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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Nov 04. 2023

즐거운 관람

"제5회 강서구회장배 유도대회"를 다녀와서

10월의 마지막주 토요일에는 강서유도대회를 다녀왔다. 이번 대회에서는 선수가 아닌 보조 코치의 역할로 시합장을 배회했다. 작년부터 도장에서 참가하는 구 대회, 시 대회에는 빠지지 않고 선수로 참가하다가 처음으로 선수가 아닌 신분으로 시합장에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작년 할로윈에도 강서구유도대회가 열렸다. 그때 시합에서는 도복을 입고 메달을 땄는데, 문득 수많은 도복들 사이에 셔츠 차림으로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내가 낯설었다. 

대회 전날이었던 금요일 저녁은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본가에 가서 늦도록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몇 시간 자지 못하고 일어나서 바로 체육관으로 갔다. 이른 아침부터 시합장에 가야 할 관장님을 대신해서 주말 유도 수업을 해야 했다. 대회 참가 때문에 못 온 사람도 있었고 가을 날씨가 부쩍 좋아서 어디론가 다들 놀러갔는지 검은띠 두 명만 출석했다. 나는 사람이 적게 오면 그날의 운동을 이끌 때 더 긴장하곤 한다. 아무래도 사람이 적으면 시끌시끌한 부산함이 부족하니까, 활기를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진다. 그래도 출석해주신 두 분은 매주 주말마다 깃을 잡는, 편안한 분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Nas’의 오래된 노래들을 틀어놓고 고즈넉한 토요일 오전에 셋이서 땀을 뻘뻘 흘렸다. 운동 말미에 가볍게 대련을 했다. 사실 관장님 없이 대련을 하면 다칠 위험도 크고 누군가 다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책임소재를 따지기가 곤란하다. 아마 관장님이 아시면 나를 불러다가 또 많이 혼내시겠지. 그러나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 아침 공기가 너무 좋았고, 무엇보다 세 사람 모두 대련을 하고 싶은 눈치였으니까. 나의 경우에는 대회에 나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던 것 같기도 하고.


올해 5월 말에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던 서울시회장배유도대회까지는 시합을 뛰었다. 주말 유도를 시작하고 1년 동안 다섯 차례 정도 시합을 뛰었고, 그중에 두 번의 시합을 제외하고는 금메달을 땄다. 누구나 시험이나 대회를 앞두면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자기확신이 없는 탓인지 한두 달 간격으로 시합을 치렀음에도 시합 날짜가 잡히면 몇 주 동안 짙은 피로감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어차피 취미로 즐기는 생활체육일 뿐인데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앞섰다. 

나아가 이제는 ‘유도 4단’, ‘코치’라는 꼬리표가 시합을 나가는 것에 더 큰 심적 부담을 주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내 분수에 맞지 않는 타이틀인데 과연 생활체육대회에 출전해도 되는 건지, 그리고 지기라도 하면 관원분들 앞에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았다. 아마도 ‘헤헤’ 하고 김빠진 웃음이나 흘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겠지. 지는 것은 왜 이렇게 익숙해지지 않을까. 조준호 선수는 유도에 대해 자신의 에세이에서 ‘잘 넘어지는 연습’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아직도 연습이 부족한 모양이다. 잘 넘어져야 잘 일어날 수 있다는데 나는 넘어지는 게 계속 어렵고 부끄럽기만 하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있는 얼굴들

메인 코치님이 사이드를 보실 예정이라 이전 시합 때처럼 후드티에 편한 차림으로 입고 가려다가 셔츠를 집었다. 혹시나 관원분들의 경기가 동시에 시작되거나 불시의 사태로 사이드를 보게 될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아서 가벼운 셔츠와 슬랙스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DSLR 카메라를 챙겼다. 시합장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사람도 많은지 잘 알기에 큰 카메라를 들고 가는 게 좀 불안하기도 했지만, 셔터스피드를 높여 관원분들이 시합하는 장면을 흔들림 없이, 현장감 있게 담아보고 싶었다. 

오전에 유도 수업을 마치고 시합장으로 가는 길에 등촌역 인근의 한솥에 들러 시합 참가자들이 먹을 점심 도시락을 챙겼다. 시합장에 도착하고 보니 12시 반이었다. 관장님과 메인 코치님이 넥타이부터 구두까지 멋지게 정장을 갖춰 입고 지친 얼굴로 서 계셨다. 웬일로 일반부 경기가 땡겨져서 오전에 먼저 여러 경기가 치러진 모양이었다. 지난 시합까지는 일반부 여성 경기를 오후 2~3시나 되어서야 치러서 기다리다가 엉덩이에 쥐가 날 것 같았는데 말이다. 오전에 이미 대부분의 성인 관원들, 그리고 초등부의 시합이 끝났고 오후에는 중등부, 고등부의 경기가 세 개 정도 남아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내가 이리저리 카메라를 들고, 관중석에 앉아 쉬는 관원분들을 찍고 다니니 관장님이 카메라를 써보겠다며 가져가셨다. 찍고 싶었던 시합 장면은 관장님께서 대신 시합장 주변을 돌며 셔터를 누르셨다. 셔터스피드나 iso 같은 수치값은 내가 조정해드리긴 했지만, 관장님이 센스있게 셔터를 잘 눌러주신 덕에 고등학생 J의 시합 장면이 마치 국제대회 사진처럼 나왔다.(관장님도 결과물들이 썩 마음에 드셨는지 주말이 지나고 카메라를 바로 알아보셨다. 아마 다음 시합에는 이제 내가 카메라를 굳이 들고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 도장은 금메달과 은메달을 하나씩, 동메달은 여러 개 받았다. 첫 출전인데도 한 판을 이긴 분도 있었고 짧게는 1분도 채 되지 않는 단 한 판의 경기만을 치르고 시합을 끝낸 관원분들도 있었다. 시합은 일찍 끝냈지만 다들 경기장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늦은 오후의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황금 같은 주말 하루를 온전히 유도 시합장에서 보낸 것이다. 함께 출전한 동료들의 경기를 응원하고 지켜보기 위해, 그리고 다같이 따뜻한 저녁을 나누기 위해. 경기 결과야 어찌됐든 모든 시합이 끝나고 모여 첫 잔을 부딪히는 순간, 다들 개운하고 가뿐한 얼굴이었다. 몇 주 동안 시합 준비로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말랑하고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다. 특히 계체량 때문에 식단을 조절해온 분들은 오래간만에 양껏 식사와 반주를 즐겼다.



밤 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다가 집에 돌아와 찍었던 사진들을 돌려보며 잘 나온 사진들을 추렸다. 공유 클라우드 링크에 선별한 사진들을 집어넣고 보니 400장에 달했다. 내가 찍힌 것도 아닌데, 구도와 표정이 자연스러운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흐뭇해졌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눈 앞의 시합 상대만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빛, 또는 다른 누군가의 시합을 관람하는 진지한 표정을 담는 순간이 좋았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있는 즐거운 얼굴들. 


시합에 출전했던 이들에게 사진들을 공유해주고 늦은 새벽에 이부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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