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이아 Jul 21. 2022

익숙해서 잃어버린 것이 있나요?

아홉 번째 편지

봄의 우리와는 다른 여름이 왔습니다. 윤의 여름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저의 변화는 작년의 겨울의 것과 비슷해 기분이 썩 별로입니다. 도돌이표처럼 악보가 처음으로 돌아왔어요. 술에 미끄러져 떨어졌던 바닥이 나의 공간인 줄 알았는데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을 기억의 쓰레기장에 남겨두고 떠나듯 꾸역꾸역 기어 올라왔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인데 내가 가야 할 곳은 위였던 거죠. 앞으로도 나는 자주 미끄러지고 자주 올라오겠지만. 여러 빙봉을 버리겠지만. 나의 기억 쓰레기장은 아주 깊고 넓어서 다시는 똑같은 빙봉을 찾지 못할 겁니다.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축하 자리를 가는 건지 케이크와 꽃다발과 핸드폰과 파티용품으로 가득한 봉투를 이고 지고 탄 여자애가 있었습니다. 앉을 자리도 없고 손잡이를 잡을 손도 없어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어이쿠 어이쿠 흔들리고 있었죠. 바라보다 신경이 쓰여 여기나 앉으라지 흥! 하는 표정으로 자리를 내어줬습니다. 평소의 나라면 시선도 주지 않았을 텐데 윤을 따라 여럿에게 시선을 주었던 기억이 남았나 봅니다. 길을 가다 무언가 상황에 부닥친 사람을 발견하면 “괜찮으셔야 할 텐데.” 하는 윤의 목소리를 하도 들어서 이젠 안 봐도 자동 재생되거든요. 나에겐 나눠줄 사랑이 별로 없어 특정 몇에게만 부리던 오지랖이 조금씩 넓어갑니다. 내가 가진 사랑의 양은 똑같을 텐데. 얕게 많이 나눠주는 것과 깊게 조금 나눠주는 것이 고민입니다.


너무너무 더운 여름. 재작년과 작년에 이어 피냉면에 꽂힌 올해입니다. 차가운 음식이 맞지 않아 냉면을 피하고 살았지만 우연히 튀김만두와 함께 맛보곤 바로 여름철 꼭 찾아야 할 음식 베스트에 올랐습니다. 오늘도 너무 더우니 피냉면을 한 그릇 해야겠습니다. 가게를 들어가 피냉세트를 시키고 에어컨으로 더위를 식히며 앉아 있으니 곧 뻘건 피냉면이 나왔습니다. 윤도 꼭 기억하세요. 피냉면과 튀김만두는 세트입니다. 무조건이요. 바늘과 실보다 더 단단한 사이라고요. 뜨거운 튀김만두 반을 갈라 피냉면 국물에 살짝 적셔서 먹습니다. 피냉면도 후루룩 입에 넣습니다. 그러면 이곳이 천국이고 이대로 집에 가서 눕고 싶어요. 피냉면으로 잠깐의 더위와 허기를 달래고 에어컨이 아쉬워 시간을 끌었습니다. 주변에 혼자 식사하러 온 손님이 몇 있었습니다. 그중에 건강검진 보고서를 멍하니 쳐다보며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뒷모습의 여자분을 보았습니다. 이미 다 먹은 냉면 그릇이 그녀의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보고서는 표지를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안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듯 표지를 쳐다볼 뿐이었죠.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지만 상대는 받지 않는 듯했습니다. 힘없이 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그녀는 턱을 괸 채 건강검진 보고서를 봤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멍때리고 있던 걸까요.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집으로 잘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상대의 이야기에 관심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몸이 상대방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거 알고 있나요? 유명한 행동심리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말보다 더 많은 걸 전하기도 합니다. 바디랭귀지라고 하잖아요. 하이파이브는 동기부여를 주고 포옹은 친밀감을 주죠. 눈동자나 고개가 왼쪽을 향하면 과거를, 오른쪽을 향하면 미래를 생각하는 중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죠?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표현하잖아요. 윤의 동태눈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어린 왕자의 장미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가시를 내밀고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어린 왕자가 오기를 기다렸죠. 윤은 나쁜 맛이고 싶지만 죄책감과 감수성으로 결국 착한 맛인것 처럼요. 동태눈으로 된 유리 뚜껑을 누군가 들어올려 자신을 들여다봐 주기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윤에게는 또 어떤 맛이 있을까요? 재밌는 것을 맛있다고 표현하는 시대잖아요. 느낌을 맛으로 표현하고요. 윤에게도 나쁜 맛과 착한 맛 말고도 여러 가지 맛이 있다고 생각해요. 느물이 맛이라던지 오기 맛이라던지 망상 맛이라던지. 편지를 쓰고 있는 윤 맛이라던지.


