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이아 Mar 05. 2023

성장하는 과정에는 성장이 필요합니다.

일곱 번째 답장

유로파의 중2병 시절은 어땠나요? 저는 그 병이 고등학생 때 왔습니다. 갑자기 학교에 가기 싫어졌죠. 그래서 타던 버스를 타고 그대로 종점까지 갔습니다. 상가도 주택도 별로 보이지 않는 버스만 즐비한 주차장에 내렸습니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를 헤맬 때 낡은 중고책방이 하나 보이더라고요. 쭈뼛쭈뼛 들어가니 지긋한 할아버지 책방지기가 안쪽에서 먼지를 털며 맞이해주었습니다. 나를 보더니 교복 손님은 오랜만이라며 낡은 의자를 내어주셨죠. 책장의 공간도 모자라 탑을 이루는 책을 뒤져가며 구경했습니다. 그러다 만났죠.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를요. 


두꺼운 책을 들고 의자에 앉으니 할아버지는 어린 친구가 책 보는 눈이 있다며 다 읽고 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책방과 연결된 작은 방에서 오렌지 주스와 과자 몇 개를 꺼내어 주셨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 하고 책을 펼쳐 그 끝없는 이야기 속으로 모험을 떠났죠. 할아버지는 종종 살피다가 제가 모를 법한 단어를 설명해주시거나 관련 이야기를 덧붙여주셨어요. 그렇게 책을 읽으며 수다를 떨며 즐겁게 책을 읽었습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할아버지는 배고플 텐데 학교 가서 점심 먹고 읽으라며 책을 몇 권 더 쥐여주셨습니다. 저는 중고책의 가격은 몰라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있는 돈을 모두, 안 받겠다는 할아버지의 손 대신 주스가 담겼던 컵 아래에 놓고 왔어요.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어디서 타야 하냐고 물어보면서 슬쩍이요.


집에는 서재가 있었고 책이 한가득 있었지만 내 돈 주고 처음 산 책인 <끝없는 이야기>는 그때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에 유행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착한 아이 콤플렉스’입니다. 친구들과 우린  착한 아이 콤플렉스때문에 거절을 못 하고 사는 거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무렵 철이 든 친구들과 다르게 중2병이 온 저는 “착한 아이로 살지 않겠어!”라는 흑염룡으로 관계를 깨부수는 것을 일삼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떠났던 것도 학교와의 관계를 깨부수고 싶어서였죠. 후. 학교라는 감옥이 어쩌고. 그땐 그랬죠. 모의고사에 백지를 낸 적도 있습니다. 시험과의 관계를 깨부수고 싶어서.. 쫄보여서 내신 시험 때는 그러지 못했지만요. 날 때부터 타고났던 홍대병이 극을 발휘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것, 보통적인 것, 무난한 것은 저에게 ‘착하다’로 잘못 인식되어 모두 거부했죠. 수학 선생님과 열띤 토론을 한 적도 있습니다. 정답이 있는 게 왜 즐겁냐는 질문으로요. 주변 사람들은 이런 행보에 크게 놀라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말괄량이였거든요. 표현이 이전에 비해 격해졌지만 쫄보여서 선을 넘지 않는. 그 정도였죠.


자신을 ‘난 참 싸가지가 없어.’라고 생각할때쯤 저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바뀌었습니다. 자기 전날부터 ‘나를 이해받으려면 내가 먼저 타인을 이해해야 해.’ 생각이 머리를 맴돌더니 자고 나니 “그래! 이제부터 모두를 다 이해하는 거야!” 뾰족한 고슴도치가 둥그런 공이 됐어요. 결심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중2병이 나았는지 갑자기 모두의 상황과 처지가 이해 가더라고요. 온도가 올라간 나의 말투에 주변은 엄청 놀라 했습니다. 신기하죠?


