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답장
유로파. 요즘은 다 마무리만 되는 시기입니다. 만들던 책도 글도 말도 마무리되었습니다. 무려 적금까지 만기 되었어요. 당분간 나아갈 곳을 없앤 저는 나를 되돌아볼 반성의 시간을 가질 줄 알았는데요. 그저 멈춰 있었습니다. 애초에 목이 뻣뻣해 돌아가지 않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앞만 보고 있더라고요. 좀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그래야 성장도 할 텐데 말이죠. 내가 그래서 발전이 없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건가 싶었습니다.
오늘은 비가 옵니다. 비가 와도 출근은 해야 하잖아요? 지하철 입구로 내려가는데 사람들이 우산이 팡팡 펴며 올라왔습니다. 누군가는 아주 튼튼하고 긴 우산을 누군가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캐릭터 우산을요.
마치 새로운 챕터로 나아가기 전 자신의 세계를 팡팡 보호하는 느낌이었어요. 어차피 삶은 새로운 챕터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멈춰 있어도 언젠가 찾아오겠죠. 조금씩 젖어가며 조금씩 바뀌며 내 세계를 보호하며 내가 나아갈 겁니다.
지금은 내 보호막을 예쁘게 꾸미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이왕이면 아주 사랑스럽게요.
큰 수술을 했습니다. 회복을 포함해서 최소 2주에서 크게 7월 전부의 일정을 비워야 했기에 정말 필요한 사람 이외에는 말하지 않았어요. 친함의 여부와 상관없이 일적으로 나의 빈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에게만 잠시 일정이 있어 연락이 안 될거라 일러두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예정된 수술이었기에 회사에는 입사 때부터 7월 일정을 비워달라 부탁드렸고 다행히 사정을 밝히고 싶지 않다는 저의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일부 결재를 위한 몇 관계자에게만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침대를 타고 수술실로 이동해서 머리 위에 눈이 부실 정도의 수술등이 켜지고 머리쓰개를 하고 호흡기를 낍니다. 마취젭니다- 깊게 들이마시세요-라는 말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가 처음 보는 천장이 나타나고 심장 박동기의 소음이 들립니다. 한참을 몽롱한 상태로 간호사의 바쁜 확인과 질문이 오가면 다시 그 상태로 입원실로 실려 갑니다. 팔에는 온갖 종류의 바늘이 꽂혀 링거에 연결되어 있고 손에는 무통 주사의 버튼이 쥐여집니다. 며칠 동안 밤새 혈압을 재고 피를 뽑고 약을 먹습니다. 그렇게 오늘 드디어 퇴원했네요.
거대하게 말했지만 사실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무통 주사가 너무 잘 들어 아픈 날도 없었습니다.) 몇 뒤늦게 소식을 캐묻던 친구들이 고생했다 큰일치뤘다 말해줬는데 너무 아무렇지 않았어서 조금 민망했습니다.
수술을 말하기 싫었던 건 걱정의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애초에 제가 큰 수술이라는 자각이 없었습니다. 저는 단지 빨리 해결해야 할 일 정도로 생각했고 ‘수술하면 당연히 아프지.’정도로 생각했거든요. 아픈 것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나을 테잖아요? 그래서 “어머, 어떡해.”라는 말에 퉁명스레 “뭘 어떡해. 아프면 아파야지 뭐.”할까 봐 밝히지 않았습니다. “잘될 거야.”라는 말에 안일하게 “의사가 잘 하겄지.”할까 봐요.
그래서 편지에 쓰는 것도 좀 망설였습니다만, 유로파는 수술 전부터 일정을 알고 있었으니 편지에서 나누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수술은 컸습니다. 세 시간 정도 걸려야 했죠. 저를 담당한 교수님은 굉장히 털털한 할아부지셨는데 자신께서 명의라 수술이 잘 끝났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약물이 잘 받는 몸이라 수술하기 편하셨겠다고 했죠.
