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욕망을 극복하고 이성을 활용하고자 했던 오래된 노력, 그리고 현재
이전 글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대한 얘기를 주로 언급하며 이성을 매개로 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자세에 대해 언급했었다. 핵심은 신은 인간이 지켜야 할 율법을 준 적이 없으며, 그저 이성의 부름에 따른 삶이 자연법에 따르는 삶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고대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기본적인 사상이다.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가려면 인간 이성(logos) 내의 '정념'을 없애야 하는데 정념이란 인간의 이성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 물론 기본적인 필수적 욕망을 모두 없애라는 뜻은 아니며 그저 욕망과 고통에 동요되지 않을 정도의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그렇게 해서 욕망에 초연하고 마음의 평정을 찾으면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불리는 정신상태를 지니게 되는데 스토아학파는 이것을 '자연법에 따르는 정신상태'라 생각했다. 모든 정념에서 해방되면 비로소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게 된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일에 대한 태도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개인에게 생기는 언짢은 일, 심적인 고통, 타인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상황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감정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나를 상처입히는 것은 상처입히는 행위 자체가 아닌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때문이다.
스토아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주었지만, 인간의 판단을 통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 한 임원(이사)으로부터 엄청난 폭언과 욕설로 고통받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일어나기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저 눈치보기 바빴던 신입사원 시절에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았었는데, 그때마다 날 상처입히는 것은 저 사람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나의 감정이라는 것을 계속 생각했다. 다행히 이런 자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큰 처방이 되어 개인적인 상처를 추스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용서의 여부는 별개의 얘기지만.
앞서 말한 정념과 여러 감정의 억제를 통한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파테이아(apatheia)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추구하는 아타락시아(ataraxia)와 대비된다. 여러 사람이 오해하고 있고, 그리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듯이, 에피쿠로스 학파는 개인을 보호하고 삶에 활력을 주는 범위에 한해서 '점잖은' 쾌락을 추구한다. 아타락시아라는 말 자체가 허황된 욕망 없이 내적의 쾌락을 추구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스토아 철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 키케로, 세네카에 의해 더 발전하게 되었다. 키케로는 저서 '노년에 관하여'에서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에 죽음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에픽테토스는 죽음이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인간을 두렵게 한다고 했다. 현대의 비트겐슈타인은 죽음을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죽음은 삶에서 일어나는 그저 그런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들어선다면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이다. 제한 없이 펼쳐진 이 길에서 우리의 삶에 끝은 없다." 논리-철학 논고, 6.4311.
즉,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며 체험될 수도 없으므로 언급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범신론자라는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삶의 경계에 대해 접근하는 시각은 유물론적이고 범신론적이다.
세네카는 죽음에 대해 걱정하기보다는 삶을 얼마나 채워나가며 사느냐에 중점을 두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고 한탄하기 전에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삶을 살아가야 하고, 나이가 들어서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 미리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 철학을 자본주의적, 혹은 극단적으로 발전시켜 현대철학에 영향을 준 사람이 아인 랜드이다.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랜드도 인간이 세상을 정복하고 살 수 있었던 원천은 인간 이성의 활용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성의 거부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생존 수단의 거부라고 보았다. 인간 이성의 적극적 활용을 위해서는 '생산적 성취'가 인간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60년대, 월남전의 영향으로 전쟁에 반대하고 자연과 조화하는 삶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히피의 사상을 위에 끼워 맞출 순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마약과 난교 등의 쾌락 추구와 기존 도덕관념의 거부라는 측면에서 인간 이성의 활용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므로 인정받을 수 없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컬트 문화와 살인, 신비주의적 측면으로 빠지면서 히피에 대한 대접은 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히피문화를 주도했던 미국의 리무진 리버럴(쉽게 말하면 강남좌파)들은 히피 집단이 와해하기도 전에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면서 '여피(Yuppie)'족이라 불리는 신규 문화를 형성했다.
제목은 범신론에 대한 이야기지만 인간 이성의 실현 방법론에 대한 얘기가 더 많이 나왔다. 신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냐는 논쟁은 삶의 지향점을 어디로 두냐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인간 이성을 기초로 삶의 번민을 돌파해보고자 했고,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논증하려고 했던 시대가 고대 그리스 사상을 바탕으로 한 헬레니즘(Hellenism)이었다면, 윤리적 그리고 신적 의지를 통해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헤브라이즘(Hebraism) 사상이다. 그리고 범신론은 헤브라이즘의 유신론적 세계관에 인간 이성을 중시한 헬레니즘적 접근법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조금 더 전자에 기운).
범신론은 결국 신이 세상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건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의 전지전능함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유신론자가 접근하기에는 쉽지 않은 사상이다. 자칫하면 신앙이 흔들릴 수 있는 단초를 스스로 제공하게 되는 까닭이다. 여기서 범신론은 또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그 초월성은 없다는 범신론과,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또한 초월성까지 지니고 있다는 범재신론으로 구분된다.
(3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