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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클랑 May 25. 2023

독일의 바그너 사랑

지독한 탐구정신 


리하르트 바그너는 (Richard Wagner, 1813-1883) 독일의 작곡가로, 독일 오페라 분야에서 무직드라마 (Musikdrama) 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다. 

그의 오페라의 대표적인 특징인 라이트모티브기법(Leitmotivtechnik)은 오페라 속 등장인물마다 대표선율(Leitmotiv)을 만들어 진행하는 방식으로 마치 전체의 음악만 듣더라도 각 캐릭터들이 살아움직이는 거 같은 생동감을 전달한다. 라이프치히에서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16살의 바그너 이야기는 그의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는 구조적인 형식미, 그리고 웅장함과 비장함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에 대한 논란의 지점들 

바그너와 그의 작품이 가 음악학계에서 늘 이슈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반유대주의 사상 때문일 것이다. 

독일에서 음악학을 공부할 때 들었던 세미나 중에 두 개는 바그너의 음악적 기법과 그의 음악 속에 담긴 반유대적인 사상이 그 주제였다. 

바그너의 음악적 기법을 다뤘던 수업에서는 그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공연중 특별히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킨 피에르 불레즈 지휘의 1980년 공연을 메인으로 하여 오페라 무대연출기법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의 음악 속에 담긴 반유대적인 사상을 주제로 한 수업에서는 반유대주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초반 한 달가량은 유대주의 개념부터 파헤치는 시간을 보냈다. (놀랍지 않은가?) 

바그너를 이해하기 위해 칸트 등의 종교철학 관련된 글까지 읽는 다는 것이 나에겐 괴로운 일이었지만,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 것이 진정 독일식 수업이구나'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들여다 보는 것은 물론이고, 한번은 그가 썼던 글인 '음악 속의 유대교'(Das Judentum in der Musik) 에 대해 다뤘던 시간이 있었다. 그냥 표준어로 적혀있는 학술적인 독일어 글도 읽고 이해하는 게 어려웠는데, 1850년에 쓰인 저서를 읽느라 나도 나와 함께 발표를 준비했던 독일 친구도 무척이나 애먹었었다. 

바그너는 그 글을 통해서 유대인 음악가들이 음악계를 다 해먹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유대인 음악가들과 철저히 선을 그었는데, 당시 수업시간에 학우들은 이 글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바그너의 논리가 이해가 안된다고들 했었다. 바그너는 이 글을 쓰기 몇 년 전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가 파리에서 흥행에 실패했었데다가 당시 유대인 작곡가 지아코모 바이어베어 (Giacomo Maybeer)의 입지도 컸던 걸 생각해보면, 바그너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유대인을 탓하고 싶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된다.  

2017년 바이로이트 오페라 페스티벌, '뉘렌베르크의 명가수' 중 전형적인 반유대적인 모습을 띈 인물 직스투스 베크메서 (Sixtus Beckmesser)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어디까지 추측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의 오페라 '뉘렌베르크의 명가수'에 등장하는 직스투스 베크메서라는 인물이 여러 부분에서 봤을 때, 반유대적인 모습이 투영되었다 하더라도 바그너가 직접적으로 '베크메서를 통해 반유대적인 모습을 표현했다'라고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계에선 바그너 작품는 반유대적인 작품이라고 결론 내리기를 꺼려한다. 바그너는 그 어디에서도 '나는 유대인 작곡가를 싫어한다'라고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바그너가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을 비판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그 나름의 이유라는 게 누군가에게 설득이 되어지면 그 때부터는 그 이유가 옳은 근거가 된다. 마치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에게 설득되어 진 것처럼 말이다. 



문화와 정치와의 관계

독일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히틀러가 바그너의 작품을 무척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히틀러가 자신이 정권을 잡기 50년 전에 사망한 바그너의 작품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문화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그너의 작품들은 독일의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곡들이 많다.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그의 작품은 더욱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활용되기에 좋은 매개체였다. 특별히 바그너의 오페라만 상영되는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제는 그 역사의 중심에 있다. 바그너의 죽음 이후로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제는 그의 와이프인 코지마 바그너와 그의 아들 지크프리트 바그너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1930년부터는 지크프리트 바그너의 와이프인 비니프레트 바그너가 인수하여 유지되었다.  


1937, 히틀러와 함께 있는 비니프레트 바그너 (picture-alliance / akg-images) 

\비니프레트 바그너는 나치당이 정치적으로 급부상 하기 이전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강력한 지지자이자 가까운 친구였다. 그 이후로도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제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나치 치하 동안 히틀러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히틀러는 나치당이 급부상하고부터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축제에 깊이 관여했으며, "전쟁축제"라 명명하기도 했었다. 바그너의 가문 일부 구성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런 상황에 반대했지만, 시대의 흐름상 거부할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의 문학가이자 비평가인 토마스 만 (Thomas Mann)은 당시의 바이로이트를 '히틀러 전용 극장'이라 일컫기도 했다.  


히틀러의 패망 후 바이로이트 오페라 축제는 나치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애썼다. 비니프레트 바그너는 전범 재판소에 의해 근신 처분을 받았고, 바이로이트 축제에 관여를 금지 당했다. 이후 축제에 대한 권한은 그녀의 두 아들인 빌란트(Wieland)와 볼프강(Wolfgang) 바그너 형제에게 위임 되었다. 볼프강 바그너의 은퇴 이후 그의 딸이 문화부 장관에 의해 지명되어 축제를 계승하였다. 


정치와 순수예술에 대한 평가는 분리되어야 한다 

솔직히 정치와 순수예술의 관계는 쉬운 주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테마를 가져온 이유는 순수예술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정치색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음악이 논란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계속 연주되고 연구되어 온 이유는 바그너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음악사적 평가가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바그너의 음악은 독일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하기에 논란성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논의하고 연구하며 바그너의 음악적 유산과 그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 기록을 잘 보존해왔다. 


난 바그너와 관련된 테마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작곡가 '윤이상'을 떠올린다. 

지금도 나의 할아버지 세대의 분들은 윤이상을 빨갱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윤이상이 빨갱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음악은 꾸준히 연구되어지고 연주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화사적인 맥락에 있어서도 그의 삶과 음악은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언제 한번 윤이상의 음악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최근 대구시립예술단의 베토벤 9번 교향곡 공연이 종교 화합 자문위원회에 의해 금지되었던 해프닝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연은 성황리에 마쳤지만, '우리 사회가 순수예술에 대해 얼마나 이해가 없는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음악과 예술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관련 주제들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이 많았으면 좋겠다. (교육현장에서도 말이다.) 그 것이 결국에는 윤이상, 진은숙의 음악과 같은 뛰어난 우리나라의 현대음악을 지켜가고 미래에도 이어져 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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