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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의 추억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울었을 때 기적이 왔다.

by 쭈쓰빵빵

결혼 전 대학원 다닐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남자친구(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부탁이 있는데 꼭 좀 들어주라."

"뭔데?"

"우리 형 친구의 엄마! 그 분에 대해 글 좀 써주라."

"싫어!"


단번에 거절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 일기장을 제 때 써가지 않아 혼난 적이 많았다. 억지로 쓴 일기는 "나는 오늘 단팥빵을 먹었다."로 시작해 "오늘 저녁은 돼지고기 숭숭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먹었다."로 끝나 선생님께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종일 먹은 얘기만 적혀 있냐고.


글 재주도 없었다. 온갖 상이 남발하던 그 시절. 글짓기 상 한번 받아본 적이 없다.


거절한 내게 또 한 번 간곡히 부탁했다.

일단 사연을 들어봐 달라는 것이었다. 남자친구 입을 통해 묻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사연이 구구절절 흘러나온다.


"당시 친한 형의 어머니는 금산 시골 마을에서 없는 살림에 힘들게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다.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시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고 했다. 지병도 없으셨는데 말이다. 다행히 동네 사람에 의해 발견되어 119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심정지가 왔다. 의사가 사망진단을 내리려던 찰나 극적으로 어머니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의식을 되찾으신 어머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셨다.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가 곧장 향하신 곳은

금산시외버스 터미널이셨다고."


"아! 그만 그만! 됐어! 알겠어. 알겠다고!"


나는 글을 쓴다는 게 부담스러웠고 내키지 않았기에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친구와 나는 며칠 뒤 금산으로 향했다.

A4 종이 한 장과 볼펜 한 자루를 챙겨갔다.

뭐라도 끄적끄적 해야 할 것 같아서.


금산군 시내를 지나 비포장 시골길에 접어들었다. 삼복더위 한가운데 가장 뜨거운 날이었다.

인상을 박박 쓰며 혼잣말로 툴툴거리던 동안 어느새 파란 대문 집에 다 달았다. 남자친구가 벨을 눌렀고 형이 대문을 열어주며 우리를 반겼다. 나는 뒤따라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1층 널따란 거실과 안쪽 방에 족히 10명은 넘어 보이는 노인들이 누워있었다.


러닝셔츠에 슬리퍼 바람으로 마당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할아버지도 보인다. 마루 끝에 앉아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를 지나쳐 2층으로 갔다.


그곳에 형의 어머니가 계셨다.


난 챙겨 온 A4용지 한 장을 꺼내고 볼펜을 들었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야기가 끝이 났다.

난 이야기를 듣는 내내 단 한 글자도 종이에 받아 적지 못했다. 대신 그 종이는 내가 흘린 눈물을 받아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마음에 잘 새겨 집으로 왔다.


"그렇게 병원에서 살아 돌아오신 어머니는 금산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노숙자들을 데려와 씻기고 밥을 먹이셨다. 병에 걸려 터미널에 버려진 노인들을 모시고 와 병원에 데려가고 병시중을 들며 함께 지내기 시작하셨다고 했다. 이 일이 동네에 소문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집 없이 길에서 배회하는 노인들에 대한 신고에 출동한 119 구급대원, 경찰들도 무연고 노인들을 어머니 집으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노인들이 20명은 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선행이 불법이라고 했다. 국가의 허가가 없는 미인가 시설은 불법이라 곧 철거해야 한다고 한다. 어머니는 우셨다. 버려진 이 사람들을 자신이 또다시 버릴 수 없다고 하셨다. 방법은 한 가지. 사회복지법인으로 허가를 받으면 된다. 사회복지법인 인가를 받는데 사회봉사 수상 이력이 매우 긍정적으로 반영된다고 했다.


도전과제! 두둥!

제31회 삼성복지재단 경로상 부문. 수상자는 단 2명!

