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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도인 박대리 Mar 23. 2024

덤덤하게 부서지는 3월

2024년 3월의 무도 일기



요즘은 통 글도 쓰지 않고 그냥 일상을 흘려보내고만 있다. 평일에는 주2-3회 정도 복싱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주말에는 아침 유도반에서 운동을 한다. 평일의 하루, 화요일에는 퇴근 후 유도관에 가서 11시까지 도장에서 코치 일을 한다. 운동을 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보니 늘 집은 세탁물이 마를 날이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들이붓고 있으니 어느날인가는 섬유유연제 뚜껑을 돌리다가 문득 뚜껑이 계속 헛도는 것 같은 신기루를 보았다. 끝나지 않는 gif 파일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냥 그런, 메가리 없는 찐득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회사에서는 좋아하던 팀장님이 퇴사하셨다. 팀원들은 힘들지 않다고 하지만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팀장님이 계셨다면 슬기롭게, 모두가 아프지 않게 조율해주셨겠지. 회사 업무에 치여, 기껏 잡아둔 반차를 취소하는 팀원들을 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있다. 내가 맡은 책의 마감만으로도 벅차서 숨을 헐떡이고 있다. 나는 고작 '박대리'로 남아서 감히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곤 한다. 내가 나서는 게 오바인 것 같으면서도 책임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런 경계를 배회하고 있다. 어쩌면 그건 부질없고 주제넘는 고민이다. 고작 박대리 주제에... 팀원들은 이미 그들 자체로 역량이 뛰어난 디자이너들이다. 자신의 경계를 스스로 지키며 나아간다.

3월 동안 나는 몇 차례의 팀장 면접 자리에 동석했다. 말없이 대표님 옆자리에 앉아서, 어쩌면 상사가 될 수도 있는 어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생각보다 덤덤했던 3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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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머리를 짧게 잘랐다. 이례적으로 긴 머리로 몇 년을 살았고 당연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나게 그려오던 '무도인 박대리' 캐릭터가 머리를 묶고 있는 모습도 눈 앞에 아른거렸지만 참을 수 없었다. 무언가 잘라내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정체된 것 같은 기분이 삶 전반에 깔려 있었으니까.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으면 유년의 홍제천은 녹색 이끼가 가득 끼고 악취가 났다. 자꾸만 그 풍경이 떠오른다. 갈라진 하얀 살처럼 마구 널부러진 흰 바위들과 사이사이에 낀 진한 녹색 덩어리들. 요즘의 부패해가는 내 삶의 모양새가 딱 그 꼴이다.


운동을 하지 않는 날은 술을 마시는 날이다. 이제 내 주변에는 결혼한 친구, 아니면 술을 마시는 친구밖에 남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결혼한 친구들은 모두 없어졌다. 다른 세계로 가버린 것처럼, 다른 얼굴, 다른 눈빛으로 멀어졌다. 마치 나는 드라마의 시즌1 출연진에 머물러 있고 그들은 시즌2나 시즌3로 넘어가 버린 것만 같다. 요즘도 종종 청첩장을 받는다. 지그재그에서 산 싸구려 하객 원피스를 입고 간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드레스를 입고 더 낯선 얼굴이 된 것을 관람한다. 그런 저녁이면 나는 시즌1에 남은 이들과 앉아 진통제 같은 술을 들이키며 웃는다.

그리고 속죄하듯 지친 간을 안고 다음날, 다다음날 체육관에 가서 땀을 흘린다. 마셨던 술이 그대로 온몸의 구멍에서 쏟아져나오는 것 같다. 토요일 아침, 숙취로 무거운 머리를 안고 눈을 뜨면 내 날숨에서 술 냄새가 난다. 오전 10시까지 유도관에 가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유리문 너머에 보인다. 도망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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