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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영 Dec 27. 2017

공동체의 미래가 '여성'이기 위해서

<국민주권선언의 의의와 한국 사회의 과제> 여성부문 발제문

2017년 12월 18일 2017민주평화포럼에서 주최한 <국민주권선언의 의의와 한국 사회의 과제> 토론회에 여성 부문 패널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발제했던 발제문을 여기에 공개해둡니다. 


<배경>


1. ‘남성’의 종말


2017년 세계를 관통한 문장은 단연 ‘Future is Female’이다. 2017년 벽두 트럼프를 반대하는 워싱턴 여성행진에서 등장한 이 문장은 현재 사회에서 여성이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2014년부터 ‘남성의 종말’이라는 명제를 주장해 온 해나 로진은 더 이상 남성 노동자에 의존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경제체제를 짚어내고, 사회적으로 훈련된 ‘남성성’이 현재의 후기 자본주의에서 다양한 양상을 통해 도태되는 과정을 드러냈다. 근대 이후 어느 시대에서나 나름대로의 페미니즘 웨이브는 존재해 왔다. 각 페미니즘 웨이브는 그 시대의 여성이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반영해 왔는데, 2010년 이후 등장한 여성이라는 주체는 자본주의라는 체제 속에서 살아남은 경제주체로서의 여성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해나 로진은 <남자의 종말>에서 유의미하게 한국의 사례를 다룬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남성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받고 졸업하며, 원하는대로 일하고 소비하며 살 수 있게 된 여성들은 2010년도가 지나면서부터 수년에 걸쳐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했다. 집단적으로 결혼을 피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젠더문제에 있어서 한국 사회는 가장 역동적인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2. 노동자로서의 여성


1997년 이후 여성 고용율은 계속해서 가파르게 상승해 왔다. 세계적으로 남성의 안정적인 풀타임 고용체계가 붕괴하고 있는 것은 자명하나, 한국의 경우 ‘IMF’라는 확연한 충격과 함께 여성 노동자풀이 계속해서 증가해왔다. 남성 생계부양자라는 개념은 지속적으로 붕괴해 왔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지금껏 생계부양자로 치부되었던 남성들의 고용안정성을 위협했다. 이는 IMF 뿐만 아니라 중공업이 더 이상 압도적인 경제성장을 이끌어나가지 못하는 한국의 경제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위 ‘맞벌이 부부’는 한국 가족에서 이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 되었다. 50대 60대의 소위 베이비부머 세대 남성들에게도 ‘맞벌이’는 당연한 수순으로 인지된다. 그러나 동시에 남성이 생계부양자 역할이라는 것은 수행여부와 무관하게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로 존재해 왔다. 이는 여전히 여성의 역할이 돌봄노동에 전담되며, 사회복지나 서비스업에 여성직군이 대거 몰리게 하는 요소로 작동했다. 현재 여성들의 중간임금 일자리 취업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나, 동시에 60세 이상의 여성들은 대부분 저임금 일자리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여성의 현실과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적 구조 속에서 흔히 여성들은 결혼 및 출산과 맞물리는 시점에서 경력단절을 경험한다.


노동시장이 좀 더 안정적이고 가족임금에 부합하는 내부노동시장과 좀 더 유연하고 시간제 저임금에 부합하는 외부노동시장으로 분열되었을 때, 시장주의의 폭력은 여성의 억압 문제와 밀접하게 결합한다. 젊은 여성들이 중간임금을 받고 있을 때 고령 여성들은 외부노동시장에 다수 고용되며, 경력단절 현상은 여성들을 외부노동시장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와 동시에 남성 생계부양자의 소득은 지속적으로 떨어지면서 마찬가지로 외부노동시장이 확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3. 혐오사회의 여성     


