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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Mar 26. 2023

신경이 쓰입니다.

여덟 번째 답장

책을 사고 오는 길입니다. 이래 봬도 근무 중입니다. 맞아요. 근무 중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중요 우선순위를 메길 수 없는 업무가 여럿 쏟아지면 저는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다툴 때 대화하면서 풀어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잠시 나만의 동굴에서 회고하는 사람인 거죠. 궁금하네요. 유로파는 싸우면 맞는 말만 골라서 팩트로 조목조목 때릴 거 같은데 실제론 어떤가요? 우린 싸우지 맙시다. 절대 제가 질 거 같아서 그런 건 아니고요.


회사 뒤편 골목에는 예전부터 지도 앱의 ‘가보고 싶다’ 폴더에 저장해두었던 책방이 있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아있던 저의 몸은 잠시 머리를 피신할 동굴을 찾아 책방으로 향했어요. 따듯한 책방지기의 인사와 가지런한 서재와 전시 중인 그림이 시들한 마음에 안정을 찾아줬습니다. 때마침 이달의 책이 화가 할머님의 책이었어요. 짧은 문장으로 한 페이지를 채운 책으로 마치 글귀 카드를 넘기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님의 소녀소녀한 말씀은 아주 사랑스러웠고 그렸던 그림도 아주 사랑스러웠습니다. 모지스 할머님의 <인생의 봄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입니다.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 말씀을 하셨던 분일까요! 저는 이 책을 회사로 돌아와 해가 잘 드는 책상 옆 창틀에 두고 함께 받은 엽서를 그 위에 붙여두었습니다. 동굴이 필요 할때마다 한 장씩 펼쳐보려고요.


제가 소비하는 때는 대체로 동굴을 대신할 것을 찾을 때입니다. 그래서 물건보다 공간일 때가 많습니다. 유로파도 잘 아는 카페 몬스터케이브는 이름부터 동굴이군요. 카페나 미술관도 가지만 책방엘 더 많이 갑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가서는 순간부터 행복해져요. 오밀조밀 취향을 살펴보는 일도 행복하고 수줍게 나누는 책방지기와의 대화도 행복합니다. 책을 사는 것도 저에겐 미니 동굴을 사는 느낌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나만의 작고 소중한 동굴로 이끌어주는 존재랄까요. 그래서 동굴에 가면 꼭 미니 동굴을 삽니다. 미니 동굴을 소유했다는 그 소유감에서 행복을 느끼거든요.


책을 읽는 모습은 여러 가지잖아요. 저는 책을 여행하듯 봅니다. 기승전결, 주제, 스토리보다 그냥 그곳에 있는 것을 읽습니다. 왜 여행지에 가면 사람을 관찰한다고 했었잖아요. 그런 마냥 동굴에 있는 작가를 관찰합니다. ‘이런 묘사를 하다니 작가는 평소에 하늘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길래?’라거나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이 생각을 퇴고했을까.’라거나요. 그래서 문학보다 작가의 의도 파악이 조금 더 편한 비문학이나 에세이류를 즐겨 관찰합니다. 그렇기에 에세이류가 많은 독립출판은 작가의 날것과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 저의 충분한 동굴이 됩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유로파의 동굴은 세계 각국에 있습니다. 벗어나고 싶을 때 여행을 간다는 말이 이해갑니다. 제가 그동안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았던 것은 충분히 벗어날 곳이 당장 주변에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느꼈고요. 우리 함께 갔던 대학로의 한 책방에서 마치 유로파가 여행지에서 보이는 표정을 제가 짓고 잇지 않던가요? 








입사한지 얼마 안 되어 퇴사자와 마주쳤습니다. 자연스럽게 회사에서 마주쳤고 자연스럽게 선임이 소개했습니다. “이분은 퇴사자예요.” “안녕하세요. 퇴사자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퇴사하고도 매일 회사 1층의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신기한 사람입니다. 퇴사자라면 절대 회사 근처에도 안 갈 거 같은데 말이죠. 하루에 온갖 지점을 다니는 저와 회사 1층에 매일 있는 퇴사자는 자주 마주치진 않았지만 마주치면 눈인사했습니다. 마주치는 눈인사에서 퇴사자는 현직자의 업무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현직자는 퇴사자의 왜 굳이 여기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죠.


