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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Jan 22. 2023

조명은 빛납니다. 어디서든지요.

다섯 번째 답장

  언젠가부터 1월 1일은 다음 해라기보다 그냥 다음 달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선지 들뜨지도 침울하지도 않은 평온한 연말을 보내고 있어요. 종종 가던 집 근처의 마음에 들던 카페가 사라졌습니다. 얕은 한숨을 쉬고 아메리카노를 찾아 골목을 걷다 들어간 집 근처의 카페가 마음에 듭니다. 연말과 연초는 내 근처에 닿아있어 언제 사라지고 언제 마음이 들지 모르는 카페처럼 느껴집니다. 그나저나 이곳은 아주 조용하네요. 뭐 하나 흔들리는 것 없어 영상을 찍어도 정적입니다. 커피 머신이 백색소음을 내는 것이 분명하게 들리는, 차분히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기에 좋은 장소예요. 


  어제는 개포를 착각해서 군포를 다녀왔습니다. 아는 얼굴의 책방지기를 마주치려 했는데 말이죠. 지하철을 갈아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고가도로 옆 산길을 걸을 때까지도 내가 착각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도착하고서 맞이해주는 책방지기의 얼굴은 아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결론이 나야 과정의 실수를 알아채는 저의 멍청함은 아직 건재합니다. 내년에도 수습자로 일괄된 캐릭터를 유지하겠네요. 개포에 연락해 수습하고 군포를 즐겼습니다. 이왕 멀리 온 김에 구석구석 즐겼습니다. 책방에 놓인 책들은 대부분 아는 얼굴을 가졌기에 좀 마음이 놓였습니다. 책마다 쓰여 있는 세심한 소개 갈피에 따듯함도 느꼈고요. 2층의 카페에 놓인 나무 테이블과 의자도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꾸준히 진행한다고 하는 설치 전시도 굉장히 좋았어요. 문화공간이라는 느낌이 전반적이었습니다.


  저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요. 과거력이 안 좋다고 해야겠네요. 지나간 일은 자고 일어나면 거의 잊어버립니다. 좋았던 일도 나빴던 일도 잘 잊어버립니다. 저조차도 신기한 유일하게 뛰어난 기억력은 책입니다. 집에 어떤 책이 있는지 다 기억하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다 기억하죠. "그래서 이 책을 어디서 샀더라."는 별개지만요. 군포의 책장은 집의 책장과 구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편안했어요. 멀리 온 집이네요. 여기가 진짜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다..






  짜잔 새해입니다. 유로파는 신년에 하는 것이 있나요? 버킷리스트를 쓴다든지 목표를 세운다든지 마음가짐을 새로이 한다든지 말이죠. 저는 보통 분기 단위로 계획을 짭니다. 일 년 단위의 계획을 한 번에 짜려고 하면 뭔가 망망대해 속의 해적이 된 것 같아 어디서 어떤 보물상자를 건져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요. 


  유로파는 계획을 어떻게 짜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마다 계획을 짜는 방법이 다르더라고요. 그런 얘길 듣는 걸 좋아하니 다음 답장에는 꼭 알려주세요! 저의 계획법은 말로만 벌여놓은 일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노션에 리스트를 쭉 적어보고 완성 목표 일을 표기해놓죠. 더 하고 싶은 일이 메인이 되고 덜 하고 싶은 일이 서브가 됩니다. 아주 간단하죠?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는 것은 끊임없이 나 자신의 초라함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속인지 발버둥인지 그저 오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초라해지는 거죠. 성격은 생존본능으로 생성됐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방어적인 성격은 조심성이 많은 생존본능에서 나온 것처럼요. 작년의 저는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법을 생존전략으로 택했기에 원래도 급했던 성격이 더 급했습니다. 아주 빠듯하게 마감을 쳐내기 급급한 허세였죠. 그 덕분에 빠른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입만 열면 허세 발언이라 입을 거의 안 열게 됐죠. 그래서 이번 계획은 완전 찌질할 정도로 초라해 볼까 아예 느슨하게 끈을 놓아볼까 고민이 됩니다.


