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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Aug 11. 2022

낭만적인 안녕을 위하여

마지막 편지

비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예전도 지금도 그것을 '낭만'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의 낭만이 추억으로 끝났다면 지금의 낭만은 기록으로 남겨 파는 시대라고요. 기록을 공유하기 너무 쉬운 시대다 보니 그런가 봅니다. 윤과 가게 된 오락실은 신세계였습니다. 오락기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오락기에선 큰 음악과 큰 반짝임이 나오고 여기저기 화면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신세계요. 게임을 좋아하지만 얌전히 패드나 쥐어봤지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게임을 해 본 적은 없었거든요. 몸은 쓰는 데에 자신이 없어서도 있지만 집에서 모니터로 즐기는 게임이 더 생산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와! 시트 전체가 흔들리는 자동차 게임이라니! 저런 발상은 누가 한 걸까요? 와! 단지 버튼 세 개로 몰입하는 게임이라니! 그런 발상은 누가 했을까요? 리듬 게임은 어떻게 저렇게 종류가 많은 걸까요? 격투 게임은 어쩜 저렇게 고급질까요? 슈팅 게임에 부스를 만들어 몰입감을 높인 건 누구의 아이디어일까요? 윤 덕분에 나는 아주 즐거운 낭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트가 흔들리거나 버튼을 누르거나 둠칫둠칫을 느끼거나 응원의 소리를 지르거나 한 것은 정말로 비생산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낭만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신세계를 경험했고요! 기록으로 남겨 팔지 않아도 낭만의 생산성은 증명되었습니다.


감정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바닥을 치고 올라오거나 그저 잠겨있거나란 생각에 멈춰 있었는데. 그 바다의 세계를 받아들이며 유유자적하게 헤엄치고 다닐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전에 윤이 편지에서 말했던 감정을 쿨하게 받아들이는 친구가 이런 느낌일까 싶어요.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너무 낭만 없이 살았나 봐요.






윤은 할 일이 쌓이면 어떻게 하나요? 저는 정직하게 쌓아놓습니다. 어떻게 저떻게 풀어가야지 보다 일단 모든 걸 멈춥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뒹굽니다. 보통 일을 미루는 사람은 놀면서도 불안하다던데 전 그렇진 않습니다. 머릿속이 아예 하얗거든요. 우선순위와 중요 순위를 두고 하루마다 투두리스트를 짜는 사람이 대단하다 느껴집니다. 저도 해보려고 했는데 하얀 머리로 뭘 적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여튼 그렇게 뒹구르다가 갑자기 번뜩하고 내 안의 스위치가 켜집니다. 그럼 그때부터 일사천리로 해결하죠. 일을 하기 전 준비시간이 길게 필요한가 봅니다. 에너지를 모을 시간이라던가 여유를 모을 시간이라던가. 도약을 위한 멍때림이 필요한 걸까요.


하루아침에 되는 건 없다는 말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짜잔하고 바로 이루어지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고 싶다 생각한동안 뭐라도 했으면 쬐죈하고 작게나마 이루어가고 있겠죠. 우리의 편지로 책이 만들어진 것도 하루아침에 짜잔하고 이루어지진 않았잖아요? 많은 멍때림을 해봅시다. 짜잔의 도약을 위해서요.






경계에 오래 있어 본 사람의 말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한자가 많아 해석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경계는 이방인만이 느낄 수 있고 경계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존재하는 거겠죠. 우리는 시작점을 향해 있나요 아니면 끝점을 향해 있나요? 경계선 위에 서서 바라보는 방향은 어느 쪽일까요? 좀 더 오래 있어 봐야 알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영원히 모르니까 이방인인 걸까요.


여행의 시작과 끝은 집입니다. 집과 안녕하며 멀어지고 집에 안녕하며 가까워집니다. 안녕이라는 말은 시작도 끝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안녕은 경계의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윤에게 안녕을 보냅니다. 시작을 향한 안녕과 끝을 향한 안녕의 집에서요.






