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의 시간

퇴사일지 17

by Juas

버지니아 울프는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자립력이 생기고 자립력이 있어야 사물을 그 자체로 사유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고 했다. 연간 500파운드는 지금의 시세로 따지면 5000만원 가량..적지 않은 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금수저였다. 울프의 글이 아니더라도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기본 소득이 확보가 되고 난 다음에야 뭔갈 생각할 여유도 생기는거라고. 옛 동화에도 베짱이가 예술가이지 않나. 그래서 돈버느라 맨날 바쁜 나는 늘 비슷한 생각들만 하는가보다.


울프의 조언을 따라 좋든 싫든 들어오는 일은 모조리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다. (그런데 연 5000만원을 ‘여유롭게’ 버는법은 왜 알려주지 않으셨나요?) 아무튼 지금은 정말 애송이라 일의 경중과 퀄리티 그런걸 따질 레벨이 아니기도 하고 뭘 해도 배우는점이 있어서 일단 뭐든 하고 오는 12월엔 1년간 했던 일을 결산 후 방향을 잡으려고 한다. 그렇게 하려고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리뷰를 쓰고 있다. 좋은 작업을 하려면 기획도 촬영도 편집도 색보정도 나혼자 모든걸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잘 할 수 있는걸 더 잘하는 게 맞지 않을까.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는 정도가 어디까지인지도 알 수 있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쓰는 시간, 운동하는 시간만큼은 꼭 빼두려고 한다. 그 시간들이 내게는 울프의 시간이다. 무한히 불명료한 이 모든 삶을 기록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삶은 휘발되고 없다. 아주아주 느리더라도 개인작업도 해야겠다.


한달 내내 거의 편집만 했는데도 몸이 너무 힘들고 생기가 없어지는 게 느껴진다. 일을 주는 감독님이 앉아서 마우스 딸깍이는 일은 에너지가 쓰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해당하지 않는 말 같다. 날은 이렇게 좋은데 요즘 좀 우울하다. 오늘은 잠옷을 벗고 예쁜 옷 입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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