  누가 저에게 물었어요. "왜 책을 만드세요?" 누구나 책을 만드는 덴 이유가 있을 겁니다. 자아실현도 있을 테고 기록도 있을 테고 표출도 있을 텝니다. 저에게 책은 수단입니다. 자아실현의 수단이고 기록의 수단이고 표출의 수단이죠. '~의 수단' 앞에 올 누군가의 지속을 돕습니다. 수단 또한 책으로 한정 짓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올해도 할 일이 많습니다. 찌질하게 할 것이냐 느슨하게 할 것이냐.


  찌질하고 느슨하면 큰일인데 말이죠.


  지난해 말, 작은 파티에 다녀왔습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모인 자리였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 ‘집 가고 싶다.’ 를 속으로 여러 번 외쳤지만 알던 사람과 모르던 사람이 지속해서 이야기를 나눠주어 즐겁게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한참 먹고 마시고 떠들다가 "글 쓰세요? 책 있으신가요?"란 옆자리 물음에 "에?"하고 머리를 굴려봤는데 없더라고요! 새삼스레 기분이 이상했어요. 다른 옆자리에선 작가 명함을 받았습니다. 나는 나를 작년과 동일한 책 만드는 사람이라 했지만 뭔가 석연찮았어요. 이 비슷한 기분은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도 느꼈습니다. 유로파도 알다시피 저는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규모도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하게요.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을 통하기에 고객의 브랜드 인지부터 경험, 참여 지속까지 잇는다.고 한 줄 요약을 할 수 있지만 이것 역시 "무슨 일하세요?"란 물음의 답입니다. 내가 뭐냐는 물음에는 답하기 어렵더라고요.

  

  직업이나 회사 말고도 자신을 표현하는 시대입니다. 빵에 진심인 사람, 매일 도전하는 사람, 몽환을 그리는 사람, 칼 대신 펜을 든 사람 등 여러 자기 소개가 있죠. 유로파는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이 있나요? 저는 이것이 올해의 숙제입니다.


  유로파는 미래의 모습을 생각해본 적 있나요? 저는 아직 분기 단위로 밖에 계획을 못 세우는 사람이지만 어릴 때는 당장 오늘만 살았던 걸 보면 그래도 그때보다는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주변에는 따듯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멋있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등 벌써 몇십 년 후의 모습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아가서 장례식의 모습을 그려보는 사람도 많죠. 저는 너무 까마득한 얘기라 생각이 닿지도 못했는데 말이에요. 실버층을 대상으로 한 사업을 구상하는 지인도 많아졌습니다. 유튜브에서도 실버층의 생활이 종종 보이고요. 미래를 준비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걸까요? 저의 모토는 지금을 살자입니다. 지금이 과거의 이자고 지금이 미래의 적금이라고 생각해서인데. 요즘은 조금 흔들립니다. 빨리 안정을 취하고 싶다는 대화가 있었습니다. 안정은 특이성 없이 굴러가는 루틴에서 오는 거라는 대화였고 그러기 위해선 특이성을 빠르게 제외해야 한다는 대화였죠. 저의 이자는 대부분 특이성을 가지고 있고 저의 적금 역시 특이성이 다분합니다. "나는 10년 전부터 너의 안정을 바랐어."라는 오랜 친구와의 대화에서 말없이 아메리카노만 홀짝이는 게 더욱이 나의 초라함을 홀짝이는 모습이더라고요. 


  오늘은 초라함을 너무 많이 마셨으니 디저트로 허세를 먹어야겠습니다.






  최근에 잡다한 걸 좋아하는 에디터의 인터뷰를 봤습니다. 그 사람의 시작은 다양한 취향으로부터 였어요. 본인을 철새라고 표현하는 사람이었죠. 철새의 고민은 그 다양한 관심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었다고 했습니다. 직업이 아닌 세상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생각해봤다고 했죠. 그래서 찾은 게 '소개'였고 그에 어울리는 에디터의 모습을 갖춰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뷰에서 조금 힌트를 얻은 부분은 좋아하는 것을 나만의 분류와 기준을 거쳐 나만의 폴더에 정리해야 한다. 입니다. 책을 예로 들자면 "나는 인문학 책이 좋아." 보다는 ‘오후 2시쯤 해가 조금 졌을때에 살짝 들어오는 그림자 진 책상에 앉아서 잔잔한 재즈를 틀고 읽을 수 있는 나만의 인문학 책 리스트’ 입니다. 


