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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Jan 18. 2024

신년 목표: 상대의 오금에 닿기를

어민선 선생님의 특강에 다녀와서


새해 첫주에 청림유도관에서 유도 특강이 있었다. 메신저를 통해 어민선 선생님의 특강 소식을 접했을 때 내게는 마침 빠른 시일 내에 소진해야할 반차가 남아있었다. 사범님께 먼저 구()청림인으로서 참가해도 될지 양해를 여쭙고, 회사의 신년 혼란을 틈타 서둘러 반차를 냈다. 


특강은 저녁 7시였다. 오전에는 사무실 자리에서 연말에 마감했던 도서 두 권의 온라인 서점 미리보기 페이지를 만들었다. 간단히 자리에서 간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1시 반 즈음 회사를 나와 바로 복싱 체육관으로 갔다. 유도 특강은 기술 수업 위주로 진행될 것 같아서, 한 시간 반 정도 복싱장에서 하루치의 땀을 미리 뺐다. 도복을 챙긴답시고 집에 들르니 피로가 밀려와 하마터면 이불 안에 녹아들 뻔 했다.

나태해지려는 몸에 커피를 들이붓고, 가까스로 도복을 들고 회기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7시가 임박한 시각이었다. 도장 인근의 편의점에 들러 1.5리터 게토레이와 포카리, 종이컵을 샀다. 오랜만에 옛 도장에 찾아뵐 때는 함께 땀흘리며 마실 음료를 사가곤 한다. 관장님과 사범님께서는 두 손 가볍게 오라고 하시지만, 종종 찾아뵙고 땀흘릴 수 있게 허락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도장에 들어가보니 많은 인원이 줄지어 구르기를 하고 있었고 나처럼 음료를 사온 사람들이 많았는지 테이블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음료 페트병들이 모여 서 있었다.(게토레이와 포카리스웨트 등 비슷한 이온음료로 대동단결한 유도인들의 마음이 재미있어서 웃음이 났다.) 서둘러 도복을 갈아입고 구르기의 마지막 순서인 전방회전낙법이나마 겨우 함께 굴렀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가 했더니, 특강을 진행해주실 어민선 선생님께서 코치로 계신 하계중학교의 선수부 학생들도 와 있었다. 그들과 청림유도관의 관원분들과 뒤섞여 익히기를 돌았다. 나는 66키로 미만 대열에 섰는데 체구가 작은 학생들임에도 기세가 대단했다.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드는 업어치기가 맹렬했다. 익히기를 한 바퀴 돈 뒤, 매트의 중앙으로 크고 둥근 인상의 어민선 선생님이 올라오셨다. 발기술을 중점적으로 알려주시겠다고 하셔서 마음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발기술 없이도 잘 싸워왔다. 그러나-

평소 발기술에 자신감이 없는 편이었다. 키가 작다보니 업어치기에 적합한 체형이라는 생각에 업어치기를 주로 연습해왔고 대련에서도 업어치기, 업어 떨어뜨리기(낮은 업어치기), 허리 껴치기 등을 즐겨 써왔다. 늘 쓰는 기술만 쓰다보니 자주 깃을 잡는 같은 도장의 관원들에게는 공격의 수를 쉽게 읽히곤 했다. 이렇듯 나의 싸움일 경우에는 그저 개인적인 한계로 남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혼자만의 수련에 머무를 수 없었다. 도장에서 유색띠 관원분들이 내게 안다리 후리기나 안뒤축 후리기, 모로 걸기 등 발기술을 물어볼 때면 나는 당황해서 진땀을 빼야 했다. 이제는 유단자였고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어야 했으니까. 선생님께서 마침 약점인 발기술을 수업해주신다니 반가움이 앞섰다.


그날 선생님은 상대와 옆으로 나란히 서서 소매를 잡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긁는’ 발기술을 가르쳐주셨다. 대련에서 잡기 싸움을 하다보면 나 역시도 이와 같은 대치 상황에 자주 놓인다. 그때마다 견제를 하거나 상대로 하여금 발을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가까이 놓인 상대의 발꿈치를 툭툭 차는데, 상대의 다리는 미동도 없었다.

