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편지
궤도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윤이 알려줬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마치 우주처럼 무한히 창조된 이 땅바닥이라고. 솔직히 어디가 우주이고 어디가 바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단 이끄는 대로 있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돌아가야 할 집도 돌아가야 할 행성도 모두 몽상 속에서 존재할 뿐 내가 있는 이곳이 순간이고 현재일 겁니다. 아무렴 어떤가요.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곳이 있고 펑펑 울어도 괜찮은 곳이 있으면 된 거죠. 그곳이 어딘가의 이불 속이면 된 거죠. 이번 편지의 시작은 어쩐지 윤의 말투를 따라 하게 됩니다. 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일까요. 윤의 글을 퇴고하다 보니 글투가 옮아버린 걸까요.
윤이 홍제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을 때 나의 추억이 묻어있는 곳은 어디일까 생각해봤습니다. 나고 자란 곳은 부산입니다. 오랜 짝사랑을 포함한 몇 기억이 있지만 아련하진 않습니다. 연극을 좋아해 혜화에 늘러붙어 살았을 때도 즐거웠고 인디밴드를 좋아해 홍대 언덕길에 늘러붙어 살았을 때도 즐거웠지만 아련하진 않습니다. 기억이 묻어있는 장소를 우연히 들렀을 때 예전 기분이 돌아오는 경우가 있지만 잠깐입니다. 기억력이 나빠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기 때문은 아닙니다. 감정에 무뎌 상황에 사무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문득 드는 생각은 장소가 아닌 사람에 추억이 묻어있을까 싶습니다. 마치 자주 갔던 가게가 없어지는 걸 보며 그 가게가 그리운 게 아니라 그곳에서 함께 했던 사람이 그리워졌다는 문구처럼 말입니다. 학교를 빼먹고 바닷가를 함께 뛰어놀았던 친구가 아련해지듯이요.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가 아련해지듯이요.
“언니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아요?”란 질문을 받았습니다. 때때로 바에서 마주쳐서 저에게 타로를 봐달라고 했던 친구였죠. 우연히 만나게 되면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고 덤으로 타로로 위안도 받게 되니 바에서 나를 마주치는 게 즐겁다고 했습니다. “음.. 편지를 나누는 사람이 있어요.” 대답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윤이 아련해질까요. 이 편지를 보며, 이 책을 보며 컨트리로드를 읊조리게 될까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윤에게서 빈 캔의 위로를 받는 나는 ‘아무것도 없진 않아요!’라고 새로운 맥주캔을 내밀어봅니다.
북페어를 다녀왔습니다. 어딘가 윤을 닮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스쳐 지나가는듯 하더니 다시 다가와서 한참을 나눴습니다. 어딘가 윤 같고 어딘가 나 같아서 편하게 여러 말을 뱉었습니다. 윤과 나누는 편지 이야기도 하고 그의 책 이야기도 하며 팔에 있는 타투라던가 먹고 사는 이야기라던가 다음에 쓸 글이라던가 말입니다. 처음 만나는 작가님에게 항상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책을 쓰게 되었나요? 작가님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윤의 세계가 궁금해서 편지를 쓰자고 했듯이요. 어딘가 분위기가 익숙한 그는 예전부터 글로 힘듦을 표출하는 사람이었다 했습니다. 표출한 힘듦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고 많은 이가 공감과 사랑을 주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먼 곳에서 진행하는 페어였고 가는 길이 고단했고 얼른 마포구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그가 쓴 책을 많은 이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음에, 그 자리에서 마주칠 수 있었음에 참가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글, 쓰길 잘했네요.”라고 그에게 건넸던 나의 말은 참가하길 잘했네요, 나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와 윤이 마주치면 좋았겠다 생각도 하면서요.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그와 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바라봅니다.