가끔 하루에게 진 맛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은 카페를 가보고 책을 읽고 글을 써도 뭔가 해소되지 않은 찝찝함이 남아 있습니다. 그럴 때 윤 맛을 찾습니다. 그렇다고 이기는 맛은 없는 거 보니 역시 세상은 거대한 맛이고 나는 한 톨의 먼지 맛인가 봅니다.






어른과 아이의 조합은 성장물 드라마의 실패하지 않는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아이의 순수함을 배우고 어른의 노련함을 배우며 보여주는 둘의 케미는 참 흐뭇하죠. 책방에서 근무 중 젤리가 고파진 저는 잠시 안내문을 두고 편의점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엔 자전거 가게가 있습니다. 자전거엔 통 관심이 없어 자전거를 파는 데인지 수리하는 데인지 팔면서 수리도 하는 데인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가게 앞에서 자전거를 열심히 닦는 어른과 그걸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오래되어 보이는 자전거였고 무언가 노란 용액을 헝겊에 묻혀가며 닦고 있었어요. 아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손에 천 원짜리 몇 장을 꼭 쥐고 쳐다보는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죠. 자전거를 닦는 어른은 더운 날 민소매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모자를 삐져나온 머리칼까지 땀에 젖어 있었어요. 아이를 위해 자전거를 열심히 닦아주고 있구나. 멋있네. 하며 찬찬히 젤리를 사러 갔습니다. 오랜 고심 끝에 포도 맛 젤리를 고르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른과 아이 둘 다 자전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른은 아이에게 자전거 다루는 방법이나 부품 간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고 아이는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이며 똘망한 눈으로 자전거와 어른을 번갈아 봤습니다. 분명 저것은 작고 오래된 자전거입니다. 수리하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게 나을 수도 있을 정도로요. 수리할 부분이 마땅찮아 수리비가 비싸게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떤 사정으로 아이는 자전거를 고치고 싶어 했고 어른은 그 자전거를 땀 흘려가며 닦았는지는 모르지만 아이와 어른의 마주 보는 웃음을 보니 마음이 몽글해지더라고요.


어릴 적 토익학원 건물 꼭대기엔 영화관이 있었습니다. 하루 기분이 동해 인생 처음으로 학원을 무단결석하고 인생 처음으로 가는 영화관에서 가장 바로 시작하는 영화 티켓을 끊었습니다. <어바웃 어 보이>였습니다. 어른과 아이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성장하는 영화였죠. 나는 영화 속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이입하며 봤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했을 거예요. 때로는 공부보다 다른 곳에서 인생의 방향을 정하기도 하니까요.


상황의 감정에 이입해서 이야기에 빠져들긴 하지만 아직 내 것인 영화를 만나진 못했습니다. 그만큼을 보지 않아서일까요? 감정에 완전 이입하기보단 내 생황에 대입해서 보길 좋아해서일까요? 책에서도 종종 대입하는 상황을 만납니다. 물욕이 없는 제가 유일하게 과소비하는 항목은 책입니다. 혹시 보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책방에서 별 고민 없이 이책 저책 집어 드는 모습을요. “이아님은 진짜 책 좋아하네요.”란 말을 윤에게 듣고 생각해봤습니다. 나는 왜 책을 많이 살까. 나는 왜 책을 많이 읽을까. 어떤 책이든 책은 항상 나에게 무언갈 줬습니다. 영감이든 철학이든 사상이든 감동이든. 아무것도 주지 않은 책은 아무것도 없었죠. 그래서 책은 쉬이 삽니다. 요즘은 독립매거진에 손이 갑니다. 내 것이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저는 플롯이 확실한 그러니까 대중을 타겟으로 삼아 서사가 완벽히 꾸며진 이야기보단 있을법하지만 없을 이야기가 맘에 듭니다. 우리가 나누는 편지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콘텐츠를 좋아하죠. 그래서 여러 제약이 덜한 인디문화에 빠지지 않았나 싶어요. 솔직하다 느껴지거든요. 내 것이고픈 이야기도 많이 만나고요.






