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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Dec 23. 2022

멍때리며 살기에는 크리스마스더라고요.

네 번째 답장

안녕하세요. 유로파. 꽤 시간이 지났네요. 그동안 저는 강제 백수가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힘든 상황이 지속되었고 그 끝에 백수라는 결과가 나왔네요. 하지만 아직 전 회사와 연계된 일이 남아있어 무일푼 노동을 하루에 잠깐씩 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입니다. 백수가 되고 일주일은 잠깐의 업무를 제외하고는 현실에서 회피했습니다. 미뤄두었던 영화나 드라마도 몰아 보았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게임도 즐겼습니다. 콘텐츠 속 캐릭터에 몰입해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저 삶이 내 삶인 듯 피해버렸습니다.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기에 로코만큼 좋은 장르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수많은 로코를 봤습니다. 그러다 잠깐 의문이 들었죠. 로코에선 달리는 장면이 꼭 나옵니다. 달리는 마음을 달리는 모습으로 표현한 걸까요? 그 모든 달리기는 무엇이든 일을 만듭니다. 달리는 마음을 더 달리게 하든 달렸던 마음을 멈추게 하든이요. 유로파는 무언가를 위해 달렸던 적이 있나요? 얼마부턴가 전 멈추기만 합니다. 달려야 앞으로 가든 방향을 틀든 할 텐데 계속 제자리만 맴돕니다. 어느샌가 여기가 제 자리 같기도 하고요.


계속 뻔한 스토리를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상은 복잡한 일뿐이지만 다행히 콘텐츠는 복잡한 것도 다양하고 뻔한 스토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왜 뻔한 스토리는 뻔하다고 하면서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 혹은 무엇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거나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다 등등의 뻔한 메시지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게 무엇보다 인간의 기본 욕구를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우주 정거장 시뮬레이션 게임을 했습니다. 그곳에서의 하루는 그저 탐사대를 보내 자본을 캐오고 곤충을 키워 식량으로 만들고 공장을 가속하는 게 전부였죠. 인간이 인간을 만들지 않는 시대라 우주 어딘가를 유랑하는 냉동인간을 구하는 것으로 인력을 충당합니다. 이 시대의 구전설화 속 심청이는 블랙홀로 팔려 갈까요? 신데렐라는 유리구두가 아닌 티타늄 구두를 신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도 심청이와 신데렐라라는 캐릭터는 여전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름은 바뀌더라도 효심이 가득한 누군가와 힘든 시절을 보내고 행복을 얻은 누군가로요. 이렇듯 뻔한 이야기는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희망 욕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서 종일 뒹굴기만 하면 활발히 움직일 때보다 배가 자주 고파집니다. 여유에 허기가 진 느낌이에요. 백수인 주제에 군것질을 이것저것 하기에는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양심에 찔려 시리얼을 샀습니다. 1킬로는 너무 많을까 600그램을 샀는데도 엄청 큰놈이 왔더라고요. 박스가 거의 제 상체 길이만 했습니다. 그리고 벌써 절반을 먹어버렸죠. 아무 생각 없이 냠냠 먹고 보니 벌써 반이 없어졌더라고요. 반이나 남았네가 아닌 반밖에 안 남았네 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자연스레 머리를 지배했습니다. 그 생각은 종일 자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떻게든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일주일이었어요. 그러고 나니 몸과 마음이 피폐해짐을 느꼈습니다. 바깥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멀리 갈 힘은 없어서 연희동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갔던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어요. 조그만 가게가 많이 생겼고 사람도 많았습니다. 골목을 걷다 한 책방을 발견했어요. 조금 살아난 기분으로 2층 책방으로 올라갔습니다.


open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린 문을 열자 머리가 희끗한 책방지기가 맞이해주었습니다. 학자의 공간처럼 정갈한 책장과 예술가의 공간처럼 아티스틱한 러그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책방이었어요. 요즘 책방이 감성을 자극하는 문장형 카테고리를 쓰는 것에 반해 이곳에는 직관적으로 예술, 소설, 인문학 등의 카테고리로 이루어져 있어 오히려 그 점이 좋았습니다. 시간을 들여 이곳에는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책방지기의 취향은 어떤 책인지 샅샅이 구경했어요. 작은 책방은 공간이 크지 않아 책방지기의 취향이나 책방의 방향성에 맞는 책을 놓기 마련이지요. 저는 그런 구경이 좋아서 책방에 갑니다.