저는 저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에게 초점을 놓지 못합니다. 잠깐의 대화든 가벼운 톤이든 허투루 하지 않는 이야기를 잘 구분합니다. 눈을 보며 대화하잖아요. 저는 초점이 맞춰진 사람과는 눈을 잘 못 마주치겠더라고요. 얘기를 들은 제 표정이 이상할까 봐요. 초점이 맞춰지면 계속 그 사람을 관찰합니다. 대외적이지 않은 성격은 뭔지, 감정을 표할 때 표정은 어떤지요.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건 내가 그 사람을 관찰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유로파가 그랬었죠? ABC를 건너뛰고 D를 말하거나 물어본다고. 그건 ABC의 답변을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저는 그 사람을 많이 관찰했으니까요.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요. 특히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 털어놓는 사람은 더 신경이 쓰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재밌게 타인에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는 사람은. 그게 익숙하다는 건 도와달라는 반증이라고 생각 들거든요. 룸메는 내가 착해서라고 하고 윤은 손 내미는 버릇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냥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한 달 만에 타로카드 프로젝트 미팅을 했습니다. 매번 온라인으로 만나다가 서촌의 한적한 카페에서 만나니 좋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프로젝트가 될지 머리가 터지다가 잠시 쉬는 동안, 일 얘기만 하느라 나누지 못한 인사를 그제야 나눴습니다. 힙한세대 답게 MBTI로 서론을 뗐죠. 제 이야기를 들은 일러스트레이터분이 깜짝 놀라며 “저 남자친구가 ENTP인데 사람 관찰을 진짜 많이 하더라고요. 이아님도 그러세요?” 했습니다. 거기에 저는 더 깜짝 놀랐죠. 아니 여기서까지 MBTI가 나온다고? INFJ를 귀여워한다는 성향까지 일반화된 자신에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INFJ 귀엽죠.. 귀엽긴한데..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게 일반화되었다니 머쓱코쓱했습니다. 


그렇대도 관찰은 지속할 거지만 말이죠. 신경이 쓰이니까요.








동굴을 찾아 근처 카페로 피신을 왔습니다. 요즘 따라 곳곳에서 불친절한 직원과의 에피소드를 들어서인지 이곳에서도 예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하지만 곧 나려온 맛있는 홍차와 까눌레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맞물려 포근함을 만끽했습니다. 아주 잠시 꿀 같은 힐링 시간이었어요. 밀린 업무를 후다닥 해치웠던 게 아주 멀게 느껴졌습니다. 있던 손님이 하나둘 나가고 나 혼자 조그만 카페를 독차지해 더욱 포근한 동굴에서 쿠션을 안고 까눌레를 와그작아그작 느꼈습니다. 왜 항상 느리고 싶은 시간은 빠른 걸까요. 쿠션의 포근함은 여전한데 나의 포근한 시간이 끝나버려 남은 홍차를 들고 직원에게 가 바깥용 컵으로 바꾸어달라 요청했어요. 어차피 나갈 거라 까눌레를 받쳤던 접시와 코스터를 함께 가져갔죠. 직원은 그걸 보더니 왜 가지고 왔냐고 물었습니다. 잠깐 당황해서 '앗.' 했더니 사용한 것은 테이블에 둬 달라고 분명히 전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눈이 마주쳤죠. 날카로운 눈매에 눌려 전 홍차의 잔을 바꾸는 동안 들고 왔던 접시와 코스터를 다시 앉았던 자리에 놓았습니다. 주문할 때에도 홍차의 블랜드 종류를 묻는 말에 친절하고 싶지만 신경질이 붙어있던 직원의 대답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예쁘고 맛있어도 다시 가지 않을 장소가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유로파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우린 다르지만 서로를 재밌어하나 봅니다. 