걱정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던데. 그렇다면 뭔갈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 아닐까요? 요즘 그런 생각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집니다. 단단히 아무것도 하기 싫어병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참 바쁩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커피도 마셔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죠. 여행도 가야 하고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 파티도 즐겨야 하고 산책도 가야 합니다. 그 와중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화내기도 하고 삐지기도 합니다. 참. 바빠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병은 큰 반향을 일으켜 우리가 바쁜 것보다 더 바쁘게 사는 생활을 만들었습니다. 메모해놓은 무수한 아이디어 스케치 중 실체화되는 건 몇 가지 없거나 하나도 없을 수도 있지만요. 그래도 역시 늘어져 있는 것보다는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게 적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싫어병에 걸렸을 때는 경마 영상을 많이 봤습니다. 종일 보고 틈만 나면 보고 새벽 내내 보기도 했죠. 말이 달리는 모습을 보며 나도 달리고 싶어진 걸까요. 결승점을 통과하는 건 몇 번 생각마일까요? 생각마가 뇌 속 레일을 달리면서 관련 정보를 찾아보느라 경마 영상은 자연스레 잊혔습니다. 생각을 달리고 있는 나와 달리 몸을 달리고 있는 윤이 생각났죠.





싫어병으로 틀어진 시간을 돌리기 위해 일찍 일어나기 연습을 했습니다. 평소의 기상 시간보다 한 시간씩 한 시간씩 매일 조금씩 앞당겨서 일어나는 거죠. 몸이 잠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매일 조금씩 잠이 드는 시간도 일러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지런한 어른이가 되었나 싶었더니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평소엔 3시에 잠들었다면 요즘은 3시에 일어나게 된 거죠. 평소엔 8시에 일어났다면 요즘은 8시면 잠이 드는 거죠. 나도 모르게 잠들고 나도 모르게 눈을 떠 바깥이 깜깜한 새벽. 모두 잠이 들 때 나 혼자 시작하는 깜깜한 하루에 자주 해야 할 것을 놓치곤 합니다. 시간이 늦어 연락을 못 했다면 시간이 늦어 답장이 주저해지고 시간이 늦어 갈 곳이 없었다면 시간이 늦어 갈 수가 없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건 지난 하루를 몽땅 날린 기분이라 해가 뜰 때까지 멍때립니다. 뭐랄까. 자느라 놓쳤던 밤과 새벽을 아쉬워하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결국 다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사람마다 수면에 적합한 시간이 다르다고 하던데. 저는 3시에 잠들고 8시에 일어나는 적합함을 가졌나 봅니다.


사람은 적합한 수면 시간이 다른 만큼 각자 체력이 다르잖아요. 그렇다는 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다르다는 걸 겁니다. 상처를 이겨내는 힘도 사람마다 다르게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타고난 기저가 달라서 어떤 사람은 가볍게 털어내고 어떤 사람은 가라앉는 걸까요? 지나간 경험이 풍부해서 이러다 말겠지를 알기에 두렵지만 도전하고 사무친 경험이 강렬해 무서워서 다시는 이겨내지 못할까 봐 몸을 사리는 걸까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뭘까 찾아봤습니다. 누군가는 불안이었고 누군가는 원망이었으며 누군가는 희망이었고 누군가는 선례였습니다.

 

옛날부터 비밀리에 온라인으로 블라인드 야매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전문적인 걸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은 "그렇구나."가 전부죠. 대부분은 관계의 고민을 가지고 옵니다. 상담소를 오픈했던 건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는데. 그렇구나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답답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세상엔 정말 답답한 사람이 많구나. 내가 아무리 나아가보라고 해도 하나도 나아가지 않으면서 계속 답답한 소리만 하는 사람이 많구나. 운영에 지쳐 슬슬 영혼 없는 그렇구나가 지속될 때쯤이었습니다. 한 분이 오랜만에 들렀다며 나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몇 번의 이야기로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지만 덕분에 마음은 나아졌다고. 앞으로는 조금씩 나아가볼 희망을 품게 됐다고요. 그 이후로도 여러 사람에게 종종 고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야매 상담소는 아직 24시간 늘 열려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가 아닌 그렇구나를 말해주기 위해서요.


누군가에게 필요한 힘은 불안, 원망, 희망, 선례에서도 나오겠지만

누군가의 그렇구나에서 나오는 거 아닐까 싶어서요.