  몇 달 전부터 한 소설책의 집필 작업을 작가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유학 생활을 오래 한 작가님의 눈에 비친 솔직한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죠. 미팅 때 항상 거론되었던 건 '상황의 묘사'와 '마음의 묘사'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자세하고 더 편한 묘사로 사건을 전달할까 고민하는 거죠. 글에서는 묘사가 중요합니다. 독자에게 생동감을 전달하고 공감과 이해를 돕기 위해서죠. 저는 왜 묘사를 작품의 한정으로 여겼을까요. 나의 취향과 나의 좋아함을 묘사하면 나의 역할도 자연스레 정의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원래 가능했던 걸 가능하게 만드는 것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에 감동을 받습니다. 어려웠던 환경에서 의지와 노력으로 힘듦을 헤쳐나온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르거든요. 저는 성장물 스토리를 좋아하는데 성장물은 꼭 불가능에 대한 좌절과 그것을 이겨내고 가능으로 만드는 벅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쓴 눈물과 단 눈물이 모두 들어있어 어떤 성장물이든 펑펑 울며 봅니다. 이 시대의 영웅 혹은 이 시대의 성공한 사람은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화시킨 사람이 많습니다. 불가능은 하나의 희망의 씨앗이기도 했고 열정의 불쏘시개이기도 했으며 벗어나고픈 존재이기도 했을 겁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선천적인 조건이기도 했을 거고요. 하지만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보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능을 이루는 것을 안정적으로 느낍니다. 이미 할 수 있는 것을 이루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는 거죠. 


  저는 도전을 좋아합니다, 만 사실 얍삽한 도전만 해왔습니다. 유로파가 "어떻게 그렇게 직종을 휙휙 바꿔서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었어요?"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죠? 그때 말했던 "운이 좋았어요." 를 조금 풀어서 설명해보려 합니다. 테스트를 많이 해봅니다. 얕게 경험해 보는 거죠. 소모임이든 워크숍이든 개인적으로든. 실수해도 용납받을 수 있고 적은 인원에게만 알려지는 얍삽한 수를 씁니다. 실제로 어떤 회사에 다니기 전 저의 행적을 보면 관련 모임을 참여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테스트를 통해 데이터를 축적해 가능과 불가능을 점쳐봅니다. 그리고 점차 가능에 가까워졌을 때, 업으로 만듭니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이에요. 


  나는 이렇듯 모든 불가능이 순수 불가능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거로 생각합니다. 성장물 속 주인공의 사실은 숨겨진 힘 처럼, 안전한 불가능에서 출발했을거라 생각하죠. 실패해도 괜찮을 불가능이요. 저는 얍삽한 방법을 썼지만, 정석적으로 노력을 통한 경우가 가장 이상적인 안전한 불가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때야말로 가능의 희열이 아주 크겠죠. 이렇게 본다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맞아요. 단지 나의 마음의 여유가 없어 미루거나 미뤄질 뿐이지 불가능은 없어요.


  그러니 지금 사는 이 로또도 꼭 당첨될 거예요.






