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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 ur mind Mar 08. 2021

밤, 꿈, 길.

<밤> - 나의 이야기.

열아홉 살 수험생이던 때, 나는 초저녁 잠을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 밤부터 새벽까지 공부를 했다. 새벽 두 시에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매일 듣고, 가끔 사연을 써서 보내기도 하던 소녀 시절을 보냈는데, 그 무렵 나의 꿈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의 PD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무언가 할 일이 있을 때, 집중해야 하는 일을 처리해야 할 때면 낮에는 슬렁슬렁하다가 결국엔 밤에 몰아서 한다. 밤에만 느낄 수 있는 묘한 분위기가 있는데,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은 그 적막한 기분에 살짝 희열을 느낀다. 이 시간 어딘가에서 나와 함께 깨어있을 나의 조용한, 이름 모를 동지들을 막연하게 떠올리는 일을 많이 애정한다. 그와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내 사람들이 꿈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상상해보는 일도 좋아하고.


아이유를 주인공으로 한 옴니버스 영화 <페르소나>를 본 적이 있다. 그 영화의 마지막 단편, '밤을 걷다'는 깊은 밤 연인이 길을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인, 조용하고 심플한 영화였는데 개인적으로 참 인상 깊게 보았다. 화면에 펼쳐지는 장면은 꿈속이었다.  죽은 연인이 꿈속에 나와 함께 밤길을 걷는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많이 담겨 있는 영상이었다. 밤과 꿈, 밤길의 산책, 조용한 대화, 슬픔 같은 것들.


언젠가 책을 읽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지만 오랫동안 하지 못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답이 '한밤 중이나 새벽, 인적이 드문 거리를 걷는 일'이었다. 오롯이 자유로울 수 있는 때에만 가능한 일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 사람들, 내일 아침의 일들 같은 걸 걱정하지 않을 때에만 도시의 밤거리를 걸을 수 있다. '어른'으로 살면서 그런 경험은 많이 줄었다. 누군가가 나를 걱정하거나, 기다리는 삶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소소한 일탈이다.


한동안 불면증으로 오래 고생을 했다. 잠이 드는 건 어렵지 않은데, 자다가 계속 깨고 새벽에 눈이 떠지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이었다. 다음날 하루가 너무 힘이 드니까 잠을 다시 이루기 위해 많이 애를 썼는데 언제부터인지 마음을 내려놓았다. '밤 시간을 원래 좋아했잖아. 그냥 내가 혼자 조용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불면은 더 이상 불면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내 취미가 한밤중에 할 수 없는 악기 연주나 노래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책을 읽고, sns를 뒤적이고, 글을 쓴다. 조용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내 수많은 생각들을 잠재울 수 있는 나만의 취미생활로 그 시간이 채워진다.


영화 '최악의 하루'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은희는 엉망이었던 하루를 마치고 우연히 다시 만난 료헤이와 남산의 조용한 산책로를 걷는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주인공 길이 레코드 가게 점원 가브리엘과 함께 센 강 다리 위에서 비를 맞으며  걸으며 끝이 난다. 많은 일을 겪고 조금은 지친 주인공들이 그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결말의 장면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이 글을 적으며, 그 영화 속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산책을 떠올렸고, 도시의 깊은 밤, 밤길을 걸을 때 들을 수 있는 '타박타박'하는 내 발걸음 소리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 글: 나영/ 인스타그램 @etesian_wind 

* 그림 : 찰스/ 인스타그램 @slz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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