북페어는 요상한 매력이 있습니다. 단순히 책을 파는 행사를 넘어 독자와 마음을 나누고 함께 참여한 작가와 생각을 나눕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크게 없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가져온 책을 다 팔면 누구 할 것 없이 박수로 축하해주고 서로 책을 나누기도 하며 영감의 소재를 얻기도 합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벌이기도 하고 정말 친구가 되기도 하죠. 말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윤도 꼭 직접 겪어 보았으면 합니다. 이불을 쓰고 온다는 윤이 귀여워서 한참 웃었습니다.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이불을 만나게 될까요? 책을 들고 이 이불이 윤입니다. 라고 소개할 상상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오늘은 먼 길을 다녀왔으니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습니다.
허리가 큰 바지들이 몇 있습니다. 직접 가는 쇼핑이 귀찮아 온라인으로 사고 나서부터 생겼습니다. 수선을 맡기자니 비싸고 몇벌 안되는 옷 살림에 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다른 이의 쇼핑은 잘 따라나서는데 제 쇼핑엔 별로 욕심이 없습니다.) 요술단추라는 것이 있어 찾아보니 바지 단추 위치를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추 색상이 은색이나 금색 등 삐까뻔쩍한 색상만 있어 제가 가지고 있는 슬랙스에는 어울리지 않았죠. 옷핀으로 허릿단을 접어 찌르자니 찌른 자국이 남을 테고. 허리띠를 하자니 영, 여어어엉 허릿단이 우글해진 모습이 복주머니를 입은 모양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유튜브를 뒤져봤더니 허리띠를 고정하는 끈에 단추를 통과시켜 지퍼까지 당겨서 잠구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저게 된다고? 오, 됐습니다. 허리 크기도 딱 이었죠. 당겨진 단추 때문에 지퍼 부분이 접혔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뭔가 삐뚤어진 지퍼가 마치 체스 말 비숍의 동선을 닮았습니다. 나는 단추 위치를 배꼽에서 살짝 옆으로 두어 일부러 삐뚤어진 모양을 눈에 띄게 두었습니다. 바닥에 질질 끌리던 바짓단이 복숭아뼈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습니다.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복숭아뼈에 닿는 기분이 어색했지만 삐뚤어짐이 준 어색함이라 생각하니 그것마저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는 온전한 바지 길이를 찾기 위해 지퍼를 불온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잘 보인다고 했었잖아요. 빛 속에서 그림자가 더 잘 보이듯이요. 그렇듯 불온전함은 온전함 속에 있어야 더 잘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하지만 사랑스러운 불온전함이요.
어쩌면 터득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나에게는 ‘약자'의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답답해하고 왜 할 말을 못하고 사느냐 등을 떠밀고 쓸데없이 착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는 모습이 나와 어울린다는 것을요. 그런 모습이어야 그나마 모든 관계에서 한 발이라도 걸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을요. 나의 약한 모습은 나를 포함한 아무에게도 익숙지 않은 모습입니다. 어떤 모습일지 저도 상상이 어렵네요.
모든 사람이 좋다고 평하는 사람은, 많은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아닌 내가 프레임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며칠 전부터 골똘히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결국은 가면이라고 했던 윤의 편지에서 출발했습니다. 모든 가면은 윤의 인격이라는 것, 상대에 맞춰서 만들어진다는 것. 모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자신이 만들어낸 겁니다.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던져버리면 됩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에 가엾다면 저의 지나친 생각이겠죠.
윤의 눈이 동태의 것으로 보인다면 왜 사람들은 윤과 함께 있고 싶어 할까요? 아깝다고 표현할까요? 풀리지 않은 의문입니다. 윤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정말 뜬금없는데요. 간혹 보여주었던 윤의 랩 하던 시절의 영상이 생각납니다. 멋있어요. 아주요.
소리를 뱉으며 말하는 사람이 있고 삼키며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타고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뱉으며 말하는 사람과 잘 맞지 않습니다. 삼키며 말한다는 게 기어들어 가는 소리와는 다른데. 뱉으며 말한다는 게 당당하다는 것과는 다른데. 정확한 표현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어렵네요. 나중에 더 알맞은 표현이 떠오르면 전달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뱉는 사람은 수다스럽고 그들이 관철해온 생각을 전하길 좋아합니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하고 굳이 한마디를 더 합니다. 그들은 상대의 마음에 느낌표를 심어주는 걸 좋아합니다. 진심이겠죠. 진심으로 느낌표를 심어주고 싶은 거겠죠. 그래서 싫습니다. 그 진심은 너무 올발라서 삐뚤어진 내가 견딜 수 없는 걸까요.
