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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캥 Jul 08. 2020

할아버지는 멋진 구두쇠였고, 손자는 찌질한 구두쇠였다

쓸 땐 써야지, 아주 즐겁게 말야

지금까지 끄적였던 브런치 글들을 돌아보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글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내용을 꼭 적게나마 언급했었다는 것이다. 밖에서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누가 먼저 묻지 않는한)먼저 꺼낼 일도 없고, 나 자신도 살아오면서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에 대해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글로써 생각을 표현하다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둔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종종 나왔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즐기는 모든 취미는 아버지와 조금씩 관련이 있다. 내게 가르치거나 해보라고 하는 방식이 아닌, 그저 아버지 당신이 즐기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따라하게 되었던 것 같다. 클래식 음악과 올드팝을 즐겨 들었고, 서재에는 인문학, 철학, 미술 서적이 늘 꽂혀있었으며 틈만 나면 비디오가게에 들러 신작 비디오를 빌려오셨다.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성룡의 영화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볼 수 있었는데 영화에는 좀 관대한 분위기라 청소년 관람불가의 영화도 아버지와 함께라면 봐도 무방했다(어머니는 그걸 싫어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많은 경험을 하기 원했다. 누나들이 대학생일 때 했던 말씀이(내가 초~중딩때), "알바같은 거 하지마라, 그 시간에 학원을 다니면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차를 사줄게.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이런 말들이었다. 고향에서 어머니와 내가 있을 때 하신 말씀이라 누나들이 실제로 이런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듣지 않았더라도 전국권에서 놀다 상경한 누나들이었으니 무척이나 기특해서 기꺼이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얘기는 질리도록 했으니 빼자. 스트레스와 함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키는 이때 다 커버렸다). 어머니는 늘 우울해했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전화로 싸우는 일이 잦았다. 아들이 세상을 떴으니 남은 손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던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댔고 집에만 있기 힘들어 외출이 잦았던 어머니는 집에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문제는 전화할 때마다 며느리가 없으니 가정을 지키지 않고 어딜 싸돌아다니냐 이러면서 잔소리가 늘고, 한 성질 하는 어머니도 맞받아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나도 사춘기 때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마찰이 끊임없이 생겼고 워낙 감성적인 가족들이라 좀처럼 가장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했다. 학교생활은 원만하지 못했고 시비를 거는 녀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교 3등으로 졸업했던 중학교 졸업시험이 무색하게 고등학교 1학년 기말고사가 전교 100등 밖을 찍었을 때 이대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 기숙사에 들어갔다.



시간은 약이다.
슬픔, 상처, 치욕, 고통, 실망, 이 모든 것을 잊게 하는 힘은 오직 시간에만 있다.


3년이 지나도 망자를 잊지 못하고 우울해하면 그것은 정신병이라고 누군가에게서 들었다. 다행히도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은 범인의 범주에 있어서 흉터는 남아있을망정 상처는 치유된 듯 보였다. 시간이 흘러 대학에 입학했고, (누나들 성적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폭망한 성적이지만 재수할 힘은 없었기에 일단 안전빵으로 지방대 하나에 소신지원 인서울 두 곳을 넣었다. 예상대로 하향지원한 모 대학만 빼고 다 떨어졌다. 그렇게 평생 지방에 살다가 또 다른 지방의 학교에 다닐 준비를 하던 차, 인서울 중 한 곳의 후보들이 줄줄이 입학을 포기해서 말 그대로 문 닫고 입학을 하게 되는 행운을 맞았다.


"이제 내가 살겠구나!"


