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량진 컵밥을 먹어보고 싶었던 나

뒤늦게 국가직 공무원이 되었다.

by 쭈쓰빵빵

"나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린 선수가 있다면

금메달을 가져가도 좋다"


2012년 런던올림픽 레슬링 김현우 선수가 결승을 앞두고 한 말이다.

당시 TV에서 하는 결승전 생중계를 지켜보며 울었다. 이미 토너먼트로 결승에 올라오느라 그의 오른쪽 눈은 퉁퉁 부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눈으로 어찌 결승을 치를까 걱정이 되었다. 얼굴은 이미 피멍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인터뷰에 응하는 것조차 버거운 듯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승을 앞두고 걱정하는 언론에 대고 당당히 말했다.

"나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린 선수가 있다면 금메달을 가져가도 좋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나는 그가 흘린 땀과 노력이 감히 상상이 되어 눈물이 났다.

그리고 정작 나는.

나를 위해. 내 꿈을 위해.

이토록 열정적인 순간이 있었는가.

스스로에 대한 미안함에 또 눈물이 났다.




어렸을 적 모든 것을 언니에게 물려받았다.

옷. 책. 가방. 신발. 교복 등.

새것을 내 것으로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주산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내 언니는 이미 주산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주판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언니에게 새 주판을 사주고 언니가 쓰던 알 빠진 주판을 내게 줬다.

나는 주산학원에 간 첫날.

거기 있는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주판을 해 본 적도 없으면서 왜 이가 다 빠진 주판을 들고 왔냐고.


나는 연필도 헌 것만 썼다.

엄마가 새 연필을 사주시면 언니는 새 연필을 깎아서 본인의 필통에 가지런히 담았다.

그리고 본인이 쓰던 연필과 내가 쓰던 연필을 한데 모아 연필 양쪽 끝을 뾰족하게 깎았다.


언니는 새 연필 5자루.

나는 양쪽 끝을 뾰족하게 깎은 몽당연필 4자루.


언니는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봐봐! 언니 연필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네 것은 하나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양쪽을 번갈아 가며 세느라 손이 바쁘다)

우와 네 연필이 언니 것 보다 세 개나 더 많네"


그럼 나는

"언니 보다 내가 더 많이 가져서 어떡해! 으~앙"

하고 울었다.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냥 모지리였다.


아무튼 내 어린 시절은 이랬다.


언니 것은 항상 새 것. 내 것은 항상 헌 것.

언니도 나도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새 물건은 내게 오지 않았다.

물건이 헐고 낡아졌을 때 비로소 그것은 내 것이 된다.




언젠가 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핸드폰이 고장 나 같이 핸드폰 매장에 갔다.

당시 내 폰은 최신형은 아니었지만 쓰는데 지장은 없었다.

최신형 휴대폰을 본 남편은 내게 새 핸드폰을 권했다. 그리고 내가 쓰던 것을 본인이 쓰겠다고 했다.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나도 성인이 돼서는 필요한 물건은 새 걸로 사서 썼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내가 지겹게 당해왔던 걸 반대 입장으로 경험하긴 그날이 처음이었다.

내가 쓰던 걸 주고 나는 새것을 갖는다!

나는 웃음이 났다.

나는 그날 새 핸드폰을 갖은 게 아니라 온 세상을 다 갖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뭘 좋아하지? 난 뭐가 하고 싶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내가 궁금해졌다.

꿈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20대

그저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신세한탄하기에도 나는 너무 바빴다. 미처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 내가 나를 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온전히 나를 위해 목표를 세우고 피 땀 흘려 매진해 본 적이... 없다!


그래! 공무원 시험!

젊었을 때 못해본 거 지금이라도 도전해 볼까?

대학원 졸업 후 프리랜서로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치매환자 심리검사 일을 한 지 9년 차가 되어갈 찰나.

나도 소속감이 있는 정규직 직업이 갖고 싶어졌다.

누군과와 관계 맺기에도 서투르고 사람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던 내가.

세상 속으로 한 발짝. 다가 설 용기가 생겼나 보다.

아이들도 당시 6세 7세로 제법 많이 자랐다.

또 남들은 취업 준비로 고군분투를 할 때 난 방황하고 마음 속 온갖 잡념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다.


난 도전하기로 했다.

그 누가 권했기 때문이 아닌

내가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정작 남편은 응원해주지 않았다.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또 소심하고 예민한 내 성격에 조직에 들어가 적응해야 하는 걸 걱정했다.


"공무원 시험 합격하면 끝인 것 같지? 늦은 나이에 조직 말단으로 들어가서 어린 직장 상사 밑에서 일 배우는 거 그때부터 진짜 고생 시작이다.

지금이 좋은 줄 알아"


그러나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일. 육아. 살림. 거기에 공부.

그럼에도 그 시절 나는 행복했다.


"나보다 더 절실한 심정으로 공부한 수험생이 있다면 나 대신 합격해도 좋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나는 국가직 공무원이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