  "그쪽은 이제 잘 안 갈지도 모르니까, 간 김에 좀 걸으면서 지도에 표시했던 책방들을 쭉 돌았어요." 오늘은 전 회사에 남았던 짐을 정리해서 모두 택배로 보내고 그 근방 책방을 구경 다녔습니다. 책 덕후라고 하면 좀 멈칫하지만 책방 덕후는 맞다고 생각해요. 책방은 어디를 언제 가도 기분이 좋거든요. 멀리서 책방이 보일 때부터 기분이 좋아지고 책방마다 다른 외관과 입구를 만날 때부터 반가워집니다. 책방은 대부분 조용한 곳이기에 높은 텐션을 감추고 조심스레 들어가죠. 맞아주는 책방지기의 안녕을 받고 책장과도 안녕합니다. 한번 가볍게 말했죠. 책을 보다 보면 그 책방과 그곳의 책방지기의 취향이나 방향성을 알 수 있어 즐겁다고요. 요즘은 성격을 책방 이름에 붙여놓는 경우도 많아 방향성을 예전보다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철학 책방이라고 해도 책방지기의 취향에 따라 서양철학일 수도 동양철학일 수도 있는 것처럼, 직접 뚜껑을 열어 보아야 즐겁죠. 당연히 그런 얘기를 책방지기와 나누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 사람과의 대화는 모두 좋지만 취향을 나누는 대화는 더욱 즐거워요. 책의 소재와 책방의 소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소재 등 책방지기와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답니다. 마치 알쓸인잡에서 12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처럼요.


  "뭔가 그렇게 하나에 꽂힐 수 있다는 게 신기해요. 제가 책방을 갈때보다 이아님은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신기하고요." 책방 다녀온 이야기를 신나게 하다가 룸메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이상하다. 나는 그냥 책방 놀러 다니는 걸 남보다 약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룸메의 눈에는 내가 책방에 진심인 사람처럼 보일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인스타에 책방의 기록을 남기는 건 지인의 추천이었습니다. "너 맨날 그렇게 책방 쏘다니지 말고 기록을 남겨보는 건 어때? 아카이빙 겸 추억 겸." 거기에 책방 생일을 남겨놓고 싶다는 제 욕심이 더해져 인스타는 야금야금 책방으로 치워지고 있죠. 기록을 남기니 신기한 일이 두 가지가 있었어요. 나는 내가 생각한 것만큼 책방을 자주 안 가는구나! 했지만 타인이 보기엔 자주 간다고 느낀다는 점. 그리고 책방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책방지기가 의외로 많다는 점이요. 신기하고 아쉬운 부분의 새로운 경험을 하며 책방을 다닙니다. 유로파에게도 이런 장소나 취향이 있는지 궁금해요.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요.






  아, 혹시 유로파 드라마 좋아하나요? 몇 년 동안 눈에 걸렸지만 보지 않았던 드라마 <라이브>를 봤습니다. 추리물이나 수사물을 좋아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70% 정도 코믹이 섞여 있는 것만 골라 봤거든요. 포스터와 소개를 봤을 땐 치열한 드라마일까 봐 넘겼었습니다. 찌질한 계획표와 느슨한 계획표를 고민하던 중 쉬려고 켠 핸드폰에서 OTT 쿠폰이 도착했고 이때다 들어간 플랫폼에서 다시 마주한 <라이브>가 눈에 걸렸습니다. 모든 뚜껑은 열어야 내용물을 알 수 있죠. 투명한 병에 담긴 원두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고 잘 분쇄해서 내려 마셔야 어떤 맛인지 알 수 있듯이요. 저는 <라이브>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총 18화를 그 자리에서 내리 다 봤습니다. 새해 첫날의 18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좀 쉬고 싶다는 합리화도 있었지만 항상 시간을 아까워하며 잠시간을 줄이며 일을 벌이던 저에게는 큰일이었죠.


  맞아요. 큰일났어요. 유로파.


  1월 1일부터 노느라 시간을 보냈습니다. 드라마는 지구대를 배경으로 한 수사물이었지만 사건보다 사람을 다룹니다. 등장인물들이 경찰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계기부터 시작하죠. 그들이 경찰이 되어서 배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는 것입니다. 시위대를 때려서도 안 되고 고소하지 않는 피해자를 다그쳐서도 안 되며 범인을 과잉 진압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위험 상황에 테이저건을 쏠 때도 경고부터 주어야 하고 신고받고 나간 동네가 불친절해도 이해해야 하며 앞에서 동료가 쓰러져도 다른 사건에 출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범인 검거를 축하하고 서로의 가족 일을 축하하고 동료의 무사 퇴직을 축하하죠. 피해자를 걱정하고 서로를 걱정하고 자신을 걱정합니다.