합격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의 첫 반응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굉장히 기뻐한 것으로 생각했다. 근데 그건 할아버지 기준에서 일단 손자가 (할아버지 기준으로)사람 구실은 하게 되었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할아버지는 대학 입학부터 졸업까지 나를 엄청나게 갈궜다. 그런 시원찮은 대학에서 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 선비들만 있는 집안에서 왜 굳이 기술자가 되려고 하느냐 등등(어른들 시각은 사농공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큰 집만 가면 갈구는 할아버지와 제발 좀 그만 하라고 소리 지르는 할머니, 자꾸 그러시면 앞으로 안 데려올 거예요 라고 울분을 토하는 어머니.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20대의 날 정말 슬프게 한 사람도 할아버지였지만,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한 사람도 할아버지였다는 것이다. 혹독하게 갈구면서도 학부 8학기와 대학원 4학기 등록금까지 전액을 다 내주신 할아버지였다. 그러면서도 따로 두둑이 주시는 용돈과 함께. 결국 20대의 내 삶의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나의 또 하나의 아버지,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등록금이 얼마가 나오던 상관없었다. 중간에 장학금을 받아도 원래 등록금 금액을 보내주셨다. 장학금은 네가 잘해서 받은 것이니 네가 번 돈이나 다름없다는 할아버지의 생각. 이때 결심했다. 내가 장차 가족을 가지게 되면, 적어도 교육만큼은 모두 지원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자는 것, 혜택을 입은 만큼 가족에게 보답하며 살자는 것.


할아버지가 정말 미웠던 적도 많았지만, 내 인생 전체를 들여다보았을 때 날 가장 많이 생각하고 사랑해주신 분은 할아버지였다. 아들을 일찍 보내면서도 할아버지가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내가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난 할아버지의 삶의 목적이었다. 그 후 중환자실에서 신음하실 때 한 번, 회사에서 임종을 전해듣고 고향에 내려가는 길에 또 한 번, 평생 쑥스러워서 직접 드리지 못했던 감사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울면서 두 번밖에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은퇴 전엔 은행가였다. 그리고 부자였다. 아버지가 교사 일을 하시다 대학원에서 박사 준비를 하고, 그러면서도 한때 고향에서 제일 넓은 아파트에 살 수 있었던 것도 할아버지 덕이었다. 그렇게 평생동안 모은 재산은 할아버지 당신은 자유롭게 누리지도 못하고 자손들을 위해 모두 써 버리셨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할아버지는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사셨다.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특히 금전적으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자는 내 삶의 모토가 형성되었다. 내가 누리는 풍요는 모두 가족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내가 모으는 모든 재물은 내가 아닌 장차 내가 가질 가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세상이 얼마나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은 내 관심사항이 아니다. 내 가족이 행복한 삶만 살 수 있다면 빨갱이가 대통령이 되든, 무당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건 상관없다. 그 후 1년여간의 취준생 생활을 종료하고 드디어 제대로 돈을 벌기 시작할 때, 삶의 목표 제1순위를 정했다. 바로 나 자신이 내 할아버지가 되는 것.


그 이전 군대 시절에 영감을 주는 일이 있었다. 외출 후 복귀하는 길에 보신탕집에서 한 그릇 하려고 들어갔다. 옆 테이블 손님이 얘기 중이었는데 들어보니 매형, 누나, 그리고 남동생으로 보이는 3인이었다. 남동생은 풀이 죽어 고개만 숙이고 있고 누나는 매섭게 쏘아보며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매형이랑 내가 지금까지 준 돈이 얼만지나 아냐, 철이 들어야 믿지 진짜 못살겠다라며 동생을 혼내고 옆에서 매형은 너무 그러지 말라고 아내를 말리는 모습이었다. 거기서 나는 나의 미래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민폐를 끼치는 동생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사실 내가 살면서 본 거의 모든 남동생들은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친척이나 남이나 일단 '남동생'이라는 구성원은 그 형, 누나, 부모에게 끊임없이 빌붙어사는 철부지들만 있었다. 그래 큰 욕심 내지말고 적어도 1인분만 하자,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동생이 되어보자. 23살 때 한 결심은 딱 30살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난 내 20대를 만족하지 못하며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다.


손재주가 좋았던 할아버지는 가전제품을 사면 코드선을 가위로 잘랐다. 그리고 스위치를 구해서 전선을 연결했다. 플러그를 계속 꽂아놓으면 전기세가 나가기 때문이었다. 말년에는 기력이 없어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 여러 가전에 스위치를 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 옛날, 팬턴트형 스위치