사람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알아달라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것에 취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로 인해 오해가 생길 수도 문제점이 생길 수도 상처가 생길 수도 있죠. 분명해야 할 것은, 알아주는 사람 역시 알아달라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신이 너를 이해하고 위하고 있음을 알아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소리를 뱉으며 진심으로 느낌표를 심어주는 겁니다. 자신을 따르며 알아주길, 자신을 올려다보며 알아주길, 자신에게 역시!라며 알아주길, 자신을 사랑하게 되길. 그래서 나는 화가 납니다. 서로 알아주고 알아달라는 관계는 느낌표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효과가 센 약을 먹은 것 처럼 뇌리에 남을 순 있을겁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느낌표를 주었잖아? 어맛, 저건 진심이 담긴 느낌표야! 하면서요. 너무 진심이라 너무 반짝거려서 너무 화가 납니다. 그들은 자신이 알아달라는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로 느낌표를 심어줍니다. 그렇게 성립된 관계는 어느 한 쪽이 느낌표를 마침표로 바꾸게 되면서 끝이 납니다. 그때는 인지하게 됩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고 알아달라는 사람이었구나.
그들의 진심은 제법 믿음직해 보이기에 나는 많이 속았습니다. 나 뿐만은 아닐 겁니다. 많은 이가 그 느낌표에 취합니다. 이제 나는 그것이 부담스럽기에 느낌표를 쉼표로 바꾸어 다시 그 사람에게 돌려줍니다. “그래, 어이구 다 컸네, 잘 자랐네, 고맙다,” 이것은 나의 괴롭힘입니다. 함부로 느낌표를 남발한 것에 대한. 그러고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이방인의 위치에서 관찰합니다. 화가 나지만 상황에 끼어들려 하지 않습니다. 오해가 생기고 그것을 풀면 사이가 더 돈독해진다고 하던데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 느낌표들이 부담스럽거든요.
내리는 빗속에 서 있을 때 큰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 함께 비를 맞아주는 사람, 우산을 빌려주는 사람 등이 있죠. 하지만 아무도 내리는 비를 멈추게 하진 못합니다. 그러니 제발 우산 속에선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함께 젖으니 똑같아졌다는, 이걸로 너만의 우산을 만들 방법을 찾으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뱉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너도 우산이 없구나. 나도 없는데. 그럴 수도 있지 뭐. 했으면 좋겠습니다. 좋겠을 사항이 아주 욕심적이네요.
이 부분은 나의 격한 감정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윤에게 똑바로 전달되지 못하겠군요. 불찰입니다. 여러 번 제대로 써보려고 했으나 마음이 먼저 튀어 나가고 말려주는 윤이 없으니 제멋대로 글이 써지는군요. 많은 오해가 생길 글입니다. 제가 아직 성숙하지 못함에 미안합니다.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가 몇 편 있습니다. 하나는 볼 때마다 다른 등장인물의 찌질함에 동감하게 되는 <클로져> 그리고 <버스,정류장>입니다. 너무 어렸을 적 봐서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 재섭의 "인간은 왜 꼬박꼬박 살아야 하지? 띄엄띄엄 살 수는 없을까? 한 일 년쯤 살다가 또 한 일 년쯤은 죽는 거야. 그러면 사는 게 재미있지 않을까? 아니면 한 일 년쯤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사는 거야. 어차피 우리는 비슷한 인생이잖아." 대사는 기억에 남았어요. 클로져의 "헬로 스트레인저."도 비슷하게 말이죠.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다들 자신을 살고 있지 않다는 거네요.