글이나 그림 같은 표출은 단지 수단이라고 쓴 글을 봤습니다. 나의 가치관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나의 가치관은 뭘까요. 즐거운 일을 함께하는 것.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생각해보면 나의 가치는 '함께'입니다. 표출의 시작은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워서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너의 이야기도 당신의 이야기도 궁금해졌습니다.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은 휘발성이 강하니 그걸 남기고 싶어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쓰든 너가 너의 이야기를 쓰든. 활자 중독자에 글 덕후인 나에게 딱 맞는 일이었죠. 그러다보니 말은 누군가 들어주길 원해서 한다는 거고 글은 누군가 읽어주길 원해서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다 자리를 마련하거나 책을 만들거나 했습니다. 내 이야기할 틈이 없이 상대방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죠. 아주 마음에 듭니다. 편지를 쓰는 일도 아주 마음에 듭니다.


생각하는 건 꾸며진 상처를 자주 만난다는 겁니다. 대부분이 자신을 다독이며(혹은 합리화하며) 상처를 꾸밉니다. 겉을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고 속을 쿨하게 채우기도 합니다. 상처가 안 날 순 없으니 잘 보듬는 걸까요? 상처가 났으니 일회용 밴드를 붙이는 걸까요? 반창고를 만든 아저씨는 알았을까요. 사람들이 이걸 마음에 붙이고 살 거란 걸.


지금 떠오르는 솔직한 한마디를 적어주세요. 라는 말에 떠올려봤습니다.

“나를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너다.”


사람이 말을 하는 건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서고 사람이 글을 쓰는 건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서라는 나의 입버릇이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윤의 이야기를 듣고 윤의 글을 읽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내가 필요한 게 윤이지 않을까. 나는 들을 이야기가 필요하고 읽을 글이 필요합니다. 윤은 한정된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게 아쉽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 끄집어내려는 거 보면 윤의 병에 담긴 물의 양은 상관치 않고 마지막 물방울 하나까지 털어내려는 거 아닐까 싶어요. 설령 다 털어냈다 하더라도 무언가 남았을 거라며 병을 탈탈 텁니다. 마술에 쓰이는 병처럼 속에 비밀의 문이 있어서 나도 모르고 윤도 모르는 물이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에 말이죠.


그것은 솔직한 맛일까요 아니면 꾸며진 맛일까요. 가끔 그것에 지나친 집착을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합니다.


보이기 싫은 모습을 보였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음 뭔가 민망하거나 낯부끄러울 때 말이죠. 내가 그 모습이 싫은 게 아니라 상대방이 나의 그런 모습을 기억할까 봐 싫은 그럴 때 말이죠. 궁금해서요.






누군가가 도와줬으면. 누군가가 구해줬으면. 하고 바란 적 없나요? 나를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해 줄 제삼자 제사자가 나타나길 바란 적이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망상인 대빵 부자 산타 할아부지가 나에게 와서 1억만 주고 홀연히 사라졌음 좋겠다는 그런 거죠. 흔히 하는 망상인 내가 두 명이어서 다른 한 명이 내가 자는 동안 해야 할 업무를 후루룩 딱딱 해치워줬음 좋겠다는 그런 거죠.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내 상황이 부정적일 경우 사람들은 나에게 너가 할 수 있다며 너가 하면 되는 거라며 남 탓이나 세상 탓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뭐 그래요. 내가 다시 정신 차리고 똑바로 서서 허리 펴고 내 갈 길을 가면 되죠. 그런데 말이죠. 내가 남들과 다른 상황에 처한 게 내 잘못은 아니라면서 왜 남 탓은 하면 안 된다고들 할까요? 내 탓도 아니고 남 탓도 아니면 도대체 누구 탓이죠? 그냥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 그냥 그렇게 살아 먹으면 되는 걸까요? 내 잘못이 아니라면, 적어도 내가 일어서기 위해서 조금의 위로가 필요하다면, 남 탓을 좀 하면 어때서요. 넘어졌을 때 “어이쿠! 내 다리가 꼬여서 넘어졌네. 앞으로는 안 꼬이게 잘 걸어야지.”보다 “돌부리때문에 넘어졌네. 이런 돌부리!”가 조금 더 속 시원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바닥을 잘 보고 걸어야겠다는 똑같은 결론을 내더라도요. 속이 좀 시원하잖아요. 윤은 어떤가요? 윤도 조금 남 탓을 해보면 어떤가요. 내 걸음걸이가 이상해서 넘어졌더라도 가끔은 그래보면 어때요?


어차피 내가 바란다고 해서 돌부리가 저절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진 않잖아요.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겠죠. 에잇, 이놈의 돌부리. 너 때문에 오늘도 넘어졌잖아!