얼마 전 제 옛 룸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함께 산 적은 옛날이지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가끔 만나 인사이트와 근황을 나눕니다. 그녀도 학창시절 소심이에서 대범이로 하루아침 변한적이 있다고 했어요. 주변 모두가 놀랐다고. 어느 유튜브에서 사람의 정신은 약 16세까지 자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애같고 그런 걸까요? 여튼. 중2병은 마음의 변성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마다 변성기가 오잖아요. 누구는 그 전과 후가 크게 다르고 누구는 미미한 변화를 겪죠. 그런 것처럼 마음도 누구나가 겪는 변성기가 있는건 아닐까 싶어요. 나와 옛룸메는 그 변성기가 컸고요. 목소리도 변성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내 싸가지도 중2병 전으로 돌아가진 않더라고요. 우린 그렇게 변성기를 겪으며 자라나 봅니다. 







저는 어제 수필집을 만들자는 제의를 거절당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는 게 이유였어요. 제가 생각했던 일정과 프로젝트가 감쪽같이 사라지니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거절 이유를 곱씹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오랜만에 나를 뒷걸음치게 한 말이었어요. 저는 어떻게든 성과를 내려는 욕심에 이번 분기의 일정을 프로젝트로 채웠습니다. 조금씩 다른 일정으로 모두 빽빽하게 채웠죠. 벌써 2월이라 다음 분기를 준비하는 조급함도 함께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심이었습니다. 저는 누구나가 저의 "책 만들래?" 제안에 거절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들과 함께 으쌰으쌰 앞으로 나아가려는 생각만 했고 누구라도 으쌰으쌰 하려는 생각만 했습니다. 정말 멍청했죠. 성과를 내더라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야 하는데 말이죠. 그저 으쌰으쌰면 다 될 거라는 멍청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만들어 온 책을 살폈습니다. 무서웠거든요. 만들었던 책이 그 어떤 메시지도 담지 않은 그저 으쌰으쌰의 산물일까봐요. 몇 책은 큰 반성을 줬습니다. 좋은 의도로 만들었지만 열심히 담지 않은 책도 있었죠. 이제서야 저는 결과만큼 과정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의도의 중요성도 깨달았고요. 저는 뒷걸음 친 이 자리에서 목표를 수정했습니다. 잘난 책이 아닌 좋은 책을 만들자고요. 책뿐만이 아닌 내가 만드는 모든 것은 좋은 과정과 좋은 성과를 내자고요. 새삼스럽지만 유로파, 저는 이 마음이 내가 앞으로 달리고자 했기에 들 수 있었던 반성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난 성과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달려야만 넘어지고 피가 나고 딱지가 앉아야 다시 달릴 수 있을 테니까요. 제의를 거절한 작가에게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저의 사과와 감사의 문자를 받은 사람들은 오히려 감사하다며 저를 위로해줍니다. 이런 경험에서 역시 사람에겐 관계가 중요하고 관계에서 성장한다는 말을 여러 번 되새깁니다. 그리고 꼭 좋은 관계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죠.








제 모든 플랫폼 알고리즘은 성장 콘텐츠가 있어요. 볼 때마다 재밌고 흥미롭고 짜릿했죠. 매번 배웠던 걸 써먹고 성취하는 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가는 콘텐츠를 좋아할까? 왜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라고 할까? 자신에 대해서 진짜 그렇게 모르나? 나는 나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성과주의자고. 수시로 일을 벌이고. 책방 좋아하고. 전시 좋아하고. 고집 세고. 이기적이고 등등이요. 


그런데 내가 벌이는 일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을 수 있는 매개체가 빠졌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냥 나를 이루는 부분일 뿐이지 '왜'가 빠져있던 거죠. "새로운 영감을 찾는 게 좋아서 이것저것 경험해요." 하는 사람은 매번 새로운 브랜드 팝업을 쫓아다니고 오래된 가게에서도 새로운 힙함을 찾아냅니다. "작고 귀여운 것이 좋아서 이것저것 만들어요." 하는 사람은 손바느질로 귀여움을 만들거나 그림으로 귀여운 작품을 만듭니다. 네. 맞아요. ‘그 사람스러운 거’ 있잖아요. 나는 그런 게 없다는 걸 알았어요. 글로 치면 관통하는 주제가 없는 거죠.