‘메갈 웨이브’, ‘페미니즘 리부트’, ‘영영페미’ 등으로 지칭되는 최근의 페미니즘 조류는 이러한 경제적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남성 생계부양자라는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면 가부장제라는 시스템은 허구적 시스템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 막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한 젊은 여성들은 이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이들은 결코 고용이 불안정한 남성중심의 세계에 편입할 의향이 없다. 여성인 경제주체로서의 자신을 배제하는 세계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생계부양자로서의 사회적 위치를 상실하고 개인적 주체도 되지 못한 ‘루저’ 남성성의 등장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여전히 받으나 그 이데올로기에 호명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미 주어진 몫을 자신에게서 빼앗아갔다고 전제된 여성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정립해 왔다. 2000년대에 자주 등장했던 여성혐오적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것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등장한 남성과 맞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는 소비주체로서의 여성은 황새가 뱁새 쫓아가듯 다른 나라의 스타일을 거북스럽게 따라하는 ‘된장녀’로 그려지거나, 남성을 경제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김치녀’로 그려지거나, 남성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메갈년’으로 그려진다. 경제상황에서 뒤쳐진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에 호명된 주체들(남성들)이 박탈감을 느끼며 현재의 여성억압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한국 사회 여성혐오의 현 주소다.


2016년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서초동 화장실 살인사건’이 보여주는 바는 바로 이런 사회적 구조의 모습이다. 이외에도 여성들이 번화가를 걸어다녔다는 이유만으로 돌 등으로 폭행을 당하는 사건 등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이런 형태의 사회적 박탈감과 갈등을 보여준다. 이 사회 갈등의 주체들은 강력하게 개인적 주체이기를 요구받아 온 세대다. 개인적 주체들의 갈등 인식은 쉽게 구조적 문제로 도약하지 못한다. 내 옆에 있는 ‘타인’을 공격하는 형태의 사회고발과 정의구현은 다양한 양상으로 집단들 모두에게 스며든다. 이 경우 이 고발을 해결할 당사자는 ‘개인’으로서의 자신들이 결합한 공동체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줄 ‘관리자’로서의 타자다. 이는 사법, 여론, 정부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나타나지만 어떤 갈등에 대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존재로 호출되는 것은 동일하다.


4. 거래되는 자원으로서의 여성


2016년 12월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는 엄청난 사회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지도는 가임기 여성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을 그라데이션으로 표시함으로써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가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만 보여주는 인식을 현저하게 드러냈다. 2017년 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는 여성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하향선택결혼을 권장해야 한다며 ‘무해한 음모 수준’에서 문화콘텐츠 개발에 힘써야 한다는 결론의 연구를 발표함으로써 마찬가지로 사회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남성 생계부양자를 중심으로 여성이 가정에 종속되게 하는 방식은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를 필연적으로 자원으로 가정하게 된다. 이런 인식 차원에서 여성의 신체는 출산을 위한 도구로 비춰지고, 성폭력 등 섹슈얼리티를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 놓이기 쉽다. 2016년 말과 2017년 초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가 여성의 신체를 담보삼아서 자신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점을 보여줬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 현재 경제적 구조는 여성을 단순히 자원으로만 환치해서는 유지할 수 없다. 무엇보다 여성들 자신은 이제 결코 자원으로서의 위치에 머물 생각이 없으며, 반복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통해 자원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여성들을 얼마만큼 정당하게 주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이 사회의 이후 성장을 담보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도 Future is Female이라는 문장은 성립한다.     

<과제>


1. 노동문제의 개혁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한 노동이 늘어날수록 현재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는 여성이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게 될 확률이 늘어난다. 무엇보다 60세 이상의 여성들이 처해있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노동시장 자체의 개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노동유연화를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고용형태들에서 모두 여성노동자의 비중이 높다. 그러므로 고용형태를 개선하는 것은 여성노동자의 처우를 직접적으로 개선하게 된다. 동시에 여성이 ‘이중의 굴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돌봄 노동이 전적이라 할 수준으로 사회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여성임금이 남성임금의 63%라는 통계결과는 지난 3월 8일 ‘조기퇴근 시위’ 등의 이슈로 드러난 바가 있다. 이는 동일한 직무에서 일하는 여성과 남성의 임금보다는 여성직군 일반과 남성직군 일반의 차이로 집계되고 있다. 내부노동시장과 외부노동시장의 분리를 막기 위해서라도 성별을 통해 직군을 분리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다. 또한 출산과 육아의 문제에 있어 전격적인 경력단절 예방제도 확립이 절실하다. 직장별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 시스템으로 적용하여 유연노동에 종사하기 쉬운 여성노동자들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철저하게 적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주요한 노동자투쟁은 여성노동자투쟁으로 드러났다. 여성노동자들은 임금과 처우에 있어서 노동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쉬우며, 동시에 감정적으로도 성적으로도 착취당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지 못했다. 여성의 노조 조직률을 확대하고 노동조합 내 여성 상근자와 임원의 비율을 늘리는 것 역시 중요한 여성노동의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성평등을 새로운 규범으로 확립


