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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Dec 08. 2023

맞으면서도 파고들어 보자

무도 일기_2023년 12월 6일


오늘은 복싱장에 가는 날. 퇴근 시간에 느리적거리다가 체육관에 조금 늦게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6시 좀 넘어서부터 사람이 바글바글 끓어서 저녁 시간마다 줄넘기를 할 자리가 없었다. 그 난리통 속에서 줄넘기 할 자리를 찾다가 스트레스 받는 게 싫어서, 아침 댓바람부터 꾸역꾸역 8시 출근을 하곤 했다. 탄력근무제라 5시에 퇴근할 경우 6시 전부터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사람이 많아질 때 즈음 링 위에서 섀도우복싱 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고, 어느 정도 거울 앞의 러시아워를 피할 수 있었다.(거울 앞에는 스텝을 밟으며 잽,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 뒤로는 바글거리는 줄넘기들과 불가리아백, 케틀벨…)


아직 12월 초인데 벌써부터 연말 느낌이 나는지 요즘 들어 부쩍 체육관이 한산해졌다. 대개 약속이 많은 목요일, 금요일 정도만 사람이 없는데 오늘은 고작 수요일인데도 사람이 이렇게 없다니. 사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운동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신입 관원이 많은 날이면 관장님과 코치님은 그들을 집중 마크해줘야 하므로, 오래 다니고 스스로 커리큘럼을 밟아가는 관원들은 알아서 스스로 운동하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우리 체육관은 관장님과 코치님들이 하루에 한번씩 모든 관원의 미트를 받아주고 거울 앞에서 자세 교정도 살펴주려 애쓰시는 편이다. 그렇기에 체육관이 인파로 분주한 날에 운동하러 갔다가 신입 관원들에 밀려 미트를 못 치거나, 거울 앞에서 아무 교정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허우적거리다가 돌아오는 날이면 섭섭한 마음도 들고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불안해지기도 했다.(한편으로는 유도장에서 나 역시도 흰띠분들에게 낙법을 가르쳐드려야 할 때면 검은띠가 섞인 익히기 대열에 신경을 쓰지 못하곤 한다. 그 순간의 코치로서의 분주한 마음을 떠올려보면, 나를 외면하는 복싱장 관장님 역시도 마음이 바쁘시겠구나 싶다.)


한적한 날이니만큼 느긋이 운동하고 마무리 운동도 눅진하게 해야지, 생각하는데 ‘태’(가명)가 다가와 인사했다. 이십대 초중반 정도의 그는 이 복싱장을 오래 다닌 데다가 최근 들어 더 열심히 다니면서 실력이 마구 성장중이다. 고맙게도 종종 이 못난 내게도 가벼운 매스나 스파링을 제안해준다. 오늘도 런닝머신을 타고 나란히 걷다가 그가 먼저 몸치기 스파링을 제안했다. 알겠노라고 하고 서둘러 몸을 풀었다.


오늘은 링에 올라가기 전부터 지난주의 스파링에서 개선해야 할 점 한 가지만 곱씹었다.

“일단은 상대 안으로 파고들기”

내 가장 큰 문제점은 겁이 많다는 거다. 유도의 경우에는, 전방회전낙법을 높이 뛰지 못했던 흰띠 시절에도 많이 들었던 말이고, 대련을 할 때에도 많이 들었다. ‘너는 겁을 내려놔야 해. 그럼 지금보다 더 잘할텐데.’

복싱에서는 맞는 게 두려워서 정작 내 주먹이 닿을 만큼의 사정거리 안으로 못 파고들고 있다. ‘태’는 나보다 키도 크고 팔의 리치도 길다. 태의 주먹은 닿지만 내 주먹은 닿지 않을 거리에서 겁을 집어먹은 채 닿지 않을 주먹을 뻗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더 많이 얻어맞고 의미없는 잽만 날리다가 체력을 소진하게 된다.