지난 편지를 쭉 모아보았습니다. 내가 말하고 유로파가 말해주었기기에 깨달을 수 있었어요. 여행 가서 사람을 보고 싶고 고양이를 좋아한다 말하고 싶고 내 소개말을 찾고 싶고 내 조명을 빛내고 싶은. 그런 내가 모여있더라고요. 한때는 의문이었던 내 중심 찾기를 이번에 해보려고 합니다. 모든 '왜'로 시작하려 해요. 어떤 전시가 흥미로우면 왜 흥미로운지. 어떤 책이 재밌으면 왜 재밌는지. 어떤 카페가 좋으면 왜 좋은지. 왜를 모으면 나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나를 모르니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정확하지 않아서 좋다는 것에 계속 흔들렸어요. 하지만 내가 명확해지면, 나와 맞거나 맞지 않음을 알아챌 수 있다면, 진짜 내가 원했던 방향으로 갈 수 있겠죠.


쉬운 말로 적되 깊게 고민하려고요. 나만의 철학을 찾아서요.


지금 작업 중인 <서울 사람입니다> 소설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소개서에는 역경을 써야 하는데 이제 막 스무 살 남짓이 된 사람에게 얼마나 큰 고난과 역경이 있었겠냐고. 자기는 ‘재수 때 힘들었다.’라고 썼다가 그게 무슨 역경이냐며 비웃음당했다고. 태어나서 큰 사건을 겪지 않으면 대한민국 직장인이 못 되는 거냐고. 


자기소개서에 자신을 털어 써야 하는 것이 꼭 에세이를 쓰는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문을 쓰려면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한 시인의 말도 생각나네요. 최근 에세이 공모전을 훑어보았습니다. '일상의 소소한 어떠한 것을 담아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글을 기다립니다.'는 안내 문구가 공통으로 쓰여있었습니다. 


유로파는 어떤가요? 자기소개서에 쓸 적당한 단점은 못 찾았지만 에세이 공모전에 쓸 적당한 일상이 있나요? 저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이지만 깨달음도 화이팅도 발전도 뿌듯함도 주어야 하는 게 에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에세이에 담긴 메시지는 화이팅이 많습니다. 에세이뿐만 아닌 대부분의 책이 화이팅을 담고 있죠. 나는 그 화이팅을 글에 담을 수 있을 만큼을 가지고 있나 고민했습니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 일기가 아닌 짧은 에세이를 한편씩 쓰는거로 목표 습관을 수정했습니다. 일상의 소소함도 그 속에 화이팅을 담는 것도 나만의 메시지를 담는 것도 나를 관찰하는 연습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후와후와한 식빵을 먹은 유로파처럼 떡집에서 갓 나온 백설기를 후와후와 씹으며 펜으로 노트에 적어뒀던 목표를 죽죽 긋고 썼어요. '짧아도 좋으니 하루 한 편 쓰기.' 이 습관이 잘 자리 잡으면 나는 창작자가 하고픈 말도 더 잘 꺼내도록 도울 수 있겠고 내가 하고픈 메시지도 더 잘 전달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인문학을 읽는 모임을 신청했습니다. 오래 지켜보기만 했던 모임인데 이참에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모임을 시작하고 나서야 읽으려고 생각해뒀던 책이 인문학 분류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인문학 카테고리는 뭐라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렵군요. 빠르게 인문학책을 다시 사야 했기에 밀리의 서재를 켰습니다. 인문학 카테고리를 클릭해서 스크롤을 내리며 책을 살펴봤죠. 