  저는 이런 평범하게 반짝이는 사람을 다룬 이야기에 약합니다. 아까움을 이기고 뜨거운 커피를 내려 아주 차게 식을 때까지 시간을 들여 꼭꼭 씹어 맛봅니다. 그래서 저는 유로파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시간을 들입니다. 평범하게 반짝이는 유로파의 이야기는 참 재밌거든요.


  저는 이제까지 머리 위로 상상 속 핀 조명이 팟! 켜지며 희열을 느껴야 그 일에 적성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흔히 연예인들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았어요." "카메라가 켜졌을 때 살아있음을 느꼈어요."라고 하는 것처럼요. 오늘은 정말 오랜만의 지인을 만났습니다. 그녀 역시 일에서 희열 조명을 찾는 중이었죠. 저는 그녀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희열 조명은 어디 있는지. 선택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건지. 이케아에 가면 살 수 있는지요. 사적인 수다는 늘 그렇듯 샛길로 빠집니다. 이케아의 인형은 허술한 귀여움이 있다는 둥. 이케아는 사실 먹으러 가는 곳이라는 둥. 돈만 있으면 이케아를 통째로 사고 싶다는 둥이요. 그녀는 그러고 보니 이케아에서 마리오에 나오는 버섯을 닮은 무드등을 샀다며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손바닥 만한 작은 무드등이었어요. 기둥은 진한 초록색을 띠었고 머리는 정말 딱 마리오의 굼바와 닮았습니다. 그 작은 무드등은 형광등을 켜지 않고 지내는 그녀의 집에서 존재감 있는 빛을 내뿜었습니다. 


  "만약 너가 미술관 속 작품이라면 어떤 조명으로 비추고 싶어?" "음, 연인이 프로포즈할 때 장미랑 양초로 길 만들어주듯 제가 서 있는 바닥에 하트 모양으로 빛이 쏘는 거죠." "그렇구나.." 유로파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해봅니다. 만약 유로파가 하나의 작품이라면 어떤 조명으로 자신을 비추고 싶나요? 하루 내내 온갖 콘텐츠를 소비하며 n년간 잡학 콘텐츠 추천 뉴스레터를 운영한 에디터의 인터뷰를 봤습니다. “이제 설레기 보단 가족 같아요.”라고 하더라고요. 꼭 머리 위의 핀 조명이 아니더라도 굼바 조명도 하트 조명도, 꼭 희열이 아니더라도 작은 존재감도 특이성도 안정감도, 나만의 조명을 켤 수 있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조명으로요.






  유로파는 마음이 어려울 땐 어떻게 하나요? 추운 계절의 하루쯤은 마음마저 시려오기 마련입니다. 부는 바람에 창문의 덜컹이는 소리가 내 마음이 내는 소리처럼 느껴지죠. 저는 취침 시간이 늦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늦었네요. 가끔 이렇게 늦어질 때가 있습니다. 자리에 누웠다가도 다시 몸이 일어나지곤 하죠. 이런 시간이면 건네고 싶은 말을 다듬습니다. 건넬 말을 건네지 못해 몸이 잠들지 않는 날도 있거든요. 그래도 여러 글을 읽어온 사람인지라 여러 모양으로 말을 다듬지만 뭔가 다 쑥스럽고 부끄러운 말뿐이네요.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여볼까 싶지만 머리가 잠겨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이럴 때 조금 나쁜 버릇이지만 일을 합니다. 미뤄놓은 일이 없으면 새로운 일을 벌입니다. 잠긴 머리를 털고 노트북을 켜죠. 필요한 정보와 일정을 짜다 보면 평상시의 나로 돌아온 듯한 착각을 합니다. 착각 속의 나는 쑥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아요. 유로파. 저는 건네야 할 말을 일 년이 넘게 다듬었어요. 이제 건네버리기에도 너무 늦었죠. 그러니 이만 착각 속에서 자야겠습니다. 유로파는 꼭 늦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건네야 할 말은 건네야 할 때 건네세요. 저처럼 비겁하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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