지난주의 스파링에서는 헤드기어와 피스를 낀 덕분에 나름대로 과감하게 파고들고 주먹을 뻗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태는 다른 남자분들과 달리 내 안면을 때리는 것에 거침이 없다. 물론 한껏 힘을 뺐다는 게 느껴지지만, 헤드기어를 꼈는데도 정면으로 들어오는 주먹질에 콧등이 많이 아팠던 지난주였다.


“오늘은 조금 맞더라도 파고들어보는 거다. 앞으로 무게중심이 쏠리지 않으면서 스텝으로 뛰어드는 거다.”


헤드기어와 피스를 끼지 않고 몸치기 스파링으로 진행했다. 태는 여느 때와 같이 피스는 물었다. (사실 나도 피스를 물고 싶었다. 혹시나 잘못 맞아 앞니가 나갈까봐 겁이 났으니까. 이제는 피스를 끼지 않으면 파고들 용기가 절반 이상 사라진다. 상대가 나를 배려해주려고 살살 약하게 주먹을 뻗더라도, 아직 스파링 경험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들은 그 주먹에 내 얼굴을 들이밀고 마는 것이다.) 파고드는 연습을 하면서 ‘위빙-훅’ 또는 ‘위빙-바디’를 시도했다. 내 나름대로는 ‘시도했다’고 표현하지만, 아마 멀리서 링 밖에서 보면 팔과 주먹을 대충 뭉개며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다.


허우적허우적 3라운드의 몸치기 스파링을 하고 내려와서 샌드백을 치려고 서 있으려니 ’주‘ 코치님이 다가왔다. 아직 어린 프로복서인 ’주‘ 코치님은 순한 얼굴로, 열정적으로 스파링 팁을 알려주시곤 한다. ‘주’ 코치님은 내게 몸을 좀더 흔들라고 했다. 좌우로 움직이면서 상대를 몰아가라고. 6m X 6m의 크기인 링 위에서 중앙에 서서 상대를 몰고 간다면. 닭들을 코너로 몰듯이 좌, 우로 움직이며 상대의 행동반경을 좁혀가다보면 상대의 다음 이동 위치를 예측하고 주먹을 뻗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어차피 어느 정도 맞는 건 각오해야 해요. 약하게 맞고 상대의 주먹을 흘리면서 강한 내 한방을 상대에게 꽂을 기회를 잡아야 해요.”


몸으로, 스텝으로 해보려니 아직은 감이 오지 않았다. 샌드백과 씨름하며 몸놀림을 연구하고 있는데, 관장님이 주 코치님을 조용히 부르시더니 뭔가 야단을 치시는 거 같았다. 맞는 걸 감수하라는 조언에 대한 위험성을 염려하시는 건지, 아니면 이제 삼십대 중반으로 나아가는 여성 관원에게 스파링 팁을 알려주는 걸 언짢게 생각하시는 건지…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일 수도 있는데 괜히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아마 요즘 들어 부쩍 나약해진 스스로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피해의식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또 나 자신이 한없이 약하고 초라해보여서 그 찌질한 감정 안에 매몰되어 갔다.


유도장에서 다쳤던 양쪽 어깨가 회복이 덜 돼서 가끔 복싱을 할 때도 찌릿, 통증이 인다. 턱걸이를 할 때에도 통증이 이는 각도로 어깨가 당겨지지 않도록 계속 신경써야 했다. 뜨거운 물로 씻으면서 두 어깨를 길게 물줄기에 지졌다. 언제까지 무도를 할 수 있을까, 이 몸이 버틸 수 있을까, 그럼 이후에는 무슨 운동을 해야 할까. 그 운동을 지금 무도를 즐기듯 즐겁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삶을 즐겁게 이어갈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중얼거리다가, 일단은 무사히 운동을 할 수 있었던 오늘에 감사하자고 거울 안의 나에게 부탁했다. 그만 생각하라고.


오늘의 교훈은 “몸을 많이 흔들기.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붙이며 좌우로 움직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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