이건 정말 정말 비밀 이야긴데요. 윤의 필요시 약을 훔쳐먹은 적이 있었잖아요? 그와 비슷한 짓을 이미 학생 때 해봤습니다. 왜 그런 요상한 짓을 했냐 물으면 호기심이 많았다고 합시다. 그 친구가 가지고 있던 건 수면제였고 불면증에 시달려서라기보단 수면제를 가지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사랑해서였습니다. 보살핌을 원했고 보살핌에서 사랑을 느꼈으며 그 사랑은 자신이 수면제를 먹고 있는 것에서 나온다 생각했죠. 궁금했습니다. 왜 하필 수면제일까. 수면제를 먹으면 어떤 느낌이기에 저런 마음을 가졌을까. 쉬는 시간 그 친구 자리에 놓여있는 수면제를 보고 그냥 삼켰습니다. 아주 잘 잤죠. 잘 자고도 너무 졸아서 수업 시간 교실 뒤에 서서도 졸았습니다. 그렇게 졸고도 그 친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물어봤습니다. 자신은 작고 나약해서 항상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작고 나약하면 보살핌이 필요하냐 물었더니 자신이 자신을 보살피는 방법을 모른다 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파괴하는 건 자신이구나. 그건 단지 파괴 하는 법밖에 몰라서구나. 이 친구와 돌부리 탓을 하자는 이야기를 나눴다면 어땠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대빵 산타 할아부지가 돌부리를 치워주길 기다리고 있을까요?


수면제도 필요시 약도 훔쳐 먹지 않았지만 더위는 많은 비밀 이야기를 하게 합니다. 저는 뱉기보다 삼키는 말이 많습니다. 이렇게 많이 뱉는 만큼 그렇게 많이 삼키는 거죠. 기다리고 참는 것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굳이 말을 삼키는 특기를 취미로 하고 싶진 않습니다. 몰래몰래 뱉습니다. 변하는 것에 무서움이 있습니다. 제 생활반경이 크지 않은 것에도 이유가 있죠.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건 좋아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좋습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걸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 책도 그런 이유를 포함해서 좋아합니다. <이것도 그릴 수 있을까> 책이 생각납니다. 작가는 새로운 곳에 가거나 새로운 것을 하는 건 싫어하지만 새로운 것을 그리는 건 좋아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언제든 내가 잘못된 점은 인정하고 고칠 수 있고 성장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혀 나아갈 수 있지만 너가 잘못된 점을 인정하고 고치고 나아가서 변해버리는 게 두렵습니다. 만약 너가 아프다면 아픈 상태로 만약 너가 행복하다면 행복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내가 늘 삼키는 말입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다른 대인 관계의 프로토타입이기 때문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윤의 경우를 물어보기 전에 나의 경우부터 생각해 봤습니다. 나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였고 그만큼의 극진한 보살핌과 그만큼의 커다란 제지가 있었죠.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그러려니 하는 천성이 많이 작용했죠. 물론 이 또한 유전이 작용했겠죠. 부모님의 다면 중 하나인 그러려니가 나 세대에 뚜렷한 면이 됐다는 느낌입니다. 부모님은 섬세했고 베풀었고 나는 그러려니 하며 받기만 했죠. 섬세하지 않고 베풀지 않았어도 그러려니 했을 겁니다. 아기의 유형을 여러 가지로 나누는데 눈앞에 부모가 없으면 우는 아기가 있는가 하면 눈앞에 부모가 없어도 지 할 거 바쁜 아기가 나였거든요. 여하튼 누군가의 당연한 사랑이 프로토가 되고 나의 천성인 그러려니가 그대로 남아 커서도 누군가의 애정을 그러려니 하며 당연시 여겼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나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 것에 물음표가 생겼죠. 나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수천수백 가지가 있는데 말이죠. 나는 하나씩 그 이유를 직접 물어가며 터득했습니다. 다행히 그러려니가 잘 작용해서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었죠. 가끔 잘 납득할 수 없는 경우에는 아프기도 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리셋되는 뇌와 그러려니의 천성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까지 두고두고 힘들어했을 수도 있겠죠.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알게 된 건 부모님과 독립한 후부터였습니다. 바로 알게 되진 않았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중입니다. 알잖아요? 보고 익힌 대로 대가 없이 손 내밀고 살다가 이게 내미는 건지 잡는 건지 모르게 되었다는 거. 우리 같이 편지로 봤잖아요. 겪으면서 생각하는 건 프로토는 프로토일 뿐이고 나만의 관계를 대하는 방식이 생긴다는 겁니다. 아마 저는 한 발만 걸친 채로 말을 삼키는 것이겠죠. 윤은 어떤가요? 어떤 프로토타입을 거쳐 지금의 방식을 가지게 되었나요? 나는 홍제천을 그대로 가려던 윤이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말을 삼키고 새로운 산책을 가자는 윤을 따라가 봅니다. 어떤 맛일지 호기심이 들거든요.


