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

엄마가 장수해야 하는 진짜 이유

by 쭈쓰빵빵

뭐 하나 되는 일이 없다.

공부도 일도 사랑도.

마음이 잔뜩 꼬여 있다 보니 일상 다반사가 보란 듯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불안정한 20대 초반 어느 날.
만났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

불안한 마음 그리고 서툰 연애

당시 남자친구와 크게 싸운 뒤 모든 것이 뒤엉킨 채 엉엉 울면서 자동차 보조석에 앉아 강변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소리 내어 우는 내 옆에서 친구는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한다.

친구에게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 당시 사용했던 나의 폴더 폰은 홧김에 내가 반으로 쪼갰고 그것은 두 동강이가 난 채 카페 공동화장실 휴지통에 버려졌다.

친구가 자신의 핸드폰을 주지 않는다. 내가 감정이 격양된 상태로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울고불고 또 난리를 칠까 봐 걱정된 모양이다.

나는 달라고 했다. 전화를 걸어 따져야 할 사람은 남자친구가 아닌 내 엄마였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기를 건네받았고 곧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는다.

나는 봇물 터지 듯 오열하며 원망의 말들을 쏟아냈다.

"엄마는 나를 왜 낳았어. 잘 키워주지도 못할 거면서 날 왜 낳았어. 으앙~ 어쨌든 나았으면 사랑 주면서 잘 키워나 주던가. 나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너무 무서워."


나는 한 번 눈물이 터지면 잘 멈추지 않는다. 정말 어쩔 때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며칠씩 계속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나는 눈물을 뚝! 그쳤다.


내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친 것에 놀란 친구가 묻는다.

왜. 엄마가 뭐라는데.

내가 랩을 하듯 오열하며 엄마에게 하소연을 할 때 엄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내게 이 한마디를 던지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이년이 뭐라는 겨! 안 들려!"

엄마는 보통이 아니다.

엄마의 식사량도 늘 보통이 아닌 곱빼기.


다음 날 아침 아빠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말씀하셨다.


"너 어제 엄마한테 왜 그렇게 말했어.

엄마 속상해서 밤새 한숨도 못 주무셨다."


치!

엄마도 속상했으면서 대체 왜 표현을 하지 않는 거야!






어렸을 때 나는 엄마를 너무 좋아했다. 또 엄마를 많이 그리워했다. 나는 엄마 사랑이 고팠다.

내가 아들 딸을 키우며 느낀 것은 아이들마다 성향이 다르듯 채워져야 할 엄마 사랑의 크기도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내 아들은 엄마 사랑을 조금만 채워줘도 잘 지냈다.

세상 밖으로 호기롭게 나아갔다. 유치원이든 학교든 교우관계든 비교적 쉽게 독립하여 잘 생활하였다.

그런데 오빠보다 한 살 아래인 딸은 꽤 긴 시간 나의 껌딱지로 살았다. 나를 많이 찾았고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언제쯤 나를 벗어날까. 날 벗어나기는 할까? 걱정이 될 때쯤인 중학교 1학년. 그제야 '엄마 사랑 100% 충전완료'라고 외치듯 친구 찾아 잘 떠나갔다.

나는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생각했다.

나도 내 딸과 같은 성향이었구나.

엄마 사랑 자리가 큰 사람. 더 많이 채워져야 했던 사람.


엄마와 일찍 떨어져 어린이집 같은 곳에 갔다. 그곳에서 민폐를 참 많이 끼쳤다. 거의 1년 내내 엄마 보고 싶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징징거리고 울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심부름, 설거지, 빨래 등 집안일을 잘 도와드렸다. 엄마 얘기도 잘 들어주었다. 힘든 와중에 왜 그렇게 잘하려고 애를 썼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진짜 효녀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부모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일까? 아님 인정 못 받고 사랑받지 못한 나의 결핍을 이제라도 채워보려고 인정과 사랑을 구걸하고 있는 것일까?

후자라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하다.

나는 한동안 부모님을 뵈러 가지 않았다.






나는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엄마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한 동안은 제일 미워했었다.


엄마는 먹튀의 원조다.


"아빠한테 맨날 당하는 피해자 역할을 하면서 나한테 위로받고 내가 편들어주고 같이 슬퍼해주고 내가 대신 싸워주고 이 모든 걸 받아놓고,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은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다"


속으로 실컷 미워하고 화를 내봐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초조해졌다.