소년만화에선 주인공의 열정적인 마음과 열성적인 외침으로 진화합니다. 단지 바라고 바라고 바라는 것만으로 진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바람은 그만큼 열정적이지 않은 걸까요? 혹시 열성적인 외침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왜 그거 있잖아요. 힘이 몸에 막 솟구칠 때 주인공의 오오오! 하는 그 외침이요. 


언젠가 친구와의 드라이브에서 밤의 강가를 달린 적이 있습니다. 잠깐 차를 세운 친구는 강을 보며 소리를 치자고 했습니다. 스트레스도 날아가고 뭐든 해낼 수 있을 힘이 생긴다고요. 나는 왜?라고 생각했지만 곧이어 들리는 친구의 외침에서 딱 소년만화의 주인공을 떠올렸습니다. 멋있었죠. 나도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나의 외침은 하늘하늘한 소프라노 피리 소리였습니다. 금방 부끄러워졌죠. 친구는 목이 아니라 마음으로 외치는 거라 일러주었지만 부끄러움이 이미 온몸을 지배한 외침은 전보다 더 가늘어졌습니다. 내가 피리 소리를 내든 리코더 소리를 내든 친구는 후련한 얼굴이 될 정도로 소리쳤습니다. 저런 사람이 주인공을 하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지금 내가 소리를 외친다고 해도 엄청 장황하진 않겠죠. 그래도 다시 한번 외쳐보려 합니다. 진화하고 싶거든요.






사람마다 냄새가 다르다고 하잖아요.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윤에게서는 가끔 인센스 향이 납니다. 덕분에 저도 인센스에 취미가 생겼죠. 윤이 추천해준 인센스 향은 전부 취향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술을 자주 마시는 친구에게선 술향이 자주 나고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에게선 부러운 고양이 향이 나고(누가 고양이 향수를 만들어 준다면 당장 살 텐데 말이죠.) 자전거를 매일 타는 친구에게선 바람 향이 납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에게서 나는 향은 그 사람의 일상이 묻어있습니다. 저에게선 어떤 향이 날까요? 종이 향? 커피 향? 멍때림 향? 최근에 윤이 나무 냄새의 무언가를 샀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가요? 나무 냄새의 무언가는?






작년 생일엔 무얼 했나요? 예전 모습의 책방 사진이 필요해 갤러리를 뒤지다가 작년 생일 날짜로 남아있는 한강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비가 왔었는지 땅이 축축하게 젖어있었죠. 생일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누구에게나 특별한 날입니다. 생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났기에 축하받습니다. 참 신기한 날이죠. 내가 태어나 존재하는 것에 축하받는 게 이상한 기분이라 저는 매해 생일을 조용히 지나가려고 합니다. 친한 지인들과 오랜만에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시간으로 보내죠. 누군가 선물을 주고 싶다고 하면 시간으로 달라고 합니다. 이참에 얼굴 좀 보자 하면서요. 물건보다 시간에 욕심이 있는 저라 그런가 봅니다. 


저에겐 매해 생일 때만 연락을 주고받는 '생일 친구'가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인연인지 까먹었지만 서로의 생일날에만 기프티콘을 주고받습니다.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뭐 하고 사는지도 몰라요. 얼굴은 프로필 사진으로 조그맣게 알고 목소리도 어렴풋이 느낌만 남아 있습니다. 제 생일이 그 친구보다 며칠 앞이라 그 친구가 저에게 먼저 기프티콘을 보냅니다. 매해 다양하게 받았습니다. 커피 쿠폰부터 인형, 화분, 향수, 무드 등, 핸드크림 등 무난하게 생일선물로 받을 법한 걸 받았죠. 저도 그에 맞추어 그 친구의 생일 알람이 뜨면 쿠폰을 보냅니다. 그게 꽤 오래됐습니다. 생일 때만 선물과 메시지를 보낼 뿐 그 외에는 전혀 연락하지 않아요. 그 사실이 재미지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생일 친구'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 친구도 재밌어하며 동의했죠. 여전히 생일 이외에는 연락하지 않고 지냅니다. 곧 그 친구의 생일이 다가오네요. 올해는 어떤 것을 주고받으려나요. 윤의 생일 모습은 어떤가요? 올해 윤의 생일에는 케이크를 하나 사볼까요?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는지 알려주면 준비할게요.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다 막는 방패의 이야기 들어봤나요? 이들의 싸움은 언제나 화젯거리입니다.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 이 둘의 모습은 똑같을 수도 있습니다. 창의 모양이 방패일 수도 방패의 모습이 창일지도 모르는 얘기죠. 사람이 가진 방어기제는 제각각이지만 어떤 이는 공격형이고 어떤 이는 방어형이란 얘길 합니다. 이 또한 사람마다 가진 기제가 창의 모습일 수도 방패의 모양일 수도 있다는 거죠. 뾰족한 정도와 넙데데한 정도가 서로 다르겠지만 대충 창방패라고 불러봅시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저마다의 창방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뚫고 무엇이든 막다 보니 성질의 충동으로 자주 고장 납니다. 아무것도 뚫지 못하고 아무것도 막지 못하는 거죠. 내 창방패가 약해 빠져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고장 난 겁니다. 세상에는 정상인 사람이 없다고 하잖아요? 온전한 사람이 없다고도 하고요. 훌륭하고 매력적인 모양 모습의 창방패를 가진 사람은 많습니다. 윤 것도 그러하죠. 단지 모든 창방패가 고장 났을 뿐입니다. 