‘와, 이 사람 다리가 꿈쩍도 안하네. 돌덩이 같아. 스쿼트를 많이 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즉, 내 하체의 힘이 상대보다 약해서 기술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러나 어민선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그것이 무게중심의 문제였다는 걸 알았다.

상대의 가까운 소매를 잡아 밑으로 내려누르면서 상대의 발뒤꿈치에 내 발의 안쪽 날을 가져다댄다. 이때 어깨로 상대를 툭 밀치면 상대의 무게중심이 반대편 발로 이동한다. 그렇게 되면 가까이 놓인 상대의 발은 무게중심을 잃고 가뿐하게 뜨게 되고, 나는 돌기둥 같던 상대의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옮겨갔던 무게중심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내리누르고 있던 상대의 소매깃을 들면서 상대의 발뒤꿈치를 긁듯이 차올린다. 상대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게 된다.


선생님께서 선수부 학생을 붙잡고 여러 차례 시연을 하며 가르쳐주신 뒤, 이후에는 매트에 골고루 흩어져서 각자 짝을 이뤄 기술을 연습했다. 처음 뵙는 청림 관원 분과 맞잡고 기술을 번갈아가며 연습하는 내내 ‘어깨를 툭 밀어준다’는 찰나의 몸짓에 대해 생각했다. 작고 사소한 동작 같은데 그것을 수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기술의 결과가 달라졌다. "상대의 무게중심을 흐트러뜨릴 것." 메치기의 과정에서 ‘지읏기’ 이전에 필요한 ‘기울이기’의 목적이 여기에 있다.

나름대로 평소에 유도든 복싱이든 무게중심을 고려하며 움직이고 수련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리가 짧으니 파고들기 어렵다’, ‘키가 작아서 발기술보다는 업어치기가 적합하다’ 등 이런저런 핑계로 연습을 게을리하다보니 기본적인 원리조차 놓치고 있었다. 연거푸 연습하면서도 중간중간 나는 그 사소하고도 중요한 몸짓을 빠뜨리곤 했다. 다리 힘으로 억지로 상대의 발을 밀어 차올리며 낑낑거리고 있으니 선생님께서 다가오셔서 어깨로 밀치는 단계를 짚어주셨다. 

‘유도 4단인데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기본적인 것부터 헤매고 있을까.’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뒤섞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은 기술과 꿀팁을 배웠다는 생각에 재미있기도 했다. 짝이 되어 기술을 받아주시는 분이 부드럽게 받아주시기도 했고, 이후 자유대련에서도 서로 부상없이 잘 마무리지었다. 


고백하자면, 4단이 되고 난 뒤 그 타이틀이 너무 무거워 되려 약점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4단이라면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에 자신없는 발기술은 익히기 시간에조차 연습을 망설였다. 행여나 상대가 고개를 갸웃하기라도 할까봐. 그러나 그렇게 회피할수록 기술은 더욱 퇴보할 텐데. 덕분에 내 안다리 후리기는 여전히 골반을 열지 못하고 발 끝으로 작게 원을 그리고 있다. 오금에 닿지 못하고 도망치기 바쁘다. 이런 상태이니 기울이기든, 무게중심이든 고민할 틈조차 없었지. 그저 업어치기가 들어갈 틈만 노리며 급급하거나 그나마 발을 쓸 때는 업어치기로 연결하기 위한 시늉에 그치곤 했다.


어쨌든 새해 첫주, 한 해의 시작점에서 맞닥뜨린 그날의 특강은 나의 약점을 직면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비단 ‘발기술’이라는 약점 뿐만 아니라, 약점을 부끄러워하고 회피해오기만 했던 나약한 마음까지도. 

올해 유도에 있어서의 신년 목표는 발기술을 하나라도 완성하는 거다. 자신있게 쓸 수 있는 발기술 하나를 만드는 것. 다리가 짧다면 더 깊게 상대에게 파고들어보자. 골반을 열고 발끝으로 크게 원을 그리자. 맞잡아줄 상대가 없다면 벽을 붙잡고 발 끝으로 크게 원을 그리는 스텝 연습이라도 하자. 되치기를 당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계속 시도하자. 


언젠가 기필코 상대의 오금에 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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