엄마는 이제 연세도 있고 나보다는 일찍 돌아가실 텐데 엄마가 돌아가시면 안 된다.

나는 마음이 급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사과를 받아내야겠다.

나한테 사과하기 전까지 엄마는 아무 데도 못 간다.


곧장 엄마에게 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서운했던 일들을 쏟아냈다.

"엄마는 왜 나 신우신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밥도 안 시켜 줬어! 밥을 먹어야 약을 먹지! 남동생 뇌수막염으로 입원했을 땐 병원 밥도 시켜주고 바리바리 반찬도 해서 갖다 줬으면서"


"으앙~"

나는 울면서 따졌다. 엄마가 운다.

미안하다고 엄마도 엉엉 우신다.

엄마가 우니까 마음이 아프다.

엄마는 진심으로 사과를 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그 후로도 나는 몇 번 더 엄마에게 따졌다.

언젠가 엄마는 어린아이처럼 따지고 우는 날 보며

'아고 쟤 입 좀 봐! 우니까 입 엄청 크네'이러면서 놀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진심으로 내게 사과했다.

방앗간에서 갓 짜온 고소한 참기름을 언니한테는 한 병만 줬지만 나한텐 두 병이나 줬다.

나는 눈물을 닦고 씩씩하게 참기름을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그건 내가 그간 못 받은 엄마의 사랑이다.

그건 내 허기짐을 채워 줄 소중한 양식이다.


엄마가 나에게 사과를 하던 안 하던 우는 날 받아주던 안 받아주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의 이런 유치한 행동은 어린 시절 엄마가 보고 싶어 슬피 울던 어린 나에 대한 예의다.

나를 향한 내 사랑표현이다.

어렸을 때 나의 요구를. 나의 비명을 그 누가 아닌 내가.

내 두 귀를 막고 외면하고 짓밟고 방치한 나 스스로에 대한 참회이다.






나의 분노를 조금 삭여줬던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두 친구 있었다.

한 친구는 부모로부터 쌀 100 가마니를 물려받았고 다른 한 친구는 쌀 한 가마니를 물려받았다.

쌀 한 가마니를 물려받은 친구는 이것밖에 내어줄 수 없는 부모를 원망하며 100 가마니 받은 친구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100 가마니 받은 친구 부모님의 곳간은 쌀을 내어주고도 쌀이 많이 남아있었으나 쌀 한 가마니를 받은 친구 부모님의 곳간은 텅 비어있었다.

쌀 한 가마니는 그들의 전부였던 것이다.


쌀 100 가마니를 받은 사람은 부모님이 일부를 내어준 것이고 쌀 한 가마니를 받은 사람은 부모님이 그들의 전부를 내어준 것이다.

누가 더 큰 사랑이겠는가.


내 엄마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가난한 집 7남매 맏이. 어린 나이로는 공장에 취업할 수 없어 남의 주민등록증을 빌려 외할머니와 떨어져 일찍 공장에서 일하게 된 12세 소녀공이었던 엄마.


미움이 사그라드니 엄마에게서 어린 소녀공의 아픔이 보인다. 그 아이는 순수하고 귀엽다.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 어린 소녀를 품을 수 있는 따듯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


엄마에게 남김없이 상처받았던 모든 일들을 사과받으면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거라면 엄마는 오래 살아야 한다. 나는 생각날 때마다 엄마에게 쫓아가서 따지고 사과를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갈길이 멀다.


그리고 엄마가 오래 살아야 하는 진짜 이유는.

더 이상 내가 사과받을 일이 없을 때.

미움이 다 사리지고 내어줄 것은 오직 사랑뿐일 때 엄마는 내 사랑을 독차지해야 한다.

내가 엄마를 어린아이처럼 품고 엄마를 질리게 사랑할 때까지 엄마는 살아서 내 사랑을 다 받고 가야 한다. 그때까지 나는 죽어도 엄마를 보낼 수 없다.


오래 걸리지는 말자.


엄마. 조금만 기다려줘.

외할머니한테 못 받은 사랑 내가 채워줄게.

내 사랑 다 받고 가요.


나는 엄마가 아직도 그립다.

나는 여전히 엄마사랑이 고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