상금 천만 원. 당선자에게 삼성 최신형 휴대폰 1대와 수상 전날 서울 5성급 호텔 숙식과 만찬!

이곳에 글을 써서 어머니를 당선되게 하는 것!

이거다! 나는 어머니를 꼭 수상자 명단에 올려야겠다!


친한 형은 쉽지가 않다고 했다. 경쟁률도 치열하고 작년에도 공모했으나 안 됐다고 했다.


내가 꼭 해낸다!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던 어머님은 밭에서 쓰러지셨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삶으로 다시 깨어나셨을 때! 남은 삶은 선물로 주어진 삶이라 여기고 봉사하며 남은 삶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하셨다고 했다."



나는 종교가 없었다. 사실 지금도 범신론자에 가깝다.

당시 하나님도 부처님도 암울한 내 팔자를 고쳐주지 못했다. 고쳐주기를 바라기는커녕 "내 팔자는 왜 이모양이냐" 원망하기에 바빴다.

교회는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을 준다고 해서 친구 따라 한 두 번 가본 기억은 있다. 절에는 부처님 오시는 날 절에서 밥을 준다고 해서 밥과 떡을 먹으러 가 본 기억이 있다. 떡이 맛있긴 했었다.


나는 금산에서 돌아온 날 집 책상 앞에 않았다.


하얀 종이를 꺼내고 두 손을 모았다.


"계신지 안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나님! 저는 상금 천만 원에는 전혀 욕심이 없습니다. 그 돈은 어차피 불쌍한 할머니, 할아버지들 기저귀 값, 내복값으로 쓰일 텐데요. 다만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제 글이 당선되게 해 주세요. 어머님 지금 하시는 일 계속하실 수 있게 도와주세요. 당선이 된다 해도 제 능력이 아닌 줄 압니다. 복권 500원짜리 조차 당첨 안 되는 운도 더럽게 없는 제가 그래도 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계신 줄 믿고 집 앞 교회라도 한 번 나가 볼게요!"


그리고 글을 썼다.


읽고 수정하고 또 읽고 수정하고.

정말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제출을 했다.


넘어야 할 관문은 10차.

전국 각지에서 효행상 부문, 경로상 부문 나눠 몇 만 건의 사연이 접수된다고 들었다. 7차까지 통과했을 때 각 부문 수상자의 3배 수로 추려진다. 경로상 부문 수상자는 2명으로 6명으로 후보자가 좁혀졌을 때 삼성복지재단에서 현장으로 실사를 나온다.

공모한 글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라고 했다.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금산에 실사를 나오신다고 그곳에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다음 날 금산에 갔고 그곳에서 출장 나오신 분을 뵈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삼성복지재단의 고문이라고 했다.

내 글이 너무 좋아서 글쓴이가 궁금해 이렇게 직접 현장에 나왔다고 했다.

현재 상황 3:1

당선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행운을 빌어주셨다.

최종 당선자는 9월 1일 자 동아일보 1면에 나온다.

전날 8월 31일!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 가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금산에서 뵈었던 고문님이셨다.



"축하드립니다. 당선되셨습니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있다니. 신기하고 놀라웠다.

시상식 때 서울에 가서 축하를 드렸다. 어머님이 내게 감사하다고 봉투를 내미셨다. 받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완강하시고 노여워하셨다.

나는 마음이 약해져 50만 원 정도면 감사하게 받겠다고 했다. 50만 원이라며 봉투를 주셔서 받아들로 집으로 왔다. 집에 가서 봉투를 열어보니 수표로 200만 원이 들어있었다. 딱 내 대학원 한 학기 등록금이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은 사회복지법인으로 인가가 났고 1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잘 운영하고 계신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은 매 년 그곳에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다. 뱉은 말도 있고.

"나는 뭐 밑도 끝도 없이 교회는 뭐 어디로 가 본다냐. 그곳에서 혹시 밥은 좀 먹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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