여러 콘텐츠에서 죽음을 다룹니다. 어떤 죽음은 감동을 어떤 죽음은 깨우침을 또 어떤 죽음은 허망함을 주기도 하죠. 죽음은 기억과 연관 있습니다. 죽음을 누가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왜곡되기도 사태가 위로되기도 합니다. 기억은 유전자에 남아 후세에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이 생존을 위해 귀엽게 변해갔다는 설 역시 그런 착안에서 온 것이겠죠. 생과 사가 연결되어 있다고도 하잖아요. 그래서 생일과 기일을 모두 챙기나 봅니다.


인간은 불온전한 존재이기에 불로불사가 불가능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불온전한 존재가 불로불사가 되면, 그 존재들로 세계가 채워진다면 세상은 아주 혼란스럽겠죠. 대신 늙고 덧없는 삶을 주어 한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도록 했다고 합니다. 없어지기에 애틋함이 생겨난 거죠. 이런 설은 참 재미지네요.

한때 커뮤니티에서 유서를 쓰는 콘텐츠가 유행한 적 있습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마냥 먼 미래일 죽음을 생각하며 주변인에게 남길 기억을 적는 콘텐츠였죠. 많은 이가 유서를 발표하며 울었습니다. 자신의 죽음도 슬프고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남겨질 이들의 아픔도 슬퍼서 울었습니다. 그동안 챙겨주지 못한 것에도 울었습니다. 한바탕 울음바다를 정리한 뒤 모두는 이제는 주변을 잘 챙기려고 다짐한 얼굴로 떠났습니다. 더 이상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겠죠.


어릴 적 같이 살았던 친구의 고양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번 목요일 병원에 가 남은 생이 얼마인지 듣고 온다고 했어요. 지금은 집에서 수액을 맞는데 친구가 시간마다 알람을 맞추어 놓았다고 보여줬습니다. 모닝콜로만 쓰던 알람이 이렇게 슬픈 것일 줄은 처음 알았어요. 고양이의 이름은 ‘나무’입니다. 나무는 아주 조막만 할 때 나와 친구가 사는 집에 와서는 아침마다 우리의 코를 때리며 놀아 달라던 녀석이었어요. 그때의 나는 녀석에게 고양이와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귀엽고 순한 고양이었어요. 사람을 잘 따랐고 눈치도 빨랐죠. 둘째 고양이 먼지에게도 훌륭한 집냥이로 사는 법을 알려준 선배입니다. 친구는 결혼 후 용인으로 이사를 가 물리적으로 멀어졌습니다. 제가 나무를 볼 기회도 적어졌죠.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내 냄새를 맡아보고는 반가움의 이마 인사를 해주곤 했어요. 마지막으로 봤던 게 지난겨울이었는데 그때도 이미 몸이 가늘어 있었고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나무가 떠날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는데 갑자기 온 친구의 소식에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나무는 어떤 기분일까요.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을까요. 더 이상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은 떠나는 이도 남겨진 이도 미안한 일 투성입니다. 시간을 쥐어 짜내어 나무와 시간을 보내고 오려고 합니다. 






