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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IM Dec 06. 2022

느린 걸음이 좋았던 날

기대와 같은 하루가 되길


집을 나서는데 눈송이가 떨어졌다. 내리는 힘이 미약해서 화산재처럼 보였다. 쌓일 듯 말 듯한 수위가 어쩐지 예뻤다. 부유하는 것에 애정을 쏟을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이 정도 겨울에나 그나마 가능한 일.


평소보다 느리게 걸었다. 적당히 얼은 땅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약간의 경사가 부상으로 이어진다. 어릴 땐 피해 갔던 위험이 나이를 먹으면서 지근거리에 머무는 느낌이다. 어른이 되어서야 넘어지는 법을 배워서일까.


전반적으로 출근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스치는 풍경이 그랬다. 느린 걸음에, 느린 마음은 어느새 여유가 되었다. 이맘때 좀처럼 가질 수 없던 마음이다. 늘 가지고 싶었으면서도. 살아간다면서 놓치는 것들이 많다. 살아가기 때문에 놓치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나 눈을 애정 한다. 시야를 어느 정도 가려준다는 점이 퍽이나 낭만적이다. 불만을 표시할 대상 없이도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를 한 템포 늦춰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즘 같은 시대에 톱니바퀴의 속도를 자연스레 늦춰준다는 건 그야말로 '자연'이라 가능한 일일 테다.


안락의자에 앉아 이런 뜬구름 같은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귤을 잔뜩 까먹어서 오른쪽 엄지는 노랗게 물들었다. 그 단물이 책에 묻지 않게 하려고 왼손으로 책장을 넘긴다. 이런 평화가 공상을 가능하게 한다. 앞선 기록도 그중 하나이다. 평범한 하루는 고유한 나를 허락한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려 한다. 그때까지 사박사박 눈이 내려주면 좋겠다. 버스에서 내려 붕어빵을 두어 개 사고, 저녁으로 먹을 샐러드를 고르겠지. 엊그제부터 읽던 책을 오늘은 털어낼 수 있을까. 주문한 책은 문 앞에 도착해 있겠지. 가득 찬 기대들로 귀갓길을 어루만지는, 포근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춥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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