만보기를 설치했습니다. 걷는 일이 많기에 세어 보고 싶었거든요. 처음 이틀 정도는 천보 이천보 올라갈수록 뿌듯했어요. 걸음 수만큼 내 노력이 쌓는 기분이었죠.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만보는 금방 걷더군요. 걸음이 내 노력 같았던 순간은 없어지고 금방 평범해졌죠. 보통의 직장인이 되었음을 실감했습니다. 토스 만보기를 쓰는데요. 하루 일만보를 걸으면 축하한다는 메시시지와 자랑하라는 왕관 페이지를 보여줍니다. 걸으면 10원 20원 쌓이는 쏠쏠함도 있지만 한 번도 자랑하지 않은 나만 보는 왕관이 나의 매일을 평범하게 응원합니다. 


유로파와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죠. 비슷한 얘기를 지인과 나눴습니다. 저는 그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는 저를 친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룸메와도 친구가 없다는 얘기를 자주 나누는데 막상 룸메와 저가 친하냐고 물으면 둘 다 물음표를 띕니다. 유로파가 저에게 친한 사이의 기준을 물어봤었죠. ‘시간에 상관없이 연락할 수 있는 사이’라는 대답을 길게 변명해보려 합니다. 보통 이른 시간이나 늦은 시각에 연락하지 않잖아요. 개인 시간을 배려해야 하니까요. 시간에 상관없이 연락한다는 건 내가 상대의 개인시간을 방해해도 괜찮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내용도 지극히 사적이거나 지극히 아무 의미 없는 얘기겠죠.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건 벽이 없는 편함입니다. 


관계는 대화에서 형성된다 생각합니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정보를 얻고 언어의 온도를 아니까요. 대화가 잘 통한다는 건 언어의 온도가 비슷하다는 얘기입니다. 온도가 비슷하다는 건 결국 성향이 비슷하다는 거고요. 하지만 그게 친한 관계냐 물으면 또 어렵습니다. 저는 그와도 룸메와도 자주 연락하고 잘 놉니다. 쓸데없이 기준치가 높은 걸까 생각해봤는데요. 맞아요. 근데 왜 기준치가 높은 걸까요? 서로 배려를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해야 친하다고 느껴져서 그런 걸까 싶어요. 하지만 배려하지 않고도 편하다는 건 정말 가지기 어려운 관계겠죠.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다 읽었습니다. 여기서 '스페이스'를 생각해보게 됐어요. 우리가 지금도 흔히 누르는 '스페이스 바'요. 스페이스는 공간이자 우주입니다. 단어 사이에 쓰는 스페이스도 무한한 공간이자 우주입니다. 우리는 단어에서 함축된 의미를 찾곤 하지만 사실은 단어 사이의 공백에 함축된 무언가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마치 비밀 잉크로 써놓아서 보이지 않는 글자가 숨어있을지도 모르죠.


문단을 시작하기 전 들여쓰기를 합니다. 문단의 시작을 알려주기도 하고 미관상의 역할도 합니다. 이 여백은 프로그램에서 미리 설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설정하지 않고 수동으로 스페이스바를 두 번 누릅니다. 문단을 쓰기 전 스페이스 바 두 번은 저에게 '자, 이제 시작하자.'는 마음을 줍니다. 짧게 울리는 탁탁 소리 두 번을 시작으로 문단이 끝날 때까지 쉼 없이 들리는 타자 소리는 리드미컬한 음악처럼 느껴집니다.


오늘은 이렇게 유로파에게 쓸 편지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탁탁 두 번의 무한한 곳에서 친함의 마음을 숨겨두고요.








