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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찬 Aug 09. 2024

나는 무단횡단 사망자를 추모하기 어렵다.

부제 : 시간 도둑질 5

"부끄럽지도 않소?"


영화 <광해>에서 기억나는 대사다.

광해가 신하들에게 언성 높여 내뱉은 말.

어떤 상소가 올라와서 언쟁 중이었던 것 같은데, 그 말만 뇌리에 박혔다.


▶굳이 조선시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부끄러움이 일상화됐던 때가 있었는데, 왜 이리 모든 사람들이 당당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동을 거침없이 하는지 모르겠다. 무질서 앞에서 특히나. 왜들 이러나.


당당함이 신세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것이 이젠 전 세대에 통용되고 있는 듯 하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모르겠다면, 한 번은 봐줄만 하다. 두 번은 안 된다. 세번은 쌍욕 먹어야지.



나는 (사망한)무단횡단자를 추모하기 어렵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가정에서 생활 중이며, 어떤 사상이나 개념을 탑재했는지 몰라도 사고 원인을 제공하여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면, 무단횡단자를 나는 추모하기 어렵다.



아니 추모할 수 없다. 무단횡단자가 사망했더라도 '가해자'로 몰린 한 가정의 가장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니까.


가끔 TV 뉴스 방송에서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효자였던 아들이 오토바이를 몰다 사고로 사망했다'는 보도도 보이는데, 정작 신호위반에 과속을 한 그를 나는 추모할 수 없다. 신호위반으로 부딪힌 또 하나의 가장은 중상을 입고 병원에 누웠다. 사망 사고 가해자라는 꼬리표와 함께.


교통사고로 경찰서에 가게되면 '교통사고사실확인원'을 작성하게 된다. 여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만 체크하게 돼 있는데, 억울하게도 무단횡단자를 친 승용차 운전자는 가해자로 체크된다.




https://brunch.co.kr/@seoulbus/26




경찰은 말한다.

"자동차 운전자가 피해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한문철 변호사도 말한다.

"가해자, 피해자 사이에 '알 수 없음' 혹은 '판단보류' 체크란을 만들면 어떻겠냐"라고.


바이커들도 어느 가정의 한 일원으로 열심히 산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도로상에서 저지르는 '무대뽀 무질서'는 다 말 할 수 없다. 그들은 육중한 버스에게 화살을 돌릴 수도 있겠으나, 버스는 느릿느릿 운행하며, 양보를 받지 않으면 차선 하나도 변경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들의 항변에 동의할 수 없다.



대다수 겸손하고 얌전하며 준법 운행하는 바이크들이 많다고 얘기할 수 있겠으나, 난 반대다. 대다수는 이와 반대이며, 일부가 겸손하고 얌전하며 준법 운행한다고 말하련다.



본 사진은 상기 내용과 관련이 없지 않다고 말 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없음.




▶무단횡단자를 치어 사망케한 사망사고의 주인공은 가해자가 돼 버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을 피할 길 없었다. 소송전에 뛰어들어 몇 년 후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겠지만, 그 동안 받은 스트레스는 어찌할 건가. 그 동안 경제적 활동을 못한 보상은 누가 해 줄 것인가.



무단횡단자는 대부분 중장년 여성이다. 편협한 생각 아니다. 주변 이야기는 물론이고, 직접 경험한 상황 등 심증은 무궁무진하다. 버스기사로 재직하고 알았다. 거의 여성이란 것을.



그녀들은 경주마처럼 앞만보고 걷는다. 다리 아파 뛰질 못한다고 해도 어찌 앞만 보는가. 25톤 덤프트럭에 역과되어(깔려서) 터진 시체를 본 적 있다. 그래도 난 추모할 수 없다. 덤프트럭 기사는 하루 아침에 경찰서에 가서 가해자가 되어야만 했다.


