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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Jul 27. 2024

흙투성이로 달려나간 곳에서 울려퍼지는 하모니

 일명 ‘기차 문제’로 유명한 트롤리 딜레마를 들어본 적 있는지? 달리는 기차 앞에 두 선로가 있고, 그 위에 각각 인부 1명과 5명이 서 있다. 운전자는 그대로 돌진해 1명을 치거나 선로를 바꾸어 5명을 치고 지나가야만 한다. 본래 딜레마에 대한 윤리학적 질문으로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정의에 따라 답변을 내놓는다. 물론 어떤 대답이든 인부가 죽기는 마찬가지다. 

 꼭 철학 강의실에서만 한정된 주제는 아니다. 우리는 삶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대답한다.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는 굽히기도 하면서. 너무나 빠르고 복잡한 세상에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찾고, 가능한 한 그것에 가까운 선택을 내리려고 애쓴다. 누군가가 흙투성이가 되고 피흘리는 상황은 모두가 최선의 선택을 했을 때 발생한다. 가령 학교에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안정된 교육 환경을 만들고 싶은 선생님의 마음은 본래 같은 곳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다각형의 꼭짓점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어 서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이가 침울한 얼굴로 돌아와 방문을 닫고 들어갔을 때, 부모는 아이에게서 무슨 일이 듣기 전에 이미 외부 요소들에 대해 투쟁할 준비를 한다. 정작 집안에서 오고간 이야기나 차 안에서 무심코 건넨 말 한 마디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배제한 채 말이다. 교사들이 편부모에 대해 편견과 아이를 인질로 삼거나 감시병으로 쓰는 뉘앙스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형태는 비단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는 곳 어디든 발생할 수 있다. 사회 안팎으로 조성된 불안과 무한 이기주의, 그리고 반복되는 삶의 피로감이 이 간극을 더욱 더 넓히고 있다.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혹은 풍조가 우리가 매일같이 투쟁하고 부딪히는 일상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 주지는 않는다. 다른 어떤 것도 그렇다. 그것은 조금 과장을 섞어서 말하면 오래 전부터 내재된 습관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침착해지는 것이다. 감정은 어떤 경우에 부조리에 저항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다각형의 꼭지점에 서 있고 각자 실마리가 될 만한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 이성의 기반 위에 이해와 신뢰에 기대어 그것을 짜맞출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과정이 이와 같이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해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처받은 이들은 생겨난다. 그들에게 삶은 본래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것이고 각자의 몫을 스스로 챙기는 데에 집중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삶의 이유보다, 까뮈의 말처럼,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은 공평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소리내어 말하기 힘든 것이 있다면, 먼저 상상의 호른을 꺼내 힘껏 불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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