유로파는 신호등을 어떻게 건너나요? 지금 막 초록불이 켜진 걸 발견했고 나와 건널목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있다면 뛰나요? 저는 일단 멈춥니다. 뛰지 않고 빨간불이 될때까지 처언처언히 걸어 도착해 다음 신호를 기다리죠. 가끔 신호등마다 시간이 달라서 차라리 뛰었으면 벌써 건넜겠다 싶은 신호도 많아요. 나를 지나쳐 뛰던 사람들이 다 건너 골목으로 사라지고도 아직 초록불인 경우를 꽤 만났습니다. 초록불은 생각보다 길어요. 하지만 이미 건너가는 사람들을 발견한 사람은 대부분 뜁니다. 뛰는 사람을 보며 아직 초록불이 한참 남았는데 걸어가도 될 텐데 생각합니다. 정작 저는 멈춰서 기다리면서요. 그러면서 또 생각합니다. 타이밍 맞게 앞서가는 사람을 뒤따라 뛰는 사람이 기회를 잡는 걸까 하고요. 나를 지나며 뛰었던 사람이 내가 타려던 버스에 탄 걸 본 적이 있었거든요. 저는 놓쳤었고요.


하지만 괜스레 토스 만보기를 누르며 뭉그적거리다가 빨간불로 바뀌고서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휴 하며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데 옆에 한 사람이 서더니 자기 주먹에 계속 뽀뽀하더라고요. 물음표를 띄고 슬쩍 봤더니 주먹 사이에 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다쳤나 봐요.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더라고요. 새 주인은 저와 건널목을 함께 건너 골목을 걷다가 화단에 피어있는 꽃을 구경했습니다. 주먹에 감겨 있던 새도 기웃하며 꽃을 구경했어요. 예쁜 장면을 만났습니다. 


오는 길가에 필랑말랑하는 목련을 만났습니다. 개나리도 만났고요 진달래도 만났습니다. 집 앞 거리에서는 흐드러질 준비를 하는 벚꽃도 만났어요. 인스타 프로필에 두었던 노션페이지는 아주 편하게 쓰고 있어요. 일단 하는 과정이 귀찮지 뭐든 해두고 나면 잘 핍니다. 마음도 먹기가 어렵지 막상 먹고 나면 잘 자라고요. 꽃은 결실이자 새로운 시작의 모습입니다. 낮과 밤의 시간이 같다는 날부터 씨를 뿌리기 시작하고 꽃도 피기 시작하죠. 저는 어쩌면 제 이름을 지었을 때가 내 씨앗을 뿌렸을 시기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꽃이 필랑말랑 했던 거죠. 많은 꽃을 피웠습니다. 많은 과정도 겪었고요. 많은 마음도 먹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모든 이해가 된다면 힘들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이해당하지 못한다면 슬플 거라 생각해요. 사랑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호의와 호감을 저울질하고 호불호를 따지죠. 저는 운이 좋게도 나쁜 사람을 못 만나서인지 사랑에 상처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잔잔하고 오래 유지됩니다. 화르륵 불타오른 적은 없어요. 베리 익사이팅하고 골져스하고 스펙터터클하고 그래야 사랑을 이야기하는 맛이 있을 텐데 제 사랑은 늘 조용하기만 해서 얘기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 앞에서만 보이는, 특별히 평소와 다른 면이 없기에 연인으로서 감정적인 메리트가 없었던 제 사랑은 대부분 차였습니다. 지금은 그 결과로 쓸데없이 눈만 높아졌죠. 


아주 오랜 사랑은 추억이 되기도 합니다.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친구는 7년인가 8년인가를 좋아했어요. 잘 보이고 싶은 긴장감에 실수도 많이 했지만 덕분에 많은 감정을 배웠습니다. 떨어지는 벚꽃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예쁜 미신을 믿으며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녔죠. 그러고 보니 곧 벚꽃이 필 시기입니다. 이제 제발 그만 추웠으면 했는데 또 막상 겨울이 가니 섭섭하네요. 작년의 벚꽃은 윤과 보았습니다. 올해의 벚꽃은 유로파와 보면 좋겠네요. 저희집 앞 골목부터 한강까지 쭉 이어진 벚꽃로 산책 어떠신가요? 같이 걸으면서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며 서로의 사랑을 소원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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