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영화는 이미 시작된 뒤였다. 표를 들어 자리를 확인했다. F열 가장 바깥. 계단을 올라가려다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카페에 들어간 남자가 주문을 하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스몰, 아니 라지로 주시고, 샷도 추가해 주세요. 드시고 가세요? 아니면 테이크 아웃이세요? 어… 드시고 가, 아, 아니 테이크 아웃할게요. 남자는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고 한쪽을 힐끔거렸다. 카메라가 향한 곳에는 한 여자가 책을 읽고 있었고 작은 테이블 위에 아메리카노 잔이 놓여 있었다. 이따금 그녀는 책을 내려놓고 커피를 마셨고 그때마다 초록색 빨대는 흙탕물 같은 색이 되었다가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한 손에 음료를 든 남자가 여자가 앉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씩 방향이 어긋나고 얼굴에 초조한 빛이 역력하더니 결국 바로 옆에 있는 입구로 나가버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어두워진 등 뒤로 남자의 독백이 이어졌다. F열에 도착해 내 자리를 찾았을 때 옆에 누군가가 이미 앉아있었다. 모자에 달린 로고가 스크린 불빛에 반사되어 희우스름하게 빛났고, 단발 아래 어깨부터 타고 흐르는 세줄 라인이 팔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영화 속 카페의 브랜드와 같은 아메리카노 잔에 들려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남자는 이제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그 너머로 아이패드에서 유튜브 영상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창문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남자는 문득 저녁 먹을 때가 다 된 것을 깨닫고, 흐릿한 눈으로 배달 앱을 켰다. 순간 스크린이 탁 꺼졌다. 객석도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그 사이로 ‘뭐야’ 나 ‘꺼진 거야?’ 같은 말들이 소곤거렸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영화가 잠깐 멈췄나 봐요.”
여자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게요.”
“근데, 아까 카페 장면은 조금 아쉽던데요.”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래요?”
“그럼 어떡하실 건데요?”
“알고 싶으면 제 영화에 한번 나오세요.”
관객들은 밖으로 나가 영화가 꺼졌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지 아니면 누군가 수습해 주길 기다려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객석은 조금씩 소란스러워졌다. 전자 쪽인 사람들 몇몇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고 반대쪽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더욱 마음을 놓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몇 명이 뭉쳐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할 때 다시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검은 배경이었으므로 영화가 켜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가려던 사람들은 슬금슬금 객석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검은 배경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그때 그녀가 벌떡 일어나 스크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몸을 수그리고 무언가 위에 앉았다. 바로 위에 달린 조명이 켜져 그녀를 비추었다. 그녀는 나무 의자에 앉아있었고 그 앞에는 테이블과 마시던 아메리카노 잔이 놓여있었다. 영화 속 카페 장면과 똑같았다. 마치 몇 천 번을 연습한 것처럼, 그녀는 우아하게 책을 넘겼다. 이따금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머리만 움직여 빨대에 입을 갖다 대기도 했다.
그것을 보다가 나도 따라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갔다. 손에 커피 잔은 없었지만 그녀를 향해 걸어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촬영 때보다 얼굴이 밝아지셨네요.”
“그런가요? 아, 최근에 종합 비타민을 챙겨 먹기는 해요.”
그녀는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런 말로도 웃겨하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걸로는 이렇게 밝아지지 않아요.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글쎄요. 마음가짐이 좀 달라지기도 했네요.”
그녀의 눈이 조명 빛에 반들거렸다.
“마음가짐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처음으로 선택이란 걸 했거든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을 하지 않나요? 이제까지는 선택을 하지 않았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선택을 안 했다고도 볼 수 있고, 마지못해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이제까지 스스로 원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고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정말 ‘갑자기’)든 생각이에요. 세상의 어떤(어쩌면 대부분일지도 모르죠)일들은 제가 어떻게 대하든,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손해는 아니더라고요. 그렇지 않나요? 가령, 이태원에서 댄스 파트너를 구한다거나 대학로에서 직장인 뮤지컬을 같이 볼 사람을 구하는 것 같은 일들이요. 물론 좀 과장해서 말한 겁니다.”
여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 두렵기는 하죠.”
“적당한 알코올이 필요할 수도 있죠…. 상황에 따라서요…. 어쨌든 손해 볼 일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는 거죠.”
여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얼굴에 의문스러움이 묻어있었다.
“그러면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일은 어떨까요? 집이나 길 위에서나 가게에서 머릿속에 번뜩 드는 생각들이 있잖아요. 누군가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그것에 대해 물어보면 분명 하고 싶다고 대답하겠지만, 결국 외면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존재하죠. 그것들은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반대일까요? 어떤 선택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저는 상상을 해봐요. 당장 이걸 안 했을 때 일주일 뒤 내 행동을 후회할까? 하고요. 하지만 대부분 하는 편이 낫죠. 푹 자고 일어난 뒤 베개를 치면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거든요. 이건 간단하지만 아주 명확해요. 그리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쳐도 그렇게 낙심하지는 마세요. 늘 다음 기회는 찾아오거든요. 심지어 신이 시험하려는 것처럼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닥쳐오기도 하죠.”
그녀는 책을 덮고 조금 남은 커피를 전부 마셨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끔찍한 것은, 이제까지 살면서 항상 선택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란 걸 알았을 때에요. 아카식 레코드, 모든 우주의 일들이 적혀있는 기록에 의해서요. 차라리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편이 나아요. 저는 그에게 사슴을 바치느니 총으로 쏴 죽일 거거든요. 총알 한 방에 몇 명이 더 죽더라도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현듯 관객석을 바라보았는데, 그들은 단 한 명도 나가지 않고 영화에 빠져든 것 같았다. 빈자리는 나와 그녀의 자리뿐이었다.
“그건 이 영화도 그래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