인간은 참 간사합니다. 하루의 30분을 투자하는 강제 책 읽기 모임에서 읽을 책은, 어떻게든 내 시간이 아깝지 않을 녀석이어야 했어요. 평소라면 "헤헤. 일단 사고 보자. 뭐든 경험하면 남으니까."라며 샀을 책도 소개를 살펴보고 리뷰를 꼼꼼히 보고 프롤로그까지 읽어보며 따지더라고요. 30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니 어떻게든 후회 없이 알차게 쓰고 싶은 간사함이 생깁니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가고 싶다. 점심 뭐 먹지. 저녁 뭐 먹지. 로 보내면서 30분은 알차게 챙기려는 저의 모습에 웃음이 나더라고요. 


저에겐 유로파처럼 느슨하게 만나는 지인이 있습니다. 서로가 보고 싶을 땐 "쿨타임이 다 찼군요."하며 약속을 잡죠. 만나는 지역은 매번 달라지지만 어딘가의 전시장에서 만납니다. 이번엔 모네 미디어 아트전을 갔어요. 모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던 저도 몰입되는 스토리텔링과 압도되는 그래픽에 흠뻑 빠졌습니다. 빛 덕후 모네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어요. 유로파도 기회가 되면 꼭 경험하시죠. 


모네의 이야기는 뒤로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경쾌 발랄한 성격의 그녀는 요즘 평온 안정한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좋아했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엔 피곤하다고. 화려한 옷을 사기 좋아했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엔 차분하다고. 유니클로 매거진 토크에서 받은 꽃핑크 셔츠를 입고 간 저의 맞은편에서 보다 화려한 차림을 한 그녀의 말에 완벽히 공감하긴 힘들었지만 확실히 저번보단 차분한 차림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변하기도 하잖아요. 각자 어떤 시간을 보냈냐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 다양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환경에 따라'라는 말이 완벽히 이해 가는 순간이었어요. 인간은 익숙함의 동물인지라 나에게 어떤 환경이 노출되냐에 따라 그 환경에 익숙한 모습으로 변하는 거겠죠. 그녀는 차분하고 안정적인 회사에 입사한 지 일년 남짓 되었고 그 환경에 꾸준히 노출되었으니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졌을 겁니다. 

유로파와의 다른 점은, 분위기가 비슷한 회사에 다니지만 주요 환경이 그녀는 회사라면 유로파는 회사 바깥이라는 점이겠네요. 내가 어느 환경에 중점을 두고 생활하느냐도 나를 이루는 큰 포인트가 되니까요. 

저도 30분 인문학 읽기라는 새로운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하루의 작은 30분이지만 이런 환경이 쌓이면서 남은 시간도 알차게 보내려는 마음이 생기는 걸까 기대됩니다. 그럼 다시 시간이 아깝지 않을 책을 찾으러 가야겠어요 후후.








최근 새로 입사한 회사 이야기도 유로파가 궁금해할 것 같아 조금 씁니다. 이곳에 입사한 계기는 적절함이 잘 맞아서였습니다. 앞선 편지에서 결심했던 회사와 개인 업무를 나누어서 하기 좋아 보였고 여유를 갖기 좋아 보였죠. 회사는 절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깜박했지 뭐예요. 후후.


이곳에서 새로운 인물들을 리스트에 추가하며 새로운 시선을 많이 겪었습니다. 왜, 회사의 이미지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곳을 꾸리기 마련이잖아요. 그게 참 재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솔직하고 당당하며 자기 계발에 힘쓰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무리의 성격에 따라 포지션이 크게 달라지는 사람입니다. 무리의 결속력이 강할수록 한 발 떨어져서 관찰자 내지 방관자의 위치에 서죠.


