 생각했지만 머리채잡고 끌고 가는 사람이라는 말에 놀랐습니다. 상대의 길고 긴말을 한마디로 요약해버리는 버릇, 뭐 먹을까요의 고민 없는 선택,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의 그 자리에서 바로 약속, 대화의 소재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이어가기, 일은 벌이고 보는 모습 등이 내가 생각해도 서포터의 모습은 아니었죠. 뾰족한 모습이 싫은 건 아닌데 싫네요.
사람은 다면의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타인이 보는 나는 다면 중의 한 모습이고 그 면이 그 사람의 전부라 착각한다고 하죠. 두드러지는 모습이 정체성이라고 여겨지는 걸까요. 우리는 서로 알아가면서 여러 면의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알게 됩니다. 때론 바로 옆 면의 모습이 완전 상반적이기도 하겠죠. 나에게 뾰족한 모습 바로 옆면은 서포터의 모습도 있겠죠.
윤의 자존심은 얼마나 센가요? 최근 겸손과 미덕의 모습이 강할수록 다른 면에는 자존심이 센 모습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자존감과 자존심이 완전히 반비례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반비례한다고 생각했고요. 자신을 거짓으로 낮추는 사람은 티가 납니다. 누가 봐도 잘했는데 아니에요, 아닙니다 라고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가끔 화도 납니다. 나의 호의나 칭찬이 거절당하는 기분이라서요. (물론 이건 너무 앞서간 생각이지만요.) 겸손과 미덕이 예의로 간주되는 터라 그 모습을 디폴트값으로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거겠지만 유독 어울리지 않는 겸손과 미덕의 모습을 갖춘 자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 관찰해보니 그들 대부분은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자신의 방어기제로 거짓 예의를 가지고 있었죠. 이번에 자랑했다가 다음에 못 하면 자존심 상하니까. 이렇게 밑밥을 깔아두고 더 잘하면 겸손하다며 치켜세워지니까. 미리 방어기제를 깔아두는 거죠. 그래서 어딘가 그 방어기제는 어색해 보입니다. 윤이 무언갈 먹다가 흘리는 모습처럼요. 그들도 내면 아이와 싸우고 있는 걸까요?
자존심이 센 사람은 자존감이 낮아 보였습니다. 모자란 자존감을 대비로 자존심을 채워두는 걸까요. 상처받으면 내 탓이 아닌 네 탓으로 핑계를 댑니다. 이번에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그 일은 전달을 잘못 받아서… 절차상의 문제로… 예의가 생활화 되어 있어 핑계의 말은 항상 끝이 흐립니다. '그러니 내 잘못 아니야.'가 숨어있죠. 나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나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여요. 자존감은 자신을 사랑하는 건데. 남의 핑계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사랑일까요.
괜찮다고 말하면 미안하다고 표현합니다. 나는 진짜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건데. “멀리 오게 해서 미안해. 와줘서 고마워. 다음번엔 가까이서 보자.” “늦게 말해서 미안해. 기다려줘서 고마워. 이런저런 사정으로 늦어져서.” 이 말의 기저에는 분명 불쌍한 척하는 미안함이 깔려 있을 것이고 그것의 기저에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가 깔려 있을 겁니다. 네. 이것은 저의 삐뚠 시선입니다.
“안 괜찮을 때는 안 괜찮다고 말하는데.” 해도 으레 예의로 하는 말처럼 넘겨 듣습니다. 이럴 땐 참 답답하지만 그놈의 겸손과 미덕을 예의로 배웠음을 탓하며 그러려니 넘깁니다.
자신이 괜찮지 않았을 때도 괜찮다고 말해와서 그런 걸까요. 그놈의 겸손과 미덕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요. 이제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이 세 마디는 지나친 3형제라고 부르려고요.
삐뚠 나는 지나치게 다정한 사람을 보면 일단 그 모습은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면 중의 하나이고 그 바로 옆면 완전 다른 모습일 거로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라 뼛속까지 다정할 순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 생각은 아쉽지만 대부분 적중했습니다. 찡찡대거나 분노하거나 짜증 내는 면을 보아왔죠. 실망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궁금합니다. 평소에 조금 덜 다정하고 조금 더 찡찡이를 섞어 산다면 저렇게까지 화가 쌓일 일은 없지 않을까? 우리는 부정적인 면을 너무 감추고 산다 생각합니다. "싫어."를 살면서 처음 들어봤다는 지인의 말은 지금까지 충격적입니다. 굳이 일부러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아프면 아픈 티를 좀 내줬으면 하네요. 아닌 척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감추고 있다 분명 터질 테니까요.
윤과 편지를 나누면서 신기한 점은 나의 다면을 뜯어보게 됐다는 겁니다. 편지의 특수성일까요 윤의 특수성일까요? 아마 윤이 자신이 얘기를 잘 꺼내줘서일 겁니다. 덕분에 저도 저의 모습을 새로이 알아가고 놀라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듬어주는 일만 남았군요. 윤도 찬찬히 윤의 모습을 보듬어봅시다. 조금 천방지축인 친구지만요. 꽤 사랑스러운 친구니까요. 저도 가끔 보듬을게요. 물지 않겠죠?
세상은 뭐 어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요. 뭐 어때요. 시간은 흘러가고 생각은 흘러가고 마음은 남아있는 것을. 지나간 세탁된 생각이 나를 만든 것처럼 지나간 시간이 나의 마음을 만드는 거겠죠. 뭐 어때요. 나는 윤 옆에서의 무표정이 필요하고. 그래서 윤을 찾습니다. 뭐 어때요. 다음 편지는 더 잘 쓸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