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주중야근, 주말근무를 몇 주째 반복하며 ‘진짜 사노비 못해먹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후배S가 질문을 했다.
“혹시 평소에 신입사원에게 해주는 조언이 있으세요?”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스쳤다. 하나는 내가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무엇이었는지 복기했고, 또 다른 하나는 정혜신 박사님의 책 <당신이 옳다>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함부로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하지 말라는 문구가 생각나서 잠시 고민을 했다.
“갑자기 왜요?”
“아, 오늘 신입사원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마지막에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냐고 묻는데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말을 해주고 왔나요?”
(있었던 일에 대해 쓰고 보니 질문 하나 받아놓고, 난 참 많은 질문을 하는구나.)
“‘태도가 전부다.’라고 이야기했더니, 어떤 태도를 이야기하는 거냐고 되묻더라구요. 지각하지 않고, 시키는 것 잘하고 등등 기본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얘들이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여러 부서 선배들을 만나고 있는데 다들 꼰데라는 소리 들을까봐 조심스러워 조언 하지 않았다더라고요.“
“정말? 선배 노릇하는 것도 참 어렵다. 그쵸? 음.. 지금 해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이야기를 해준 것 같아요.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것 같아.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엔 개인적으로는 ’사고하는 힘‘에 대한 이야기 해줄 것 같아요. 일을 함에 있어서도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생각하는 힘은 진짜 중요한 것 같거든.“
“그렇잖아도 방금 회의할 때 팀장님과 책임님 대화를 들으면서 아이패드에 ‘사고는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라고 썼었어요.“
조언은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내 말에 동의해주고, 평소 내 행동과 태도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매사에 날 관찰하고 평가하며 보고 배우는 친구들이 있으니 항상 말조심, 행동조심 해야한다는 다짐도 했다. 연차가 올라갈수록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보이지만 일과 사람을 책임지는 것은 꽤 많이 두렵고, 후배들이 많아질수록 선배들의 눈보다 그들의 눈이 더 무섭고 어렵다.
이런 나의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우연찮게 인스타 릴스 영상 하나를 보게 됐다. 찾아보니 유튜브 <공부왕찐천재 홍진경> 채널에 21년 12월 27일에 올라온 ‘술김에 속마음 고백하는 홍진경 (랜선회식)편‘ 4m50s ~ 5m30s에 나오는 40초 가량의 영상이었다.
“라엘이가 홈스쿨링하면서 책이나 실컷 봤으면 좋겠어. 우리 라엘이가 진짜 책을 좋아했던 애예요. 책에서 핸드폰으로 넘어갔어. 난 그게 마음 아파. 내가 책을 왜 봐야 한다고 생각하냐면 삶이 매 순간 선택이다? 글을 많이 읽으면 선택을 잘하게 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해요. 그건 분명해요. 그렇다면 영어 단어 몇 개 더 아는 게 뭐가 중요해요? 사유를 깊게 하고 좋은 선택을 하는 것 그게 훨씬 더 필요하더라고 살아보니까.“ https://youtu.be/VqZ4jFdi6cs
한 마디 한 마디 구구절절 얼마나 공감이 갔는지 모른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많이 읽고 있지 못한다. 하지만 과제의 프레임웍을 고민할 때 다양한 책과 아티클을 읽으며 다른 산업의 사례를 보고 비틀어 생각해 프레임을 짜는 경우가 왕왕 있다. 아무리 유튜브에 모든 게 다 있는 미디어의 시대라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영상보다 텍스트 소비가 더 많고 더 좋아하는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이다. 미디어로 쉽고 빠르게 습득하는 것도 좋지만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생각하며 소화할 수 있는 책과 글이라는 매체가 아직까지는 더 좋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내게 함께 일하고 싶은 후배란 똑똑한 놈, 손 빠른 놈, 행동 빠른 놈도 다 좋지만 그건 스킬이고 ‘생각 많이 한 놈’을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배라고 모든 걸 다 알 수 없는 노릇이고 함께 생각을 나누다보면 이야기가 깊어지고 논리가 촘촘해진다. 사고하는 것도 태도라고 보는 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고력 좋은 놈들이 태도도 좋고, 똑똑하고, 손도 빠르고, 행동도 굼뜨지 않고 일도 잘한다.
18년도에 처음 리더가 되어 조직을 꾸리고 처음으로 그룹 신입사원 마케팅 지원자 직무면접관을 한 적이 있다. (벌써 5년 전 일이라니..!) 한 자 한 자 눌러쓴 자기소개를 읽다 보면 나 때와 또 다르게 열심히 살아온 요즘 후배들의 경험치와 스펙과 필력에 놀란다. 하지만 이내 얼굴 마주하고 질문 한 두 개 하다 보면 ‘이 친구는 기사라도 찾아보고 왔구나, 경험을 바탕으로 회사와 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고 온 친구구나’가 느껴진다. 그날 일기장에도 ‘내가 뭐라고 그대들의 수고로웠던 과거를 들추고 찬란할 미래에 왈가왈부하겠냐만은 오늘 922호에 온 귀한 인연들 모두 좋은 결과 있길..’이라고 썼을 정도로 조심스럽지만 평가는 면접관의 기준과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경험에 비춰보면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방에서 페어로 평가했던 선배는 버틸 수 있는 놈인가 본다고 했는데 기준이야 어쨋튼 우리가 평가했던 점수는 유사했다. 면접 날 어떤 방에 들어가서 핏 맞는 면접관을 만나는 것도 그 사람 복이다.