손을 뻗어야 닿는 맨 위 칸과 쭈그려 앉아야 하는 맨 아래 칸 그리고 바구니에 놓여있는 꼬부랑글씨의 외서까지 모두 구경하고 나서 한 권을 집었습니다. 오가와 요코의 에세이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입니다. 걷다가 만난 책이기도 했고 산책하는 강아지 일러스트가 굉장히 귀여웠거든요. 책을 집어 들고 책방지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제가 구경하며 예상한 것과 비슷하게 책방지기는 박식하고 따듯한 어른이었어요. 책에 관련한 말과 책방을 열게 된 계기, 본인의 짧은 인생관에 대해 나누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연말에 책방에서 진행하는 워크숍도 참여해보기로 했어요. 외국의 경제학 교수님이 진행하는 워크숍이라고 하던데 아주 기대 중이에요.


소설가의 생각과 일상을 다루는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새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날아오르는 기적을 글로 쓰고, 거기에 제목을 붙여 보존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내게도 번듯한 역할이 있다, 하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시 쓰다 만 소설 앞에 앉는다.’ 문득 나의 역할이 현실을 회피하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감정 표현에는 무디지만 외부에서 오는 감정을 잘 못 참습니다. 조금만 슬픈 걸 봐도 펑펑 울고 조금만 웃긴 이야길 들어도 빵빵 터지죠. 유로파는 어떤가요? 조금 전에 메타인지 테스트를 했습니다. 메타인지는 쉽게 말하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에 맞게 실행하는 여부입니다. 예전에 강의로 메타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는 ‘나는 자기 객관화를 잘하니까 괜찮겠지?’ 했는데 테스트 결과는 전혀 아니더라고요. 5점 만점에 2점이 나왔습니다. 타인만큼 나는 나를 모르고 있었어요. 나 자신으로는 아무 감정을 만들 수 없었던 것처럼요. 저번 편지에 유전과 환경이 합쳐져서 성격이 형성된다는 이야길 했는데 지인과도 비슷한 이야길 나눴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모습이 자신도 모르게 본인의 엄마와 닮았더라는 얘길 들려줬어요. 주로 남성은 화를 해결하는 모습에서 아버지를 겹쳐보고 여성은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에서 어머니를 겹쳐본다고 합니다. 조금 먼 연관관계이지만 예전에 읽었던 톰 필립스의 <인간의 흑역사> 책이 떠올랐어요. 결국 우리 모두 DNA의 노예라는 아주 흥미로운 책이었죠. 유로파는 어떤가요? 메타인지를 잘하고 있나요? 


메타인지가 높은 사람과 더불어 또 부러운 사람이 생겼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은 환경이 변해도 유연하고 태연하게 적응하며 자신을 뽐냅니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나름으로 열심히 뛰었지만 제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현실을 보며 최근 많이 좌절했습니다. 그래서 회사의 일과 내 일을 분리하기로 했어요. 돌아돌아왔지만 원래부터 이랬어야 하지 않았나 싶어요. 앗, 이게 메타인지가 낮다는 증거일까요? 어쨌든 흥미 위주로 회사를 선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죠. 하지만 근거 없는 불안에 뜬구름을 잡느라 서류를 하나도 못 넣었습니다. 고민하는 데만 벌써 사흘이 흘렀어요. 이럴 거면 유로파를 따라 여행을 다녀올 걸 그랬습니다. 제 주변엔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여유롭고 생각의 전환이 빠르죠. 백 살 인생의 몇 년은 아주 짧다는데 일분일초를 불안해하는 저는 숲도 나무도 보지 못하고 흙만 쳐다보는 느낌이에요. 흙도 쳐다보다 보면 언젠가 새싹을 만나게 될까요? 그 새싹이 나무가 되어 언젠가 숲이 되겠죠? 


알고리즘에 의해 자동재생된 유튜브 영상에서 ‘70%는 현재에 투자하고 30%는 미래에 투자하라’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흙에서 씨앗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불안의 뜬구름이 조금 걷힌 느낌입니다. 저의 꿈은 월급쟁이이지만 직장인 역시 현재에 멈춰서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회사의 일은 하루의 70%를 하고 나의 발전을 위한 일은 하루 30% 해보자는 단단한 결심이 섰습니다. 그 결심 이후로는 다행히 몇 곳에 원서를 넣었어요.