병원 생활은 재밌었습니다. 검사부터 퇴원까지 장장 한 달 정도 병원을 드나들었는데요. 카리스마 넘치던 MRI 담당쌤부터 긴 생머리를 대충 묶고 전신 마취를 설명해 주던 남자 간호쌤, 입원 당일 냉면은 무슨 당장부터 금식해야 한다며 혼냈던 코디쌤, 수술실로 데려가며 오늘 뭐먹을지 묻던 간호쌤, 느린 제 걸음을 호흡으로 맞춰주던 편의점 직원분, 새벽마다 제 팔에 주사를 꽂으며 미안해하던 간호쌤, 자기만 알던 비밀 휴식 공간을 제가 갑자기 침범해서 스리슬쩍 자리를 비켜주던 어딘가의 직원분, 어리숙하게 상처를 드레싱하다 놀란 저의 찰싹임에 당황하던 인턴 의사쌤, 심각한 상황이라는 설명에 터진 저의 너털웃음에 같이 너털웃음을 보이던 교수님까지.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족히 30명은 만난 것 같아요. 그들과 인사하고 짧게 대화하며 즐거웠습니다. 저를 케어해 준 사람의 이름을 다 출력 받을 수 없다는 게 아쉬웠어요. 어딜가나 담당 교수의 이름밖에 없더라고요. 열심히 명찰을 관찰했지만 지금은 얼굴만 흐릿하게 기억납니다.
퇴원한 지 하루이고 아직 실밥도 풀지 않았는데 벌써 옛날일처럼 느껴지네요. 어쨌건 묵혔던 사건을 해결해서 아주 기쁘고 행복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던 부천의 한 책방이 있었는데요. 오프라인 매장을 오래 쉬다가 합정에 새로 열었다는 소식을 지금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때와는 도서 큐레이션 방향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들의 열정을 응원하기에 방문해야겠다 생각했죠. 퇴원 첫날부터 기분 좋은 스케쥴이 생겼다는 생각에 들떠있습니다. 기분과 다르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열을 한번 재보니 37도네요.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요리조리 몸을 굴려 나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 순간, 못 가겠구나. 알아버렸습니다. 내 걸음 속도가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한국인의 속도에 맞추어 타고 내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대로라면 분명 문에 끼어버리고 말 거예요. 이 속도로 걸어갈 자신도 없었습니다.
아쉬운대로 집 근처의 가고 싶었던 카페에 가기로 했습니다. 힙한 동네에 사는 덕은 이럴 때 보는 거죠. 지도를 돌려보다 저녁 6시에 마감이라 평소 가기 힘들었던 좋아했던 카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금 걸어야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겠다 싶었죠. 책방에 갈 생각에 책을 챙겨오지 않았지만 가방에 블루투스 키보드가 있었습니다. 유로파에게 편지를 쓰자는 생각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어요.
꾸준히 오래 걸어 도착한 카페는 여전히 예쁜 바 테이블이 저를 반겨두었고 마스터가 오랜만이라며 친절히 반겨주었습니다. 높은 테이블에 반쯤 걸터앉은 게 얼마나 편하던지요! 원두 맛을 상담하다 메뉴에 없는 묵직한 원두의 필터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키보드를 엽니다.
천천한 걸음을 꾸준하게 이어 도착한 평온함은 기분이 다릅니다. 뭔가 내 힘으로 평온함을 이루었다는 기분이 들어요. 일주일 동안 가보자 했던 모든 계획표에 줄을 긋고 모두 집 근처의 평온했던 경험의 곳으로 바꾸었습니다. 평소에 계속 새로움을 겪었으니 이 기회로 과거의 행복을 다시 돌아보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면 나중에 새로운 행복도 더 짜릿하지 않을까 싶어요.
오늘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75L 종량제봉투를 하나 샀습니다. 그러곤 집에 도착해 열이 펄펄 끓어 쓰러지듯 잠들었죠. 일어나보니 벌써 다음날입니다. 저는 사 왔던 종량제를 후후 불어 입구를 펼쳐 거실 중앙에 두었습니다. 방 곳곳을 뒤져 1년 동안 자의든 타의든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던 아이들을 긁어모아 넣었어요. 여기도 뒤져 넣고 저기도 뒤져 넣고 서랍을 탈탈 털어 넣었습니다. “언젠간 쓰지 않을까?”의 언젠가를 버렸습니다.