편지를 쓰고 있어서 그런지 다른 이의 편지글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응원을 위해 쓰는 편지도 있고 위로를 위해 쓰는 편지도 있는 등, 편지를 받는 이를 위한 마음이 듬뿍듬뿍 느껴집니다. 조금 더 윤을 생각하며 편지를 써야겠다 반성했습니다. 잘 물어보고 병을 잘 털어야겠다 생각했죠. 윤을 애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 윤맛이 익숙해지려다 보니 잠시, 아주 잠시 익숙함에 속았거든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걸 잃지 말자는 말 알고 있나요? 흔하게 쓰이고 흔하게 감동을 주는 말입니다. 저는 저 말이 조금 의문입니다. 익숙한 것은 과거의 것이고 소중한 것 역시 과거의 것입니다. 현재도 언젠가 과거가 됩니다. 그럼 현재는 언젠가 익숙해집니다. 그렇다면 결국 현재가 소중하다는 거 아닐까요. 왜 지나간 익숙한 과거만 소중한 것이 되는 걸까요. 현재와 순간을 사는 나는 약한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줄로만 알았던 윤의 모습과 익숙해지니 보였던 결국 자신을 위한 배려를 하는 윤의 모습은 내겐 같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단지 내가 몰랐던 걸 알게 되었을 뿐이지요. 오늘은 비밀을 쏟는 날이니 이것이 내가 먹었던 하나의 럼초코라고 밝히겠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작은 성취에 관해 말합니다. 성취감은 의욕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에 작은 성취감으로 작은 의욕을 만들고 그것을 쌓아 큰 의욕으로 이어 큰 성취감을 맛보라고 말이죠. 의욕의 필수조건은 자신감입니다. 이거 해볼 만한데? 라는 자신감이 있어야 의욕이 생긴다는 거죠. 그 자신감은 이전에 받았던 해냈어! 라는 성취감(만족감을 포함한)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성취감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걸까요? 무언갈 행하는 의욕이 있어야 행하고 성취를 얻는데 과거의 성취가 있어야 의욕이 생긴다는 무한 루프에 빠지게 되죠. 그래서 주로 아침 이불 정리를 말합니다. 별거 아닌, 쉽게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작은 성취를 갖자는 겁니다. 저도 몇 가지 리추얼을 행하고 있습니다. 저녁 일정 시간 동안 글쓰기나 이동시간에 핀터레스트를 보며 정리하기, 아침에 뉴스레터를 보고 메모하기, 하루에 물 마시고 체크하기 등의 작은 도전들이죠. 윤이 하는 러닝도 일종의 리추얼이고 성취감을 돋아주는 존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타이틀을 붙이니 뭔가 어색하지만요. 여하튼 나는 윤이 작은 성취를 얻어보길 원했습니다. 자신은 의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윤의 말에, 작은 성취부터 맛보게 하면 조금씩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죠. 이불 정리는 충분히 좋은 방법이지만 윤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혼자 끙차끙차 하는 것보단 누군가에게 보이는 성취를 얻었으면 했습니다. 약간의 강제성이 필요했다는 말이죠.


맞아요. 그것이 편지였습니다. 나는 윤을 모른 채로 편지를 시작했지만 기저에는 저런 생각이 깔려있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만들려고 했죠. 중간에 편지를 놓아버리지 않아 고맙습니다. 중간에 나와 산책해주어 고맙고 중간에 테스트북 판매를 도와주어 고맙습니다. 테스트북은 정말의 테스트의 의미이자 윤에게 작은 성취감으로 이어지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성취감도 살짝 바랐죠. 어땠나요? 매일 이불을 정리한 만큼의 성취감이 있었나요? 그랬다면 앞으로의 편지도 잘 부탁합니다. 윤이 러닝을 하며 얻는 희열감을 편지를 쓰면서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모남에 익숙할 윤도 잘 부탁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