소중하다는 것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아낀다와 소중하다는 조금 다른 개념일까요? 실종자 포스터를 봤습니다. 지하철 바닥에서 말이죠. 누군가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이겠죠. 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은. 포스터를 만든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일 겁니다. 매일 울며 연락을 기다리겠죠. 포스터는 내가 주울 틈을 주지 않고 미화원분에게 집혀갔습니다. 안경을 새로 맞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형의 것도 있고 무형의 것도 있겠죠? 소중한 것은. 가족 친구 연인이 소중할 수도 있겠고 핸드폰 노트북 옷이 소중할 수도 영화 그림 작품이 소중할 수도 경험 고찰 감동이 소중할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시간을 애정하고 아끼지만 그건 소중하다와는 다른 느낌입니다. 윤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지하철을 내려 아이돌의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를 마주쳤습니다. 나는 그런 덕질 콘텐츠를 눈여겨봅니다. 애정이 담긴 콘텐츠는 퀄리티가 높아요. 디자인적으로도 배울 게 많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포토샵이나 영상편집의 실력을 늘리려면 덕질을 하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런 콘텐츠를 보면 팬들의 소중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역시 소중한 것은 마음이네요. 


저는 옷을 다려 입습니다. 내 옷은 소중하니까가 아닌 습관입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언제부터인지 까먹은 습관입니다. 일반 다리미는 무겁고 귀찮아서 가정용 스팀다리미를 사고부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엔 오래된 스팀다리미가 있습니다. 지금 시중의 스팀다리미는 아주 똑똑하지만 저 친구는 정말 정직하게 스팀 뿜는다, 안 뿜는다 기본적인 것만 할 줄 알죠. 각을 맞춰 다리는 건 아닙니다. 외출 전 한 번 슥슥 훑는 게 전부죠. 저의 자취생활은 늘 누군가와 함께했기에 룸메들의 옷도 많이 다려주었습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신기해했습니다. 옷을 다려 입는 사람을 처음 본다면서요. 어차피 나가면 다 구겨질 텐데 왜 다려입냐고요. 지인의 등이 쭈굴쭈굴한 걸 보면 다려주고 싶어요. 스팀이 지나가서 편편해진 등을 보는 게 즐겁습니다. 저에게 소중하다는 표현은 등을 다려주는 건가 봐요.






동물은 감이라는 게 있어 자신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을 느낀다고 하죠. 사람도 동물이기에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거나 싫어함을 느낍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감정도 느끼죠. 이제는 소중하지 않다거나, 더욱더 불편해한다거나, 아예 관심이 없다거나. 왜 부정적인 예시밖에 떠오르지 않을까요. 삐뚤어졌나 봐요. 어쨌든 윤과 나는 그 거리감이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상대에게 어떤 감정을 주든, 그로 인해 상대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주든 크게 개의치 않는. 타인과의 감정 거리감이요. 






아브락사스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을 겁니다. 대부분 데미안을 통해 알고 있는 존재죠. 이 존재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입니다. 데미안은 매일 놀기와 후회를 반복하는 싱클레어에게 편지를 씁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간다고요. 우리가 가끔 산책에서 마주치는 왜가리는 어쩌면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가는 중일 수도 있죠. 아니면 이미 아브락사스를 만나고 온 왜가리일 수도 있고요.  윤이 착한 맛과 나쁜 맛을 구분 짓지 않고 융화되어 그 너머의 맛을 느끼기에 왜가리에게 본인을 동화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는 머리론 알고 있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행동이나 생각을 선악으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정말 착함과 나쁨이 있을까요? 착하면 호구고 나쁘면 이기적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자신은 착하게 보이고 싶어 하죠. 왜 우리는 착함과 나쁨을 생각하는 걸까요? 그렇게 교육받아왔기에 아직 그 교육이라는 알에 갇혀있어 왜가리가 되지 못해 그런 걸까요?