더운 날이어도 에어컨은 손자가 놀러 올 때나 겨우 트는 물건이었고, 독실한 기독교도셨지만 어머니에게 십일조를 하라는 할머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시며 어디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화를 내셨었다. 거기에 들어가는 돈도 결국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쓸 돈이었던 것, 할아버지에게 자녀들 특히 친손인 나의 존재는 신앙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입사 첫해의 흥분에 따른 돈지랄을 제외하고,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돈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자세로 살아왔다. 택시는 일절 타지 않았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중고나라를 뒤졌으며, 옷은 가끔씩 어머니나 누나들이 도저히 못 봐주겠다고 말하며 사주는 것만 입었다. 팬티와 양말은 구멍이 날 때까지 입었고 아니 구멍이 나도 계속 입었다. 인터넷 최저가가 아니면 물건도 사지 않았으며 가계부는 10원 단위, 아니 1원 단위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냥 이게 옳은 것으로 생각했다. 고액 연봉도 아니고 인생을 거의 무상으로 살아온 주제에 YOLO나 FLEX는 감히 즐길 수 있는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입사 n년만에 1억 원 언저리를 모았을 때쯤(어머니에게 드리는 집세와 용돈을 제외하고도) 그래 이렇게 살아온 보람이 있구나 하며 나 자신의 삶이 정답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나 자신이 할아버지보다 더 대단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해 겨울, 사건 하나가 터졌다.



타 부서에 볼일이 있어 회사 트럭을 몰고 가던 겨울날이었다. 길이 유난히 얼어있었지만 별생각 없이 속도를 내며 달렸고, 과속방지턱을 넘자마자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왼쪽에서 나란히 달리던 대형 트럭을 들이받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핸들을 튼 순간, 앞의 가로수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눈 앞으로 유리가루가 쏟아졌고 양쪽 무릎이 핸들 밑으로 파고들었으며, 왼쪽 창문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쳤다. 이때 아마 3초 정도 기절했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느낀 것은 목에 박힌 유리들, 엄청난 소음으로 공회전하던 엔진이었다. 침착하게 시동을 끄고 난 후 처음으로 중얼거린 말, "죽지는 않았네", 그리고 "두 다리도 멀쩡하네, 무릎이 좀 아프긴 하지만"


실제로 죽었다 살아나면 욕이 나오긴 한다.


경찰 말로는 조수석에 누군가 있었으면 바로 사망이었을 거라고 했다. 119 구급대원은 엠뷸에 태우기 전에 목 보호대를 끼워야 한다고 했고, 목에 유리가 너무 많이 박혀있어서 어렵다고 하자 절차상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목에 강제로 끼워넣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구급대원을 패는건가. 바로 관동가톨릭병원으로 이송됐고 스트레스에 찌든 응급실 의사는 내 무릎을 마구 당기고 주먹으로 치면서 아파요? 아파요? 를 연신 물어봤다. 이래서 사람들이 응급실 의사를 패는건가. 물론 나는 유순하고 직장을 잃으면 안 되는 일반인이기 때문에 구급대원에게도, 불친절한 의사에게도 별다른 컴플레인을 걸지 않았다. 이렇게 글로 뒤끝을 남기지.


병원에 5일 간 입원해있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더듬고(심심하면 하는 짓 중 하나지만) 최근 5~6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보니 처음으로 돈을 잘못 써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아끼며 살 필요가 없었다. 돈을 많이 쓰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방법을 알고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었지만, 풍요롭게 살아왔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를 묶어놓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아버지가 3만원을 쥐어주시며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고 쓰고 오라고 하셨다. 여행기간 동안 사먹은 건 칙촉(1,200원) 하나였고 잔돈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갖다드렸다. 칭찬할 줄 알았던 아버지는 내가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는 줄 아냐면서 오히려 화를 냈다. 당시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중학교 소풍 때, 월명동 공설운동장에서 나운동 아파트까지 5km를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택시도 아니고 버스비가 아까워서 그랬다. 역시 아버지는 내가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는 줄 아냐면서 다그쳤다.

삶의 살아가는 자세에 있어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 어떤 삶의 방향도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행하려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행복 추구의 여부조차도 개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기보다는 불편하게 살아오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닌다. 내게 허용된 선에서 소비를 즐기고 멋진 쾌락을 누린다. 여전히 그러한 소비가 가끔씩 꺼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풍요에는 돈이 들고 합리적인 소비라 인식하는 한 정말 멋진 삶의 기쁨을 선사한다. 이제야 비로소 성인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경제, 물질적인 독립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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