봉투는 가득 찼는데 이상하게 티가 하나도 안 납니다. 전혀 비어 보이지 않아요. 오히려 서랍 하나 만큼의 책이 우수수 생겨나 있었죠. 우리 집엔 가구가 별로 없습니다. 침대와 3단 서랍 하나, 거실 테이블 그리고 벽책장 6개가 있죠. 내가 가진 물건 중 절반 이상이 책이라는 게 예전에는 허세 부릴 만큼 좋았는데. 종량제를 버리고 그 자리에 앉아보니 여길 봐도 책 저길 봐도 책인 게 기분이 요상했습니다.
나의 연관 키워드가 책인 건 좋지만, 나의 대표 키워드가 책이길 바란 건 아니었어요. 그동안 두 눈 감고 모르쇠 했던 책 정리를 해야 할 때가 와버렸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좀 힘들겠어요.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든지에 많이 기대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든 갈 수 있지, 언제든 할 수 있지, 언제든 먹을 수 있지, 언제든 만날 수 있지 등이요.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언제든은 제 게으름이었구나 싶어요. 항상 “내가 서 있어야 내 주변도 서 있는 거야.”라고 말했는데 말뚝처럼 서 있으랴 미뤄진 언제든은 언제고 돌아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오늘도 나섰습니다. 나가서 쓰러져 돌아오는 일이 있어도 시간이 아까워서 일단 나갑니다. 다행히 물기에 젖지 않고 더위도 타지 않아 움직이기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유로파의 말대로 사랑하는 일을 못 해서 어떻게든 에너지를 분출하려고 하나 봐요.
과일 플레이트를 파는 자그만 3층의 카페에 왔습니다. 주인분 혼자 운영하는 카페에는 딱 세 개의 테이블이 있었죠. 하낙 비어 날름 앉아 과일 플레이트와 아아를 주문했습니다. 제가 앉은 테이블에는 작은 책장이 있었고 문학책 몇 권이 있었어요. 햇볕을 드는 라인을 따라 작고 큰 화분이 많았습니다.
휴무라서 예쁜 곳을 올 수 있었다는 생각과 평소에도 올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이 여러 번 겹칩니다.
오늘 방문한 집 앞의 작은 카페는 오랜 주인분이 드립 커피를 내립니다. 테이블마다 생화가 있는 게 좋더라고요. 옆에는 예쁜 문구가 적힌 메모도 있어, 세심함의 힘을 느낍니다.
읽으려고 가져온 책에서 마라탕 가게 방문기 에피소드를 봤습니다. 작가는 마감 시간이 가까운 마라탕 가게에 가 주문을 했습니다. 홀 직원과 요리사는 일하기 싫어 보였죠. 맛있어 보이는 마라탕이 나왔지만 이건 싫음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본인께서도 매번 마감이면 글쓰기싫어, 마감하기싫어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 싫음의 결과물을 독자에게 보인 셈이죠.
이 구절에서 정말 많이 반성했어요. 그렇게 드디어 회사 복귀 날입니다. 출근해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업무를 합니다. 내가 먼저 재밌어야 내가 제공하는 것이 고객에게 재밌게 다가가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으쌰으쌰 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남들은 다 큰일이라고 하는 쉼을 겪고 돌아온 일상에는 정말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반성하고 작정한 으쌰으쌰는 며칠 새에 사라졌습니다. 일도 여전하고 나도 여전한 게, 밥을 먹다가 갑자기 신물이 나더라고요. 큰일을 겪으면 사람이 변한다던데 큰쉼도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여전하지 않으려는 동력을 얻었다 생각했어요. 그전까지는 일이 일을 불러 쉼이라곤 차마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강제로라도 쉬고 나니 한 번씩은 쉼표를 찍어야 할 때 찍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이 여전한 굴레를 끊어보려고요. 붙잡고 있던 미련을 그냥 그곳에 내려두고 새로운 챕터를 개척해 보려고요. 내가 지금 쳐다보는 이 길이 나에게 어떤 성취감을 안겨줄지 반짝반짝합니다.
우리는 또 다른 챕터를 향해 걸어가고 사이에 가끔 다리를 내려 만나겠죠. 그리고 또 일 얘기를 하고 사랑 얘기를 할 겁니다. 아직 많은 월요일이 싫겠지만 아직 많은 월요일이 남았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월요일에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