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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과제가 1만 명의 마음을 건드린 이유 -떠오르다9

AI 시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by 박찬우
벚꽃스팟 방문하여 사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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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 공과대학 강동우 교수가 낸 과제는 단순했습니다. 벚꽃이 피는 시기에 지역 명소에 가서 사진을 찍어오는 것. 이 과제 공고에 1만 3천 개의 좋아요가 붙었습니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몹시 목마릅니다.


효율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ChatGPT에게 레포트를 맡기고, Claude에게 기획서를 부탁하고, Gemini에게 이메일 초안을 받는 시대입니다. 생산성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점점 더 허기를 느낍니다.


AI는 '답'을 잘 냅니다. 그것도 빠르게. 하지만 AI가 내는 답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발에 걸리는 낙엽 소리도, 문득 들어간 카페에서 맡은 원두 향기도, 그날따라 유독 선명했던 하늘 색깔도 없습니다. AI의 답은 경험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강동우 교수의 과제가 화제가 된 이유는, 그것이 '낭만적'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비효율적이어서입니다. 계절을 즐기는 일은 성적표에 남지 않습니다. 벚꽃 사진은 공학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교수는 말했습니다.


따뜻한 봄날에 하루 정도는 계절을 즐겨도 좋지 않을까요?


1만 3천 명이 그 문장에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그들이 누른 건 과제가 아니라, 허락이었습니다.


낭만은 사치가 아니라 감각입니다


낭만을 흔히 '여유 있는 자의 특권'처럼 여깁니다. 할 일 다 끝내고, 돈도 좀 벌고, 그다음에 누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낭만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입니다. 같은 벚꽃 거리를 걸어도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치고, 어떤 사람은 그 길에서 오래된 기억을 꺼냅니다. 그 차이는 시간이 아니라 감각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훈련됩니다. 사용해야 살아있습니다.


AI 시대에 인간이 가진 유일한 비교우위는 '경험의 질'입니다. AI는 데이터를 처리하지만, 인간은 경험을 의미화합니다. 벚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통해 지금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하고, 어제의 실패를 다르게 바라보고, 내일을 다시 설계하는 것—이건 AI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낭만이 없으면, 경험은 그냥 소비로 끝납니다.


공대생에게 시집을, 로보캅에서 인간을


과제 안내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공대생의 메말라 비틀어진 감성 향상


웃자고 쓴 표현이겠지만, 저는 이 문장을 읽으며 '공대생'을 '현대인'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공대생이었습니다. 1학년 때, 한 전공 교수님이 첫 수업 시간에 시집 한 권씩을 읽어오라는 과제를 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공대인은 보다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강의실 안이 잠시 묘하게 조용해졌습니다. 미적분 시험을 앞둔 학기 초에, 시를 읽으라니.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제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미적분 공식은 잊었어도.


그 교수님의 말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제대로 들립니다. 인간적인 감각을 잃은 공학은 결국 무엇을 위한 공학인가.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그 질문의 연장선에서, 제 인생 영화 목록에는 <로보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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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작 폴 버호벤의 그 영화. 어떤 이는 그저 B급 액션으로 보겠지만, 저는 그 안에서 다른 것을 봤습니다. 인간의 기억과 감정을 지운 채 최적의 범죄 진압 기계로 재설계된 머피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을 되찾아가는 이야기. <로보캅>이 묻는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기계가 아무리 완벽해져도, 인간이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AI 시대에 이보다 더 적확한 질문이 있을까요.


지금 당장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낭만이 사라졌다고.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낭만이냐고. 무역이든 마케팅이든 개발이든—이 세계에 낭만 같은 건 없다고.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낭만은 분명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성과지표에 잡히지 않고, KPI로 측정되지 않으며, 분기 보고서에 한 줄도 올라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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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tvN 드라마 〈태풍상사〉에서 오미선은 별 하나 없는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강태풍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럼 없는 거예요? 지금 당장 안 보인다고?"


보이지 않아도 별은 거기 있습니다. 낭만도 그렇습니다. IMF로 회사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던 그 시절에도—태풍상사의 사람들은 기어코 낭만을 붙들었습니다. 효율이 낭만을 몰아낼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에, 낭만은 오히려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AI가 모든 것을 처리해 주는 시대, 역설적으로 AI가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비 오는 오후의 냄새, 오랜 친구와의 말없는 시간, 예상치 못한 골목에서 마주친 작은 서점. 이런 것들은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들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것들입니다.


낭만은 지금 당장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진 게 아닙니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AI 시대의 낭만은 저항입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숏폼 콘텐츠의 속도에 익숙해져 3분짜리 영상도 1.5배속으로 봅니다. 감동적인 영화 장면 앞에서도 '이 장면 밈으로 쓰기 좋겠다'고 먼저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사진부터 찍습니다—나중에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증명'하기 위해서.


벚꽃 과제에 달린 댓글 중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지."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펐습니다. 봄이 와도 봄을 볼 수 없는 사람들. 계절이 바뀌어도 계절을 느낄 틈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강동우 교수의 과제는 일종의 처방이었습니다.


낭만은 단순히 감성적인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효율의 논리에 저항하는 행위입니다. 지금 당장 생산적이지 않아도, 측정되지 않아도, 성과로 남지 않아도—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을 느끼겠다는 선택. 시집을 읽고, 벚꽃을 보고, 로보캅 안에서 인간을 발견하고, 깜깜한 밤하늘에서 별을 찾겠다는 선택.


그 선택이 쌓여야 인간은 인간다워집니다. 그리고 인간다운 인간만이, AI가 흉내 낼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과제를 제출합니다.


1만 3천 개의 좋아요는 과제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어딘가에서 낭만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의 조용한 고백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변화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 점심, 밥을 먹으러 나가면서 한 번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퇴근길에 이어폰을 빼고 도시의 소리에 잠깐 귀 기울이는 것. 벚꽃이 피어 있다면, 스마트폰을 잠시 주머니에 넣고 먼저 그냥 바라보는 것.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낭만은 거기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공대생들이여, 벚꽃을 보고 오시라.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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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렇게 과제를 제출합니다.


P.S. 글 작성 후 윤문을 맡겼던 claude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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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넌 뭐니......


>> 저의 새로운 강연이 준비되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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