우선 무엇보다도 여성을 자원으로 인지하지 않는 문화적 인식을 확산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여성의 신체를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책의 차원에서부터 여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활용’하는 게 아닌 아닌 ‘복지’의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성폭력과 관련한 개념과 정의들을 사회담론으로서 통일하고 일관된 처리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이 방법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을 경우, 여성들은 쉽사리 ‘꽃뱀’이라는 비난에 직면한다. 혹은 남성 일반도 마찬가지로 어디까지가 ‘성폭력’인지 알지 못한 채 쉽사리 성폭력을 비난하고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지 않은 채로 갈등의 골만 깊어져 갈 수 있다. 사회담론적 토론의 장을 확립해서 성폭력을 진지한 사회적 문제로 띄우고 풍부하게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직접적·간접적 성차별을 금지하는 정책이 확대되어야 할 필요도 있다. 성폭력과 성희롱 같은 직접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을 평가절하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어야 한다. 이는 기업을 비롯한 사회적 구조를 개선과 함께 다양한 젠더의 차원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정책의 확대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차별금지법 도입이 그 시도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새로운 남성성의 발견


최근의 젊은 세대 남성들에게서 ‘루저’라는 형태의 남성성이 등장한 것은 유의미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과거 산업화시대의 남성들이 가졌던 생계부양자의 지위가 주어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며, 민주화시대의 남성들이 가졌던 사회를 새롭게 개혁해나가는 위치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무엇보다도 이성애 관계에서 실패할 것을 가정하고 자조하거나 여성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자아를 보여준다.


이는 이미 사회경제적 관계가 변화했지만 아직 변화하지 못한 ‘남성성’의 이데올로기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현재 ‘남성성’의 이데올로기가 호출하는 정상적인 남성성은 여전히 생계부양자의 맥락에서 규격화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 남성과 여성에게 이성애적 관계는 필연적으로 전제되는데, 동시에 남성에게는 자본주의적 압력이 반복되어서 주입된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현재의 실패하는 남성성을 경멸하기 쉽고(이백충), 남성들은 부상하는 여성의 인베이젼을 증오하게 된다(김치녀).


서울시 양천구에서 진행한 ‘독거남 프로젝트’인 나비남 프로젝트는 2010년대 중반부터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한 50대 남성 고독사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출발했다. 이 베이비부머 세대의 남성들은 생계부양자로서의 위치가 사라지고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이 부재하게 되었을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 안에서 고독사를 하는 양상을 보인다. 양천구의 나비남 프로젝트는 새로운 남성성이 어떤 형태에서 출발해야 하는지의 단초를 보여준다. 사회적 관계를 경제공동체로서의 가정 밖에서도 찾을 수 있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남성성, 무엇보다도 생계부양자로서의 정체성 밖에서 모델을 찾을 수 있는 남성성을 사회적 담론의 차원에서 더 많이 연구하고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독립적 주체로서 남성이 서지 못하면 이런 형태로 존재하는 남성과 평등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4. 개인적 주체를 넘어서서 공동체로


현재 한국사회의 ‘각자도생’, ‘헬조선’이 직면한 가장 커다란 문제는 바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자신의 실패가 허용될 것이라는 신뢰가 아무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구조적 폭력이 산발적으로 흩어진 채 쉽게 약자를 향하고, 약자를 잘라냄으로써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라면 타자에 대한 연대는 쉽사리 이루어지기 어렵다. 오히려 사회적 구조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한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되기 쉬울 것이다.


여성문제와 남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한다. 자신이 놓여있는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숙고하고, 성찰적으로 타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박탈될 가능성이 줄어들고, 삶이 생존 밖으로 내몰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지금에 비해 압도적으로 늘어난 사회에서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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