이곳은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투성입니다. 퇴근을 안 해요. 그러면서도 각자 개인의 프로젝트도 열심히 합니다. 정말 신기한 사람투성이에요. 회사를 이용하는 사용자도 신기한 사람투성입니다. 뉴스레터에서 보던 일잘러도 만났고요. 평소 좋아하던 브랜드의 업무자도 만났습니다. 다들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죠. 이렇게 신기한 회사에서 사람을 관찰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너무 바빠요. 살려주세요.


유로파. 보상심리라는 말 아나요? 저는 오늘 말 그대로 보상심리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한 시간을 넘게 야근하고 집에 오니 프로젝트 미팅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급하게 라면을 끓일 때 느꼈습니다. '오늘은 미팅 끝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책 보고 유튜브 보고 놀아야지.' 라고 강하게 생각했지만 미팅이 끝나고 정리하느라 책이고 유튜브고 뭐고 눕고만 싶었습니다. 그러고 깨달았죠.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내가 벌여놓고 보상심리를 느끼다니. 진짜 멍청하다고요. 그제서야 세수도 못 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어요. 


이번에 입사한 곳은 집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10분이면 도착합니다. 저는 그 10분 동안 ‘네이버 오늘의 영어 회화’ 페이지를 봅니다. 영어 공부를 틈틈이 하고 싶은 마음과 돈 들여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합의점을 찾은 거죠. 페이지에는 간단한 상황에 맞춘 대화문이 있습니다. 그걸 익히고 퀴즈를 풀면 똑똑한 네이버가 점수를 기록해줘요. 모르는 단어는 간편하게 내 사전에 등록해놓고 암기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상황은 매일 부업을 하느라 잠을 못 자서 피곤해하는 남자가 힘듦을 토로하는 대화였어요. 여기서 몰랐던 단어를 사전에 등록했습니다. ‘문라이트’는 달빛이라는 말도 있지만 부업이라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달빛을 받으며 일하는 밤이라니. 절대 까먹지 않을 단어에요. 문라이트의 보상심리를 충족하고 싶었기에 오늘은 유로파에게 편지를 조금 쓰고 자려고 합니다.


저는 평소 3시쯤 잠들어서 8시에 일어나는 수면시간 세팅이 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라클 모닝을 하고 싶은 거창한 마음은 아니지만 아침 한시간을 멍때리는 데 사용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7시에 일어나기로 했습니다. 8시까지 멍때리며 시간을 보내다 출근 준비를 합니다. 몸은 참 신기한 거 아나요? 전날 식사 시간 이외 시간에 뭔갈 거대하게 먹었다면 다음날 비슷한 시간에 배가 고픕니다. 그게 수면에도 적용된다고 해요. 내가 어떤 시간에 잠들거나 일어났다면 다음날도 그 시간이면 졸리거나 깨어난다고 하죠. 사람에겐 각자 필요한 만큼의 수면시간이 있습니다. 성인 평균 수면은 7~8시간이지만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저는 수면 시간이 다섯시간이 적당한데요. 유로파에게 주말에 낮잠 자지 않고도 적절한 수면 시간은 몇 시간일까요? 


원이 쌓이면 한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한이라고 부른다고 해요. 이건 단지 말장난이지만 일리 있는 말장난입니다. 저는 중독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맛있는 아메에도 중독되어 한 달에 한 번은 꼭 진짜 맛난 커피를 마셔야 하고 떡볶이에도 중독되어 땡길때 당장 안 먹곤 못 배기죠. 유튜브도 중독입니다. 저는 화면을 보지 않을 때도 유튜브를 배경소음처럼 켜놓곤 하는데요. 집중이 필요할 때 빼고는 거의 유튜브를 켜놓습니다. 자동 재생으로 넘어가게끔 설정해놓죠. 원이 한이 되지 않는 방법은 원 없이 하는 거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하지 않아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새로운 게임이 출시되면 해보는 정도거나 게임을 하다가도 적정량 즐겼다 싶으면 이후에는 생각이 안 나요. 어렸을 때는 게임하느라 밤을 많이 샌 덕분이겠죠. 