여러 전문가를 모방하다 걸린 희대의 사기꾼은 경찰에 잡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내가 될 때마다 진짜 나의 일부가 죽어갔다고. 나는 착한 맛도 나쁜 맛도 죽어버려 애매모호한 맛이 되었는데 그게 나쁘진 않아요. 누군가의 맛을 모방해 거울처럼 비추는 것도 아주 나쁘진 않아요. 덕분에 윤을 많이 비춰보았고 덕분에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주치는 지인들이 윤을 궁금해합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관계에서 편지를 썼다는 점에 궁금해합니다. 이제는 친해졌는지. 말은 서로 놓았는지. 만나면 뭐 하고 노는지 등등을 질문합니다. 감정에 여전히 무딘 저는 친해졌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어요. 가끔 산책하고 웃긴 표정의 새 사진을 주고받고 요즘 스케줄을 공유하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영향을 끼치는 게 서로 아무렇지 않은 사이는 친한 사이인 걸까요? 애매모호한 맛을 가진 저는 친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해야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게 늘어납니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아무거나 막 집어 먹어서는 안 되며 지갑을 지키기 위해 지름신에 눈이 뒤집혀서는 안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켜야 하는 게 많아진 만큼 늘어납니다. 나이가 늘어나는 만큼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걸까요? 한 1분간 내가 지켜야 하는 게 뭔지 생각해 봤는데요. 그렇게 대단치 않은 것뿐이었습니다.


새삼 어른의 경계에 대해 생각이 듭니다. 아이는 왜 순수를 지켜야 하고 어른은 왜 철듦을 지켜야 하는 걸까요. 아이는 철들면 안쓰럽다 하고 어른은 순수하면 안쓰럽다 할까요.


그래요. 뭐. 어차피 지켜야 할, 가지고 있는 순수도 철듦도 별로 없는데 하지말기보다 하고 살기로 합시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대로요.


그럼 또 윤이 그러겠죠. “전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전 기다리는 걸 합니다. 망고를 먹자고 하면 먹고 걷자고 하면 걷고 말하면 들으면서 기다립니다. 내가 기다리고 싶은 대로 기다리고 있어요. 






오픈 결말 이야기는 어떤가요? 예전에는 어떤 사정을 가졌든 스토리에 나오는 인물이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맞이하는 게 마음이 편했습니다. 어떻게든 결말은 났기에 그걸로 그 인물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오픈 결말이 좋아집니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면 너무 아쉽잖아요. 아니, 뒤의 이야기를 알려달라는 게 아니라요. 제가 이제까지 봐오고 겪어왔던 인물의 스토리를 토대로 마음껏 상상을 펼쳐보려 합니다. 가끔 윤을 마주치면 이렇게 지낼 거로 생각했다며 들려줄게요.


윤도 알다시피 이해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려면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러 분야를 공부했고 읽었고 특히 사람론에 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는 걸 알았죠. 그것은 여유입니다. 그리고 먼저 주는 것입니다. 내가 여유가 없고 내가 줄 것이 없으면 음흉한 의도를 품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음흉하기 싫어서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직 손을 내미는 것에 걱정과 고민과 근심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편지를 써가면서 확실하게 안 것이 있습니다. 제대로 손 내밀 여유가 없었던 거구나 하고요. 그렇기에 섬세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오히려 잡는 형상이었던 거죠. 그렇기에 거울처럼 반사만 하고 있는 겁니다. 거울에 비친 상대의 손이 내 손이라고 착각했죠.


살면서 여유를 동경해 본 적은 없습니다. 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일이 많은 게 저에겐 워라밸이고 시간에 쫓기며 바쁜 게 즐거웠습니다. 근데 이것이 여유가 없어 하는 변명이었고 이제까지 외면했다는 걸 인정해보려 합니다. 이제는 여유를 동경하고 여유를 가지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도 윤에게도 좋은 이해를 끼쳤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다시 한번 윤에게 말을 걸 때가 왔군요. 이번엔 감정의 바다에 가라앉아 있으려는, 감정의 바닥을 치고 올라오려는 음흉함 없이요.


“우리 편지 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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