며칠 전 유튜브 <무빙워터> 채널에서 엘레먼트컴퍼니 대표이자 <의미의 발견>, <본질의 발견>, <기획자의 습관>, <일상의 습관>의 저자 최장순님의 인터뷰를 봤다.
“요즘 사람들은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감이 필요할 때마다 철학서를 본다. 그분들은 영감이 필요할 때 어떤 로직으로 프레임을 설계하고 사유했는지 깨닫는 과정에서 많은 인사이트가 생긴다. 그 사유의 로직을 한 번 적용해 본다. 결국 생각이 흘러가는 것은 이벤트들이 전개되는 로직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그것을 사건의 로직이라고 들레지 같은 사람들은 표현했다.“
”사람을 채용할 때 (한국어든 영어든 언어가 많으면 더 좋고) 독해력, 요약 능력, 경청을 기본으로 한다. 또란 어떤 직무이건 글쓰는 능력이 있는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뽑는다. 좋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뛰어나도 뽑지 않는다.“
https://youtu.be/hRvxXta9ME8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건너 건너 아는 분이었고 오랜기간 SNS를 팔로우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대표님이 현 회사를 창업하기 전 브랜딩회사에 근무하실 때, 전전 회사 브랜드 프로젝트를 진행하셨어서 프로젝트 결과물에 대해서도 직간접적인 경험이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고 사유의 힘이 무척 단단한 분이구나를 새삼 느꼈다. 무엇보다 채용할 때 하드스킬 셋이 기깔나는 것도 좋지만 ‘독해력’, ‘요약능력’, ‘경청’ 능력을 갖춘 ’따뜻하고 좋은 사람‘을 뽑는다는 부분에서 진심 손뼉 쳤다. 요즘 막내 후배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라 더 그랬을지도...
이 영상을 본 날이었다. 후배J와 점심을 빠르게 먹고 서울식물원을 한 바퀴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 최근 프로젝트를 같이 했고, 함께 일 하면서 많이 혼냈던지라 주늑들어 의기소침해 있던 후배가 마음에 걸렸다.
“프로젝트하면서 뭐가 가장 힘들었어요?”
“책임님과 일하면서 처음 느꼈는데요. 전 대충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말이든 사건이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항상 ‘왜’를 물어보시잖아요. 그때 순간 말문이 막혀요.“
“내가 질문이 좀 많죠? 이해가 안 되면 넘어가질 못해요. 그리고 난 현상보다 그 현상이 나타난 이유가 더 궁금한 사람이라 그래.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기도 하구요.“
“그리고..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진짜 팀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생각을 자주해요. 이번 프레임은 어떻게 하루 만에 생각하신 거예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는 걸까 놀랍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사고의 전환이 진짜 빨라요. 회의가 끝나고 나면 ‘나는 진짜 생각이 느린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 자주 현타와요.“
“그렇지 않아. 나도 맨날 ‘하기 싫다. 잘 모르겠다.’ 이런 말을 달고 살잖아요. 부끄럽네 진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섣부르게 조언을 하나 한다면, J님 영상 엄청 본다고 했잖아? 그 시간 아주 조금만 줄이고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요? 책이라는 게 저자가 본인 생각을 깔끔하고 읽기 쉽게 정리해 놓은 글이라 그 생각의 흐름을 파악하기 좋잖아. 그 뿐이야 목차는 요약본이자 개요고, 문해력이 늘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니까. 우린 생각하는 게 일인 사람이니까 그 힘을 단단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물론 안해도 어쩔 수 없고”
놀랍고 고마웠다. 그리고 그 말을 기억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써놓는 것도 맞다. 일단 나는 센터 내 몇 안 되는 학사 졸업자다. 1n차 경력이라 이제 학력보단 경력이 더 중요한 연차지만, 다들 석박사님들 이시고 나와는 다르게 다수가 특목고 국내외 탑티어 대학 출신의 수재들이다. 채용할 때는 학교가 가려있다지만 뽑아놓고 보면 좋은 학교만 모아 놓은 대기업의 학교 편력. 일 머리와 학교는 물론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학교 나온 분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뿐이랴 난 항상 모르고 부족한 게 많아서 엉덩이 무겁게 일하는 사람이다. 똑똑한 분들이 빠르게 생각하는 걸 시간의 무게로 쫓아가는 사람이랄까. 그래서 과제가 생기면 온종일 그 생각을 하는 것도 맞다. 그러다 보면 길 가다 샤워하다 문득! 생각나는 게 아이디어다. 그래서 ‘아니, 난 순간 생각난 게 아니라 온종일 그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 데 있어 보이고 싶었나? 말을 뱉지 못했다.
이렇게 글을 써놓고 보니 나 세상 꼰데에 잘난 체 엄청했네 싶은데 나도 식견 높고 유식해지고 싶다. 진심. 써놓은 글에 낯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 라며 급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