핸드폰을 하지 않고 잠에 드는 방법에는 우선 적정 수면시간을 찾는 것과 핸드폰을 원 없이 해서 질려버리는 방법이 있겠네요. 그 전에 유로파가 잠들기 전 핸드폰으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이 원 없이 할 만큼의 흥미를 주는 것인지도 좀 궁금하고요. 요즘 스트레스가 많은지도 궁금합니다. 핸드폰은 나의 작은 움직임으로도 큰 자극을 주는 콘텐츠가 많이 있으니까. 그것에 중독되어 있다면 스트레스가 많다는 증거라고 하더라고요.


감정 일기를 써보는 것도 방법이겠네요. 내 감정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생각 정리에도 도움 되고 조금 더 가볍게 잠에 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도 잠에 들지 못하겠다면 <송민호의 파일럿 - 숙면 편>을 보길 바랍니다. 할머니의 갈갈갈송을 듣다 보면 잠에 빠질 거예요.








저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를 가끔 봅니다. 참가자들의 눈에서 보이는 간절함을 많이 배우거든요. 나는 태어나서 저만큼 무언가에 간절한 적이 있었나 반성도 많이 하고요. 이들은 항상 "즐기자!"고 외치곤 무대에 올라섭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이들의 간절함을 내 반성에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미안해집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죠. 서바이벌도 결국 노력을 즐기는 사람이 우승합니다. 하지만 과거 서바이벌 오디션에 그렇게 우승하고도 다시 서바이벌이 도전하는 사람도 여럿 존재하죠. 열정과 간절함은 왜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는 걸까요. 저는 이들의 한많은 사연에 매번 눈물범벅을 하며 서바이벌을 봅니다. 즐기자와 간절함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혼합된 열정의 무대를요. 저는 저 자리에 서면 한마디도 한움직임도 못 할 것 같은데. 유로파는 어떤가요? 누군가의 냉철한 시선이 꽂히는 무대에 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제 나름의 성공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유로파. 전 목적 없는 걸음을 잘 못합니다. 방향도 보폭도 속도도 모든 것이 갈피가 잡히지 않아요. 갑자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도 목적지 없이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합니다. 여기서 목적지는 목표지와 의미가 비슷합니다. 출발점을 나서려면 두 발로 도착할 어딘가가 필요합니다. 단, 곧바로 도착하진 않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맛있어 보이는 빵집도 들르고 귀여워 보이는 소품샵도 들르고 배고프면 밥도 먹고 걷다 힘들면 앉아서 책도 보고요. 어쨌든 그날 안에 목적지에 다다르게끔 움직입니다.  목적지의 영업시간과 인스타를 꼼꼼히 확인해야해요. 그래도 가끔 닫혀있긴 하지만요.. 


이건 저의 모든 행동 방식입니다. 목적지를 정해야 움직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잡다함을 즐기다가 어쨌든 일정에 맞게 목적지에 도달하죠. 성과주의자라는 편한 변명으로 과정에 담겨야 할 간절함을 빼먹은 거죠.


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나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과정을 선택했던 건데 목적지에 도달하려고만 하는 내가 진짜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이에게 편지책에 대해서 설명하며 과정이 아닌 목적에 초점이 맞춰진 설득과 욕심을 부렸습니다. 이미 말은 뱉어버렸고 조금 시간이 지나 반성했지만 이미 말은 뱉어버렸고요. 시간이 지나 반성이 자괴감으로 넘어갈랑말랑 하는 중입니다. 내가 윤이나 유로파에게 편지를 권했던 순간이 모두 변명처럼 느껴지려고 하거든요. 편지는 평소대로 보내고 싶을 때 보내고 싶은 말을 보내겠습니다. 유로파도 하고픈 말을 편하게 해주세요. 


우리, 나의 이런 별로의 마음에도 편지를 나누며 조금 가까워졌나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 편지로 만나요.

이전 06화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아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