굳이 무단횡단을 하여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제발 좌우를 살피라고 말하고 싶다. 왜 좌우를 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뛸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JTBC <한블리> 블랙박스 장면 수 차례 목격)


아이들 퀵보드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괜찮다며 돌아가도, 그런 아이를 굳이 붙잡아서 전화번호를 줘도, 승용차 운전자는 '뺑소니'로 몰리는 현실이다. 아이 부모가 신고를 했단다.


한문철 변호사는 말한다.

"필히 사고 현장을 보존해서 경찰을 부르라.'고.

그래야 뺑소니 혐의는 벗는다고.


운전자는 아이에게 전화번호까지 건넸음에도 아이 부모는 그 운전자를 고소하거나 신고한다. 이는 뭔 상황이란 말인가. 가만히 있다가 뺑소니범으로 몰리게 된 경우다.


▶뺑소니범으로 몰리는 건 버스 기사도 마찬가지다. 버스 정류장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버스가 지나가려고 하면 손을 들거나 뛰어온다. 버스는 그를 발견못하고 지나가면 민원을 넣어 '무정차'로 신고한다. 운전자는 타당한 이유가 없는 한 10만원짜리 과태료 고지서를 받는다.


언제부터 이리 신고정신이 투철했는 지 몰라도 꽤 억울하다. 버스 기사가 정류장에 서 있는 승객들 동향까지 파악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승차 여부를 판단하고 가늠해야 하는 천리안을 가져야 한단 얘긴가. 아니면 입맞춤 아니 눈맞춤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손을 들던가, 뛰어오는 제스처라도 취하던가.

그게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이자, 양심있는 행동 아닌가?

내가 이상한건가?


우린 한 때 모두 버스를 타고 다녔다.

버스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버스는 혼자 타는 모빌리티가 아님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텐데.


20~30m를 걷기 싫거나 몸 상태가 안 좋은 승객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이 승차해야 할 버스가 오는데도 문자메시지에 열중하는 중이거나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버스를 발견하고도)천천히 걸어오는 사람은 대체 뭔가. 심지어 '문자질'하면서 거북이 걸음으로 승차한다. 버스가 움직이는데도 손잡이를 잡지 않고 문자질이다.


시간 도둑아닌가?
시간 도둑은 더욱 부끄러움이 없다.



하차벨을 눌러놓고 내리지 않는 사람은 '죄송합니다. 다음 정류장에 내릴 게요.'라면 될 것을 가만히 딴청 피운다. 누가 누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즐기듯이 먼 산만 바라본다. 부끄러운건가? 쑥쓰럽나?


어찌 그리 당당하고 뻔뻔한가.

왜 사회가 이렇게 됐단 말인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점점 늘어간다. 그나마 공익신고자가 그 명맥을 이을 뿐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공익신고자에게 매우 가혹하다. 누군지 다 까발려서 인터넷 상에서 누더기로 만들어 버린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부조리함을 신고해 세상에 알렸음에도 '사실'에 집중하지 않고 '사람'에게 집중한다.

언론이, 경찰이 해야 할 일을 신고자가 대신 해줬음에도 감사하지 않고 말이다.


<도로정화캠페인>이라도 하고 싶다.



부끄러운 행동임을 알고 사과할 줄 알며, 당당하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 당당했다면 머리 숙이는 것이 옳다. 그것이 사회 정의아닐까.



버스 기사를 시작하고 거리에, 도로에, 세상에 '개쓰레기'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알았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 TV 뉴스, 시사프로그램에 온통 '쓰레기 뉴스'가 넘쳐난다는 걸 더욱 깨닫게 됐다.


당당하고 뻔뻔한 인간들이 이렇게 많다니 암울하다.

아무리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간'이라도 '감정'이 있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친절할 수 없으며, 다정할 수 없다. 말 한 마디 곱게 할 수 없으며, 도와주기도 싫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모든 승객의 수준이 하향 평준화되기 전에 내 눈을 정화하든지, 정신 수양을 더 하든지, 일을 그만 두든지, 포기하든지. 그냥 낙서하듯이 끄적거리기만 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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