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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Nov 30. 2023

죄책감과 슬픔, 어떤 고마움의 형태

무도 일기_2023년 11월 29일

수요일은 평일의 중심이라 고개를 하나 넘어가는 기분이다. 숨이 깔딱 넘어간다. 도장에 가보니 5시 수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도복으로 서둘러 갈아입고 6시 반부터 시작될 운동을 준비했다. 최근에 다니기 시작한 중학교 1학년 '린(가명)'은 운동을 한 타임 더 하고 가겠다며 내 곁을 지켜줬다. 도복을 서둘러 갈아입고 린과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최근 넷플릭스에서 주마다 한 편씩 업로드되는 <주술회전> 이야기를 한창 나눴다. 그러고 있으려니 슬슬 2부 시작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 6시 반부에는 총 세 분 정도의 관원이 참여했다. 적은 인원에 실망하긴 이르다. 대개 7, 8시부터 사람이 많아지므로, 그걸 각오하고 체력을 아껴가며 움직였다. 


역시나 3부와 4부에서 사람들이 제법 바글바글 많아졌다. 특히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경쾌한 혼돈이 찾아왔는데 와중에 학교에서 손가락을 다쳤다며 두 남자아이가 찾아왔다. 사람들에게 구르기 구령을 넣으랴, 아이들의 손가락에 테이프를 붙이랴 나는 정신이 없었다. 내 혼란이 관원들에게 전해질까봐 내내 불안하고 두려웠다. 익히기가 돌아가는 동안, 흰띠분에게는 구석 자리에서 전방 회전 낙법을 알려드렸다. 

이 혼돈의 와중에, 내일이 승급 심사라 수업이 없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두 타임, 세 타임을 연달아 운동하고 가는 분들이 많았다. 유도하는 시간이 재미있나보다, 싶어서 흐뭇했고 마침 유쾌하고 재미난 분들이셔서 내내 분위기가 좋았다. 덩달아 나도 내내 즐거웠다. 

그런 3부, 4부를 정신없이 보내고나니, 내일 있을 아이들의 승급심사를 제대로 점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차, 싶었다. 기존에 오래 체육관을 다녔던 아이들이라 잘한다는 생각에 신경쓰지 못했던 것이다. 전달에 승급심사를 보지 않았던 아이들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도 하고... 다 이게 무슨 무책임한 핑계들뿐이란 말인가. 내일 관장님이 오셔서 심사를 보실 텐데, 마음 같아서는 다시 아이들을 불러와서 기술을 지금이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이미 모든 관원이 옷을 갈아입고 도장을 떠나고, 홀로 남은 나는 겁에 질려서 서둘러 걸레를 빨아와 일단 매트 청소를 먼저 했다. 밀대로 바닥을 닦으면서도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야할지 답이 나오지 않아 몸과 마음이 무거워졌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쪼그려앉아 전화기를 붙들고 관장님께 보내드릴 일일 보고를 적었다. 그때 갑자기 끼익 도장 문이 열렸다. 오늘 저녁 타임을 무려 세 타임을 연달아 뛴 관원분이었다. 아이들 몇몇과 체육관을 나서며 편의점에 들러 음료를 마신 모양이었다. 목을 축이는 아이를 뒤로 한 그가 음료 한 캔을 건넸다. '고생하셨어요!' 외치며 총총 멀어지는데, 마음 한켠이 묵직해졌다. 누군가 투명한 손을 넣어서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것 같았다. 

'이렇게 멍청하게, 어수룩하게 수업해버렸는데...'

무슨 감정인지 정확히 잘 모르겠다. 죄책감도 있었고 스스로의 무능함에 슬프기도 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재밌다고 하하 웃는 그들에게 드는 고마운 마음도 뒤섞여 있었다. 어딘가 낯선 외국어에는 이런 복잡한 마음을 한 어절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지 않을까? 스프라이트 캔의 바깥으로 차가운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B코치님에게 늦은 시간임에도 전화를 드렸다.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하고, 아이들의 승급 심사에 대한 염려를 구구절절 털어놨다. 코치님은 어린 나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하게 대응하신다. 일단 자신이 내일 일찍 와서 아이들을 좀 봐주겠다고, 아이들이 조금 일찍 올 수 있을지 연락해보겠노라고. 별 도움은 안되겠지만 나도 최대한 일찍 퇴근하고 승급 심사 전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내일 어떻게든 해보자. B코치님한테 누가 되지 않게. 모쪼록 내일 승급심사를 모두 통과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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