제 생활반경은 넓지 않습니다. 일상 루틴의 큰 변화를 좋아하지도 않죠. 몇 시엔 어디쯤 있겠군. 여기에 없으면 저기에 있겠군. 하는 동선이 예측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가는 가게는 주로 바 테이블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익숙한 사람과 새로운 사람을 동시에 우연히 만나게 되는 곳이죠. 그래서 즐겁습니다. 즐겁다고 표현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내가 느끼는 기분은 즐거움이니까. 즐겁다고 하겠습니다. 윤의 편지를 읽고 ‘내가 비어있기에 타인으로 채우려는 게 아닐까?’로 생각이 고정되었습니다. 내가 내미는 손이 사실은 이 손을 잡으라는 게 아닌 이 손 좀 잡아달라는 거라던 나의 말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채우면서 만족했던 걸까요. 그러면서 그것이 다 나라고 착각했던 걸까요. 어쩌면 다른 이의 이야기로 책을 만드는 게 재밌었던 것도 바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던 것도 내 이야기를 할 게 없었던 것도 텀이 생기면 누군갈 찾아 나서는 것도 내가 쓴 에피소드에 항상 남이 등장하는 것도 모두 타인으로 살았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고찰은 전부 남에게서 온 것이고 나의 감정은 모두 다른 이의 것을 흉내 낸 것입니다. 물론 그것들이 쌓여서 나로 이루어진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남으로 채워야만 쌓아지는 나의 생각과 느낌이란 걸 지울 수 없습니다. 결국 내가 내미는 손은 너를 잡아주기 위함이 아닌 너의 살아있음을 잡고 싶다는 욕심일까요.
이곳은 평온한 거미굴입니다. 나는 눈과 다리가 8개씩 달린 거미입니다. 여러 익숙한 곳에 거미줄을 쳐놓고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미줄을 기웃거리는 먹잇감이 나타나면 거짓말을 하고 비밀을 쥐여주어 공범자로 만들죠. 거미줄을 얼기설기 만들어 어느 것이 자신의 선인지, 어디를 넘어야 선을 넘은 것인지 헛갈리게 만듭니다. 하나를 넘으면 자연스레 하나를 더 넘고 두 개를 취하면 자연스레 두 개를 더 취하게 해 먹잇감을 돌돌 감습니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긍정적여 보이는 나의 모습은 그 사람을 돌돌 감아놓은 욕망고치이지요. 그렇게 나는 고치를 만들어 먹잇감을 어둠 속에 가둬버립니다. 먹잇감을 이해하고 먹잇감을 사랑하면서 말이죠. 똑똑한 사람이라면 내가 아주 거짓말을 잘하는 거미라는 걸 눈치챘을 겁니다. 비밀을 쥐여주는 순간 동조하지 않고 내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떠나겠죠.
이곳은 조용하고 평온한 거미굴입니다. 여러 익숙한 곳에 거짓으로 점쳐진 거미줄을 풀고 먹잇감이 비밀을 주워 나의 공범자가 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눈과 다리가 8개씩 달려 거울인 척 상대의 기분을 잘 반사해내는 거미입니다.
윤은 항상 안 된다고 한 적이 없어서 많은 말을 털어놓게 됩니다. 편지는 ‘저는'으로 시작하는 말이 많습니다. 그것이 습관 되어 가끔의 대화에서 ‘저는'으로 시작하는 말이 많아지게 됩니다. 순간을 연습했던 감정이 점점 현재가 되어 갑니다. 연습이 이렇게 빨리 실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감정에, 그것도 감춰놓았던 부정적인 감정들에 익숙하지 않아 붙잡아도 보고 다시 삼켜도 봤지만 이미 뱉어버린 천둥번개는 비로 번져갑니다. 무서우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뱉지 않은 척 우산을 써야겠습니다.
우린 근 한 달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많은 일이 있겠죠.
적당히 눈을 뚫고 입을 뚫은 가면으로
적당히 뺨을 뚫고 이마를 뚫은 가면으로
적당히 생각을 뚫고 마음을 뚫은 가면으로 대해지는 관계가 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