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땐 써야지, 아주 즐겁게 말야
시간은 약이다.
슬픔, 상처, 치욕, 고통, 실망, 이 모든 것을 잊게 하는 힘은 오직 시간에만 있다.
할아버지는 대학 입학부터 졸업까지 나를 엄청나게 갈궜다. 그런 시원찮은 대학에서 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 선비들만 있는 집안에서 왜 굳이 기술자가 되려고 하느냐 등등(어른들 시각은 사농공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큰 집만 가면 갈구는 할아버지와 제발 좀 그만 하라고 소리 지르는 할머니, 자꾸 그러시면 앞으로 안 데려올 거예요 라고 울분을 토하는 어머니.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20대의 날 정말 슬프게 한 사람도 할아버지였지만,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한 사람도 할아버지였다는 것이다. 혹독하게 갈구면서도 학부 8학기와 대학원 4학기 등록금까지 전액을 다 내주신 할아버지였다. 그러면서도 따로 두둑이 주시는 용돈과 함께. 결국 20대의 내 삶의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나의 또 하나의 아버지,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등록금이 얼마가 나오던 상관없었다. 중간에 장학금을 받아도 원래 등록금 금액을 보내주셨다. 장학금은 네가 잘해서 받은 것이니 네가 번 돈이나 다름없다는 할아버지의 생각. 이때 결심했다. 내가 장차 가족을 가지게 되면, 적어도 교육만큼은 모두 지원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자는 것, 혜택을 입은 만큼 가족에게 보답하며 살자는 것.
그 이전 군대 시절에 영감을 주는 일이 있었다. 외출 후 복귀하는 길에 보신탕집에서 한 그릇 하려고 들어갔다. 옆 테이블 손님이 얘기 중이었는데 들어보니 매형, 누나, 그리고 남동생으로 보이는 3인이었다. 남동생은 풀이 죽어 고개만 숙이고 있고 누나는 매섭게 쏘아보며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매형이랑 내가 지금까지 준 돈이 얼만지나 아냐, 철이 들어야 믿지 진짜 못살겠다라며 동생을 혼내고 옆에서 매형은 너무 그러지 말라고 아내를 말리는 모습이었다. 거기서 나는 나의 미래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민폐를 끼치는 동생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사실 내가 살면서 본 거의 모든 남동생들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친척이나 남이나 일단 '남동생'이라는 구성원은 그 형, 누나, 부모에게 끊임없이 빌붙어사는 철부지들만 있었다. 그래 큰 욕심 내지말고 적어도 1인분만 하자,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동생이 되어보자. 23살 때 한 결심은 딱 30살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난 내 20대를 만족하지 못하며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아버지가 3만원을 쥐어주시며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고 쓰고 오라고 하셨다. 여행기간 동안 사먹은 건 칙촉(1,200원) 하나였고 잔돈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갖다드렸다. 칭찬할 줄 알았던 아버지는 내가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는 줄 아냐면서 오히려 화를 냈다. 당시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중학교 소풍 때, 월명동 공설운동장에서 나운동 아파트까지 5km를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택시도 아니고 버스비가 아까워서 그랬다. 역시 아버지는 내가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는 줄 아냐면서 다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