계속 돌아가던 유튜브에서 한 작가님의 인터뷰 영상을 봤습니다. 일일 1식과 2시간 운동과 독서, 3시간 수면, 4시간 사색(나머지는 모두 글 쓰는 일)하는 루틴을 가지고 있다고 했죠. 놀라운 건 1식이나 3시간 잠이 아닙니다. 진행자가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냐고 하니 작가님이 답합니다. 내 시간을 바깥에 써서 지인 1,000명을 만들면 그건 내가 아는 사람이고 내 시간을 나 일하는 데 써서 팔로우 1,000명을 만들면 그건 나를 아는 사람이라고.


예전에 미리 신청해두었던 모임을 만드는 워크숍에 참여했습니다. 각자 자신이 만들고픈 모임을 뾰족하게 기획하는 방법을 배우는 워크숍이었죠. 저는 거기서도 창작자를 위한 모임을 기획했는데 성과를 내게끔 도와서 창작자가 지속된 창작의 계기를 느끼게 하고픈 의도가 담겨 있었어요. 피드백을 나눌 때 타겟이 명확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아요. 창작을 지속하고픈 사람과 성과를 내고 싶은 사람이 섞여 있었죠. 그저 성과를 겪어보면 지속할 거라는 둥그스름한 생각이었습니다. 교집합을 정확히 찾거나 아니면 둘 중 하나에 집중해야 했어요.


지금은 전자책 강의 교재 안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제가 맡은 강의 부분에 기획파트가 쏙 빠져있는 부분입니다. 기획을 제외한 집필과 퇴고, 편집 부분을 설명해야 하죠. 예전부터 여러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드는 워크숍이었고 공통으로 기획서의 중요성을 어필해왔죠. 실제로 책을 만들 때도 기획서를 여러 번 들여다보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기획에 따라 글도 퇴고도 디자인 요소도 다 달라지거든요. 그걸 빼놓고 설명하자니 붕어빵에 팥이 빠진 느낌입니다.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어떻게 하게 해서 무엇을 얻게 하느냐.는 모든 것의 기본요소입니다. 지금의 편지도 그렇죠. 나는 유로파에게 우리가 다른 환경에서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이유로 편지를 쓰게 해서 책을 만듭니다. 창작적인 측면에선 지금 세대의 우리는 모두 N잡러니까, 유로파와 내가 다른 환경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모두와 함께 생각을 나누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나를 지금보다 더 알릴 필요가 있고 모임의 타겟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으며 붕어빵에 팥을 넣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점이 많아질수록 행복합니다. 아직 내가 세상에 배워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죠. 어떻게 정리하고 구체화할까의 고민이 행복 단계입니다. 유로파는 어떤가요? 나에겐 뇌가 말랑해지는 기분인데 유로파의 뇌도 말랑해지는지 궁금하네요.






오늘은 면접을 봤습니다. 신기한 일을 겪었어요. 자기소개서를 쓰는 경험도 비대면 면접 경험도 모두 처음이라 신기했지만 면접의 질문이 그동안 유로파와 나눠왔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덕분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둘 다 연차가 쌓인 직장인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모릅니다. 운은 또 다른 노력의 형태라는 유로파의 편지가 생각나네요. 면접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한 발짝은 내디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편지에는 새로운 직장의 이야기도 덧붙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권해주신 음악은 룸메와의 티 타임에 잘 들었습니다. 룸메는 취향을 저격당했다며 곡을 저장해갔어요. 오랜만에 라이브 공연에 가고 싶어지네요. 매주 월요일에는 ‘오픈 마이크’라는 이름으로 인디 뮤지션들이 공연을 섭니다. 아, 정신을 차리니 전시도 가고 싶어요.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하는 대형 설치 전시가 눈을 아른아른하는군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에는 유로파와 같은 원색의 사람과 함께하는 것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SF소설은 최신 것만 알고 있었는데 어슐러 르귄의 <하늘의 물레>를 방금 주문했습니다. 기대감으로 무장해있어요. 


우리 매번의 편지에 만남을 이야기하는 것이 꼭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를 말하는 것 같아 웃음 지어집니다. 유로파의 여행 일정이 끝나면 만나서 공연이든 전시든 책방이든 바든 하루를 함께하면 좋겠네요. 그동안 저는 재정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유로파도 저도 행복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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