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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I 밥그릇 06화

AI는 시험 과목이 아니었다.

by 맨디

직업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고민만 많았다. 어쩌면 깊이 있는 성찰 없이 한 선택들에 대가를 치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선생님의 한마디, 교수님의 한마디에 문과에서 이과로, 공대로, 또 건설업으로 인생이 흐르는 동안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 그 엉켜버린 응어리를 나눠서 할부로 풀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그래서 매 순간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걸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쳐왔던 것 같다.


1.

회사에 입사하고 처음 느낀 건, 열등감이었다.


연수원 교제 모퉁이에 '나는 회사가 너무 좋아.'라고 써둔 메모가 아직 남았다. 좋았다. 엔지니어를 채용하는 대한민국의 어지간한 회사들로부터 모두 퇴짜를 맞던 차였다. 운 좋게도 그중 우두머리라고 불러도 좋을 굴지의 회사에 들어갔다. 월급도 많은데, 성과급도 줬다. 멀리 비행기를 태워 새로운 세계도 보여줬다. "입사만으로도 중산층이 되었다"는 친척 어른의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런 벅참이 아마 밖으로도 새어 나왔으리라.


그런 나를 노골적으로 비꼬는 이들이 있었다. '선배님은 공부 못했잖아요'하는 소리를 면전에 듣기도 했고, '고작 회사에 들어온 게 자랑스럽냐?'는 핀잔도 들었다. 회사에는 잘나고 똑똑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익숙하고 나태해진 퇴사 무렵의 눈으로도 그만큼 압도적이었는지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입사 초기 한동안 나의 회사생활의 동력은 열등감이었다.


극복하기 위해 확실한 조언들을 챙겼다. 영어는 기본이고, 회계를 공부하란 이야기를 들었다. 책 몇 권 읽는 걸론 부족하다고 '증'으로 증명하라고 했다. 그렇게 회사를 다니면서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신문 같은 재질로 영어가 꽉 찬 AICPA 수험서를 처음 들춰보던 커피숍이 기억난다. 볕 좋은 창가에서 책을 이리저리 들추며 책 냄새를 맡았다.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내 열등감이 다소 해소되는 뿌듯한 기분이었다.


회사생활도 열심히 했는데, 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출렁출렁 파도치는 그릇을 들고 선 느낌이었다. 일희일비하느라 유연하게 넘기질 못 했다. 결국 매번 휘청이는 기분에 못 이겨 대책 없이 퇴사부터 질렀다. 나를 뿌듯하게 만들어준 AICPA 네 과목을 모두 통과한 이듬해였다.


2.

호주에서의 커리어는 매번 요동쳤다. 첫 직장은 무급 인턴으로 기회를 얻었다. 30분짜리 인터뷰 대신 3개월간 무급으로 일하면서 나를 충분히 증명해 낼 시간이 주어졌다. 내가 기대한다고 말한 연봉보다 3천만 원을 더 올려 쓴 연봉 계약서를 들고 야라강변을 폴짝폴짝 뛰었다. 민들레 홀씨가 한 번에 확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육아 휴직을 마치고 슬슬 복직해야겠다고 찾아간 회사에서 그 3천만 원을 더 올려 써준 연봉 계약서와 똑같은 양식의 레터를 받았다. 해고 통보였다. 프로젝트가 연달아 실주했다던가, 그래서 이미 몇몇을 내보내고 있다는 상황을 미리 들었더라면 좀 나았을까? 내겐 그야말로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까지 겹쳤다. 우리 아이가 2019년 6월 생이니까, 아기가 태어난 지 꼭 8개월 만의 일이었다. 합격 후 계약서를 기다리던 회사로부터 줄줄이 채용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들을 받았다. 전화를 끊고 내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자, 영문도 모르는 여덟 달짜리 아이가 따라 울었다. 펑펑 우는 아이를 보면서 생각이 넘쳤다. 무언가 너무 꽉 차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도 감이 안 잡혔었다.


잘하는 걸 하기로 했다. 자격증을 줄줄이 땄다. 우리나라에서 PMP를 따두었다면, 호주에서 유명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자격증인 PRINCE2를 땄다. Agile project management가 새로운 대세라고 했다. 관련된 학위를 따고, 인턴을 마쳤다.


그렇게 호주에서도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3.

돌이켜 보면 매번 그랬다. 열등감에 잠기거나,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것들이었다. 그게 직접적으로 다음 진로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결정이 어려울 때 내딛을 용기를 주거나, 내가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어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AI도 그렇게 접근했다. 챗 GPT, Gemini, Perplexity, 뭐 아는 AI 툴을 모두 켜놓고 "자, 이제 내가 뭘 공부하면 되는지 말해봐" 했다. 어떻게 해야 죽어가는 내 커리어에 조금이라도 숨을 붙여 놓을 수 있을지 반복해 물었다. 그렇게도 어렵던 공학부터 회계, 매니지먼트의 새 툴들을 연달아 공부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익히는 건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그렇게 AI와 함께하는 수험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AI는 자격증처럼 끝이 있는 시험 과목이 아니었다. 내가 늘 해왔던 방식, 시험을 보고 점수로 증명하는 방식 만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세계였다.


AI는 시험 과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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